장하준이 말하는 절반의 진실
장하준이 말하는 절반의 진실
  • 미래한국
  • 승인 2011.10.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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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래교수의 세설직론 / 김정래 편집위원·부산교대 교수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많은 이들에게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만큼 많은 식자들로부터 그 진정성에 의심과 우려를 자아냅니다. 책의 부제인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한다’는 명분과는 달리 자본주의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경제 문제 각론에 관해서는 경제학을 전공한 쟁쟁한 논객의 비판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경제학적 논의와 경제 문제는 논외로 하고 경제 외적 논점 몇 가지를 검토하고자 합니다.

첫째, 자유시장의 존재 부정을 들 수 있습니다. 저자는 아예 책 서두에 ‘자유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이 성립하려면 유물론적 입장에 서야만 성립합니다.

그의 단언은 자유시장이 시장에서 파는 생선처럼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력한 집안에서 성장한 장 교수에게 모성애를 눈으로 보여 달라고 질문한다면, 그가 뭐라고 답할지 매우 궁금합니다.

자유시장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물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오관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어(fact term)’와, 그렇지 않은 ‘관념어(notion term)’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실증주의자들은 마치 감각 단계의 어린 아이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문명세계의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관념어로 표현됩니다. ‘사랑’ ‘자유’ ‘책임’ ‘창조’ ‘질서’ 등은 모두 관념어입니다.

남녀 간의 애정행위를 보고 ‘사랑’이라고 확인할 수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확인한 것은 ‘애정행위’이고 이를 통해 유추한 것이 ‘사랑’입니다. 물론 ‘남대문시장’처럼 구체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사실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시장’은 관념어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시장을 규정한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도 관념어입니다. 유물론자의 눈에는 자생적 질서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질서’가 유형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생적 질서에 해당하는 ‘시장’ 또는 ‘자유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봄이 오면 아지랑이 피는 것처럼 자연 질서만이 존재할 뿐, 자생적 질서인 ‘보이지 않는 손’은 애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육안(肉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안목(眼目)’이라는 것도 있으며,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도 있고, 지혜의 눈인 ‘혜안(慧眼)’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시장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의 주장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자신이 주장하는 ‘더 나은 자본주의’를 “눈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둘째, 진보를 자처하는 모든 일들의 진보관이 문제가 되지만, 장 교수가 자신의 사고 이면에 깔고 있는 맹목적 진보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판촉 차원에서 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표지에 다소 성의 없어 보이도록 휘갈겨 남긴 친필메모를 통해서 그가 막연히 ‘진보’를 동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독자들에게 ‘투쟁동력’ 충전을 권장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겨납니다. 200년 전의 노예해방, 100년 전의 여성참정권, 50년 전의 독립운동이 당시에는 황당하고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이들이 모두 지금 보면 모두 진보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같은 논거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넘어서는 ‘진보’를 성취해야 하고 이를 위해 좌절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듯합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자유민주·시장경제의 산물이다

셋째, 자칭 진보주의자들의 진보가 이름 그대로 진보인가 하는 점입니다. 인류 문명이 진보해 온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 특히 우리 사회의 진보와 발전은 오늘날 자칭 진보들이 주장하는 ‘진보’가 이루어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진보는 진보주의자들이 그토록 부정하고자 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엄연히 이루어낸 산물입니다.

물론 자칭 진보들이 역사적으로 이루어낸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들만의 진보’가 인류를 오히려 퇴행과 퇴보의 길로 끌어들인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진보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아예 ‘퇴보’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제4장에서는 인터넷과 세탁기를 거론하면서 ‘퇴보’를 은연중에 찬양하고 있습니다.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하면서 과학기술혁신이라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보수를 지향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보수는 과거에 집착하거나 현상을 고수해 퇴행하는 노선이 아닙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처럼 옛 것을 무조건 타파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옛 것에서 새로운 지혜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이와는 달리 진정한 보수의 의미를 간과한 채, 자유시장과 과학문명의 진전을 부정하는 퇴보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넷째, 과도한 민주화 욕구를 앞세워 노직이 경계한 ‘억측의 역사(conjectural history)’를 상정해 놓고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청사진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설정한 대로 역사가 흘러간 것이 아닌데도 장밋빛 청사진대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준 현실은 그들이 제시한 청사진은 자유의 가치를 폄훼한 결과 지구상 절반의 사람들을 퇴행의 나락으로 몰고 간 사실입니다. 인류가, 역사가, 그리고 한 사회가 공장의 기계설계처럼 기획해 제 시간에 생산물을 뽑아내듯이 굴러간다고 믿는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은 생각을 담은 것이 ‘거대사회공학기획(Grand Social Engineering)’입니다.

그들은 이 거대 기획을 통해 국가 개입을 합리화하고 큰 정부로 가는 것이 능사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실제로 그의 책 제19장에서 ‘계획경제’와 제21장에서는 큰 정부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듯이, 그의 책에 면면히 흐르는 맥락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더 나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행태입니다.

 

우리나라 경제계획은 기업활동 지원하기 위한 것,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달라

다섯째, 자조(自助, self-help) 정신을 곡해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우선 제15장에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고 함으로써 가난을 칭송하는 것인지 그 의도를 정확하게 헤아릴 수 없도록 사실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책에서 기업가 정신보다는 공동체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집합주의 논거를 설파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기업가 정신이 중요하다고 해도 기업가 개인이 모든 성과를 이루어낼 수는 없습니다.

기업을 구성하는 구성원의 노력도 따라야 하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회간접자본이나 확고한 법 체제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집합적 개념인 공동체 가치가 기업가 정신보다 중요하다는 논리를 성립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부지런하다는 말을 함으로써 원인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부자 나라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가 국부(國富)를 이루려면 자신들이 가진 천연자원보다도 중요한 것이 그들이 지닌 근면성과 수준 높은 성취동기입니다. 그래야 부를 쌓아 갈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나태하고 성취 수준이 낮습니다. 그 결과 부가 쌓이지 않는 것입니다. 즉 근면성은 부의 원인이 됩니다. 즉 부자가 되려면 근면해야 합니다.

그냥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취하려는 목표가 있고 이를 성취하려는 심리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해야 합니다. 과거 대한민국의 1960년대, 1970년대가 그러했습니다. 그 결과 경제규모 10대 부국(富國)이 된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가난한 나라 사람이 부지런한 것은 부의 성취 과정에서 본 것이라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부자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지런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단히 부자가 돼야 옳습니다. 그들이 가난한 것은 부지런하지도 않고, 부를 이루려는 성취동기가 없거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17장에서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도 옳지 못합니다. 앞서 근면함만 가지고 부를 이루는 과정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내면적으로 성취동기가 강하게 작용해야 합니다. 그 성취동기의 원동력은 대개 교육에서 얻어집니다. 따라서 교육을 많이 시킨 나라가 더 잘 살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들이 받은 교육으로 인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습득하는 것은 물론 성취동기가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저개발국가의 입장에서 우리의 새마을운동은 아주 좋은 교육프로그램입니다. 왜 아직도 많은 저개발국가들이 새마을운동을 배우려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교육이 잘 살게 되는 동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섯째, ‘우리는 여전히 계획경제 속에 살고 있다’고 함으로써 계획경제를 찬양하고 은근히 전체주의 사회를 추켜세우면서 우리를 그 쪽으로 떠밀고 있습니다.

1960~70년대의 경제개발계획은 정부 주도로 이루어져 큰 성과를 거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계획경제 찬양론’의 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과거 우리가 추진했던 경제개발계획은 이를테면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기획된’ 계획경제입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추구하는 계획경제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추진한 계획경제는 기업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여러 가지 후진국적 장애를 제거해 기업 활동을 도와주는 균제와 계획경제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본주의를 타파의 대상으로 보고, 모든 것을 국가와 정부가 주도하고 경제주체가 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와는 성격이 판이합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기업 활동을 규제하고 봉쇄하는 계획경제’입니다. 이 사실을 혼동해 계획경제를 찬양한다는 것을 매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모르긴 해도 큰 정부로 가는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큰 정부의 계획경제는 말이 좋아 사회주의 체제이지 전체주의로 가는 첩경입니다.

‘큰정부’가 변화에 민감하다는 것은 잘못된 논리

아닌 게 아니라 이어지는 제21장에서 그는 ‘큰 정부’를 노골적으로 찬양합니다. 이유는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커지면 변화에 민감하다는 말은 체중이 불어나야만 몸이 유연해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정부가 커지면 경제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게다가 큰 정부에서는 많은 경쟁체제가 사라지고, 경쟁을 유인하는 기제도 없어집니다. 오직 정부의 ‘지침’과 규제에 따르는 일만이 능사가 돼 버립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적지 않은 금융기관이 문을 닫고 구조조정된 것은 관치금융의 결과라는 사실은 경제 전문가 아닌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만약 금융기관이 관치에서 벗어나 있었다면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려스러운 것은 큰 정부를 지향하는 그의 발언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릇된 경제관과 가치관을 갖게 한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그의 ‘23가지 지적(?)’은 보이지 않게 인기 영합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젊은이들의 가려운 데를 잘 긁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려운 곳을 긁어줄 사람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필요한 것을 적절한 방법으로 알려주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 다소 인기와 멀어지고 지지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베스트셀러를 낸 지도층 인사라면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장 교수의 저작이나 발언에서는 그러한 진정성을 찾기 어렵습니다. 진실처럼 보이지만 뜯어보면 진실이 아닌 경우를 ‘하프-트루쓰(half-truth)’라고 합니다.

정체가 불분명한 경우, 그 실체를 잘 뜯어보아야 합니다. 장 교수가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하면서 자유시장의 존재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부정한다면, 그것은 유물론에 빠진 것입니다. 진보를 기치로 사회를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합니다만, 자칭 진보들의 행태가 결과적으로 인류 문명을 퇴행시키고 퇴보하게 했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닙니다.

역사주의의 낡은 법칙이나 사회공학적 기획에 따라 거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거대한 전체주의를 초래한다면, 그것은 장밋빛 희망이 아니라 인류의 재앙을 다시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닌 하프 트루쓰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합니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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