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公개념에 매몰된 私개념
과도한 公개념에 매몰된 私개념
  • 김정래 편집위원
  • 승인 2011.11.04 13: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정래 교수의 세설직론 / 김정래 편집위원·부산교대 교수

 앞서(제398호) ‘공익’과 ‘사익’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공익 추구가 결국 사익에 귀착되며, 사익 추구와 괴리된 공익 추구는 신기루임을 확인했습니다. 이 논점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공(公)’과 ‘사(私)’의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공’과 ‘사’의 대립된 양상이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는 ‘공’과 ‘사’의 구분을 재산관계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공’과 ‘사’의 문제를 재산관계를 떠난 문제로 보는 경우입니다.

전자가 일차적으로 정치-경제적 관심사라면, 후자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사회문화적 관심사입니다. 이 경우 후자는 ‘공(公)’이 아니라 ‘공(共)’의 의미가 더 가깝다고 해야 합당합니다. 여기서는 전자에 초점을 맞춰 풀어가고자 합니다.

公과 私가 선악의 개념 구분은 아니다

칸트
일상적으로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됩니다. 지극히 당연하게 들리는 이 말에는 정책 결정을 아주 그릇된 곳으로 몰고 갈 수 있는 크나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론 ‘공(公)’과 ‘사(私)’는 엄격히 구분해야 합니다. 친목회 총무가 회원들로부터 거둬들인 회비를 몰래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한다든지, 공적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공’과 ‘사’의 엄격한 구분이 우리로 하여금 은연중에 공-사의 이분법을 선-악 또는 옳음[正]-그름[邪]의 이분법으로 잘못 전이시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먼저 ‘공’과 ‘사’의 개념이 어떻게 성립됐는가를 보고 온당하게 파악하지 못하거나 과도한 공(公) 개념이 국가 정책에 가져다주는 폐해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공공(公共)’이라고 할 때, ‘共’은 ‘나누어 갖는다’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글자는 이 글자가 포함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글자일지 모르지만, 원천적으로 개인의 소유권이나 사유재산권과는 상반되는 개념이므로 상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목하 관심사인 ‘公’은 ‘공평하다’, ‘공정하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여기서 ‘私’에서 나온 ‘사사(私事)롭다’는 말이 간혹 ‘공정하지 못하다’, ‘공평하지 못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邪’라는 의미로 부당하게 치환합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윤리학자들이 ‘이기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비도덕적인 것, 즉 사악(邪惡)한 것으로 전제하거나 간주합니다. 칸트 윤리학이 대표적인 경우이고, 이를 토대로 한 롤스의 사회정의론, 그리고 샌들을 비롯한 공동체주의자들이 ‘私’의 의미를 부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으로 봅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사유재산을 가장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자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이들조차도 이러한 이분법에 근거한 ‘공개념’을 들이대면 자신의 논리 전개에 위약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이들은 ‘토지공개념’과 같은 정책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대중을 향한 설득력이 약한 것은 ‘私’에 대한 ‘公’의 우월성을 명백하게 반박하지 못하는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공’과 ‘사’의 의미를 철저히 파헤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公’과 ‘私’의 해자(解字)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정의는 본래 개인 차원 문제

우리가 흔히 ‘公私’ 또는 ‘公’과 ‘私’라고 하지만, 글자의 발생순서는 ‘私’가 앞섭니다. ‘禾’와 ‘’로 구성된 ‘私’는 ‘’에서 발전한 글자입니다. 여기서 ‘’는 ‘마늘 모()’ 자가 아닙니다. 발음 그대로 ‘사’입니다. 자전(字典)을 찾아보면, 누구나 ‘’가 ‘私’의 고자(古字)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글자는 입 구(口)자의 변형으로서 ‘사사롭다’는 의미를 가지며, 결과적으로 사적인 재산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여기에다가 재산을 함의하는 ‘벼 화(禾)’ 자가 첨가돼 오늘날 사용하는 글자가 된 것입니다.

한편 ‘公’은 ‘八’ 자와 ‘’ 자의 결합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여덟 ‘八’자는 ‘좌우로 가르는 모양을 가리키는’ 지사(指事) 글자입니다. 즉 ‘公’ 자는 ‘’를 ‘가르고 나누는 일’을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그러니까 ‘公’ 자는 사유재산을 나누는 일을 뜻합니다. 오늘날의 의미로 보면 분배를 가리킵니다.

더 정확하게 ‘公’의 의미를 파헤쳐보면, 그 의미는 ‘배사(背)’라고 합니다. 여기서 ‘背’는 ‘등지다’는 의미이므로 ‘背’라는 뜻을 가진 ‘公’은 ‘사적인 것을 등지다’는 뜻을 지닙니다. 사적인 것을 배척하고, ‘공평하게 갈라먹는다’는 의미가 ‘公’이 가진 뜻입니다. 사적 재산을 철저히 배척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私’의 의미는 나누기 이전의 상태, 이를테면 디폴트 스테이트(default state)를 지칭하며, ‘公’의 의미는 인위적으로 사적인 재산을 나누는 상태 또는 행위를 지칭합니다. ‘公’의 의미가 ‘私’를 단순히 사사로운 것으로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사악한 것으로 잘못 발전하게 된 데에는 국가나 권력 기관이 ‘분배’를 행할 때, 흔히 원용하는 ‘정의(正義)’라는 말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정확하게 설파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회정의(social justice)’라는 말 자체가 신기루(mirage)인 것처럼, 사회정의를 앞세운 ‘公’ 개념은 늘 실체 없는 신기루이거나 치명적 사기(fatal pretence)일 뿐입니다. 여기서 ‘신기루’라고 하는 것은 원래 사적 영역의 문제를 공적인 것으로 부당하게 치환해 버린 결과 실체 없는 허상이 돼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아도, ‘정의’ 또는 ‘사회정의’는 원래 사적인 영역의 문제였다가 공적 영역으로 치환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의는 개인 차원에서 논의되는 덕(virtue)의 문제였습니다. 또 ‘정의(justice)’를 의미하는 희랍어 ‘dikaiosyne’는 ‘길(path)’을 의미하는 희랍어 dike에서 비롯돼 나온 말 dikaios의 명사형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희랍어가 지칭하는 뜻은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일을 온당하게 추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가 사적 요소에 추가됐을 뿐, 어디에도 인위적으로 분배하거나 개입한다는 의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公’개념은 인위적 개입과 조작을 전제

사회정의를 비롯해 각종 정책 수단에 ‘公’ 개념이 포함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근대성의 발현과 함께,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의 결합에 따른 ‘구성주의적 합리주의’, 효용 극대화 문제를 공적인 영역으로 치환해버린 19세기 공리주의, 근대국가 형성에 따른 관료주의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 과정의 이면에 깔린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公’ 개념이 인위적 개입과 조작을 전제로 한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사회정의 문제를 논의할 적에 자주 언급되는 ‘형평(衡平, equity)’의 개념을 분석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衡’과 ‘平’의 해자(解字)를 보면, 바로 인위적으로 개입해 조작한다는 의미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형평을 위한다는 정의 문제는 인위적 개입을 요구한다는 것은 이 글자의 생성 단계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형평(衡平)’과 ‘평형(平衡)’은 모두 ‘둘 이상의 사물이나 대상이 균형을 이루어 평등한 상태’를 뜻한다. 여기서 ‘형(衡)’과 ‘평(平)’ 두 글자는 똑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으므로 평화(平和), 통일(統一), 상호(相互)의 예(例)처럼 앞뒤 순서를 바꾸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衡(형)의 원래 모양은, 소전(小篆)의 자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사람’의 상형이었다. 지금 마치 魚(고기 어)에서 꼬리[?]를 제외한 몸체처럼 보이는 가운데 윗부분은 ‘아가리가 질끈 동여매어진 보따리’가 변한 상태이고, 그 아래 大(대)는 그 ‘보따리를 이고 균형을 잡은 채 두 팔을 벌리고 선 사람’의 형상이다. 이 글자의 좌우에 벌려진 行[항: 네 가리의 상형]은 뒷날 추가된 것으로, 이 사람이 서 있는 위치를 나타내면서 발음부호 역할까지 하고 있다.

衡(형)은 머리에 커다란 보퉁이를 이고 손으로 붙잡지 않고도 길을 재빠르게 걸어가는 신기(?)를 가진 왕년의 우리나라 아낙네들을 연상케 하는 글자이다.

平(평)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저울의 한 종류인 ‘천평칭(天平秤)’의 상형이라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저울대’의 상형인 一[一(한 일)이 아님] 아래에 발음부호인 [변: ‘짐승 발자국’의 상형]을 더하여 본뜻을 ‘저울’로 한 형성자의 변형이라는 설이다.

둘 다 저울과 관계가 있으므로 당연히 ‘평평하다’ ‘높낮이가 없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김언종, 2001, 한자의 뿌리, 서울: 문학동네, 1019~1020쪽.) >

지금까지 우리는 ‘公’ 개념이 어떻게 오늘날처럼 성립해 사용됐는가를 확인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公’ 개념은 무엇을 가른다든지 빼앗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에 반해 ‘私’ 개념은 디폴트 스테이트를 지칭합니다. 둘째, 公-私 개념 대비는 善-惡, 또는 正-邪의 대비에 상응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반대입니다. 公 개념이 그릇된 것이며, 私 개념이 오히려 선한 상태를 지칭합니다. 셋째, ‘公’ 개념 자체는 원래 ‘私’ 개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처럼 ‘公私’가 아니라 ‘私公’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말의 순서가 바뀐 것은 어떤 연유일까요. 이는 전적으로 추측인데,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음양(陰陽)의 경우처럼 논리적 선후 관계는 뒤집어 사용하는 경우처럼 ‘私公’을 ‘公私’로 뒤집은 경우라고 보는 것입니다. 음양이론에서도 논리적 선후 관계는 陽이 陰에 선행하지만 묘용(妙用)의 측면에서 뒤집어 사용합니다.

다른 하나는 公私를 善惡, 正邪에 견주어 유추한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위정자들은 ‘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를 쉽게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관심사를 ‘사회정의’니 ‘형평’이니 하면서 ‘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대개 권력자이거나 권력을 잡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쉽게 수긍이 갈 것입니다.

 

선동적으로 동원되는 ‘公’개념에 주눅 들어서는 안 돼

한편, 公과 私의 문제를 이렇게 해석함에 있어서 혹자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私’에 해당하는 영어 ‘private’의 어원이 ‘빼앗다’라는 뜻의 라틴어 privatio (=take away)에서 나왔다는 점을 들어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의 어원이 되는 private-public의 형성 관계는 한자와는 정반대의 순서입니다. ‘public’의 어원은 고대 로마의 집단 농장과 관련된 공동 재산이라는 뜻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라틴어의 ‘私(private)’는 공동 재산 중에서 개인의 것을 취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가의 인위적인 개입이나 절도와 사기 같은 범죄행위처럼 남의 것을 빼앗는다는 의미와는 무관합니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해서 ‘私’가 그릇된 것[邪]이며, ‘公’이 옳은 것[正]이라고 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公’ 개념이 잘못 과도하게 사용된 경우는 너무도 많습니다. 심지어 헌법에도 ‘공공복리’가 나오며 부동산, 세제, 아파트, 독과점, 복지 등 정부의 모든 정책이 공공정책을 표방합니다. 교육의 경우도 예외는 결코 아닙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립학교법입니다. 사립학교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립학교를 ‘공공의 목적으로’ 규제하는 악법입니다.

그 중 백미(白眉)는 사립학교법에 규정된 개방이사제와 사학조정위원회의 설치입니다. 개인이 사적 재산을 출연한 학교를 가지고 ‘공적(公的)’ 기여 운운하며 규제하고 나아가 찬탈하고자 하는 사립학교법이 폐지돼야 할 당위성은 다른 여러 이유에 앞서 이제까지 지적한 ‘公’ 개념의 부당성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제 우리의 상식적 견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논거를 하나 확보한 셈입니다. 어느 정책이건 간에 선동적으로 동원되는 ‘公’ 개념에 기가 죽거나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지한다면 이 점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公’ 개념은 인위적이고 그 명분과는 달리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책을 내는 수단을 제공함은 물론, 경쟁의 진정한 미덕이 온전하게 발현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公’과 ‘共’은 실질적으로 동의어인 셈입니다. 따라서 ‘私’의 의미를 ‘邪’의 의미로 치환하고자 하는 좌파의 시도에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한국)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