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충원 언덕의 예배당을 아시나요
국립현충원 언덕의 예배당을 아시나요
  • 미래한국
  • 승인 2011.11.0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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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창립 30주년 국군교회 리상숙 목사

국군교회가 10월 16일 30주년을 맞았다. 1981년 국립서울현충원 내 6.25 전사자 기록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야당, 여당의 입김을 견뎌내며 수많은 장병들을 길러낸 ‘하늘나라 군대’의 훈련소이기도 하다. 때문에 매년 창립기념예배가 열리는 날이면 각계 인사들이 참여해 축하 인사를 건넨다. <미래한국>이 지난 30년간 국군교회를 섬겨온 리상숙 목사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장군의 딸도 울게 한 묘지 내 허름한 건물
  
굳게 닫힌 국립서울현충원의 후문을 통과하면 오르막길 안쪽에 위치한 국군교회가 보인다. 다른 교회라면 주일학교에서나 쓸법한 커다란 과자봉지들이 창립예배기념선물로 잔뜩 쌓여 있다. 성도의 대부분이 군인들이기에 리 목사의 전도 방법도 간식거리를 선물하는 ‘군인 맞춤형’이다.

리 목사는 ‘작은 것 주면 내무반에서 싸운다’며 푸근하게 웃었다. ‘먹이는 정’이 넘치는 것은 여느 어머니들과 마찬가지지만 군과의 인연은 남다른 리 목사다. 여군 장교 출신에 아버지를 장군으로 둔, 일명 ‘장군의 딸’이었다. 그러나 고위 간부의 딸로서 대접 받으며 시작한 목회는 아니었다.

“싱가포르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한 서울 교회에서 섬기던 시절, 여름성경학교 때 봉사한 군인 세 명이 있었어요. 그 친구들이 국립묘지(국립서울현충원으로 바뀌기 전의 이름)의 영현 중대 소속이었던 겁니다. 당시 영현 중대에서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그러자 중대 대대장이 스님, 목사님, 신부님 가리지 않고 한번씩 초청해서 종교 의식까지 했대요. 하지만 다들 한번씩 밖에 안 오고 발걸음을 끊었다고 해요.”

국립묘지 부대를 다녀간 수많은 종교인 중 한 명이 될 뻔한 그의 삶을 바꾼 건 신비한 체험이었다.
“대대장에게 제 얘기를 했는지 그 친구들이 저희 집까지 찾아와 목회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에요. 저는 군 생활에 다소 질려 있던 터라 단번에 거절했지요.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심장이 뛰면서 숨이 막히는 일이 일어났어요. ‘그 일이 내 일인데 왜 거절했느냐’는 음성이 들리더군요. 결국 다음날 현충원에 갔는데, 식당에서 예배를 드리라기에 저도 모르게 ‘종교 쇼는 안 합니다’하고 나와 버렸어요. 당황한 대대장이 붙잡으면서 6·25 때 전사하신 분들의 기록카드를 보관하는 곳으로 안내했어요. 20년간 예배를 드리게 된 장소지요.”

너무 작고 허름한 건물이라 리 목사는 한동안 어디 가서 교회라는 얘기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외풍이 심해 나무 때고 난로를 피워도 군인들은 얼음장 같은 바닥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창립 후 9년째 되는 때 정부의 방해도 심해졌다. 교회에 십자가도 못 걸게 하더니 알게 모르게 괴롭힘을 가해 군종병들이 예배에 안 나오기 시작한 것. 그나마 ‘장군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후에는 압력이 덜했지만 리 목사는 목회를 그만 두고 싶을 지경이었다고 고백한다.

“힘든 마음에 기도원 가서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오니 교회 앞이 웅성웅성거리는 거에요. 기도원 간 사이에 부대원들이 싹 바뀌었던 거죠. 새로 온 중령, 소령들이 다 집사, 장로들이라 뭐 도와줄게 없느냐고 찾아온 거였어요. 제일 먼저 십자가를 달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페인트칠 하고 바람막이도 해달라고 했죠.”

예배 방해하던 군인, 귀신 들린 군인…

보수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열악한 환경이었다. 리 목사는 새로운 건물을 꿈꾸며 본인의 헌금으로 건축을 하고자 했지만 그조차 허락하지 않자 끈질기게 정부에 요구한 결과, 시찰을 나온 장군과 결판을 짓고 건축허가를 받아냈다. 1평당 15만원 남짓으로 지어 올린 작은 교회지만 리 목사가 10년간 쌈지 돈을 모아 세운 예배당이다.

“사실 국군교회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어울리지 않았어요. ‘국군’이라면 육해공군이 다 있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육군 뿐이었거든요. 하지만 기도 끝에 얻은 이름이라 밀고 나가니 어느새 현충원에 육·해·공군이 다 들어와 있더라구요.”

그동안 국군교회를 거쳐 간 군인의 숫자는 국가보안상 밝힐 수 없지만 공문이 내려온 후 예전보다 출석 인원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상급자의 권한으로 장병들을 예배에 동원하는 일을 금지하는 내용의 공문으로, 대통령의 종교가 야당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그래도 국군교회가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난 청년들이 있었다.

"불신자인 당직사관이 있었는데 예배시간에 일부러 집합을 시켜서 군인들이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방해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울며 기도하고 있는데 연락이 왔어요. 군인들 행군을 시키던 당직사관이 넘어져 반신불수가 됐다는 얘기였어요. 국군병원에 면회 가서 ‘나으면 군인들 예배드리는 것 방해하지 않겠습니까?’하니 그러겠다고 하더라구요. 기도해주고 나왔더니 한 달 만에 나아서 퇴원했어요. 그 뒤로 예수 믿게 됐죠.”

하나님의 기적은 계속 됐다. 부대의 골칫거리였던 ‘귀신 들린 사병’이 기도를 통해 정상으로 돌아 왔다. 국군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에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초창기와 달리 사고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리 목사에 대한 소문이 나자 다른 부대에서까지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한 사령관님이 저를 초청하시더니 사격을 해보라는 거에요. 알고 보니 참모들이 하도 권총을 못 쏴서 저에게 시범을 보이라는 거였어요. 사실 장교 시절 훈련 받을 때 딱 네 번 쏴본 경험 밖에 없었기에 저도 제 실력을 믿지 못했죠. 기도하고 예전에 배운 교범을 떠올리며 쐈더니 10점짜리에 다 맞췄어요. 그러자 사령관님은 저도 하는 일을 못한다며 참모들에게 화가 나셔서 각 부대 예산을 다 깎아 버리셨어요. 결국 그 돈으로 어느 개척교회의 건물을 세우게 됐답니다.”

유학 대신 목회의 길을 걷다

 
리 목사의 은사는 ‘교회 건축’이 아닌가 싶다. 학원 강사로 일하며 빠듯하게 생활하던 시절에도 본인 집의 커튼은 못 달지언정 건축헌금, 선교헌금만큼은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처음부터 헌신적인 삶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만 해도 유학을 꿈꾸던 야심찬 여인이었고 든든한 아버지가 있었으니 사회적인 성공도 어느 정도 보장돼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달랐다. 제대 후 가기로 돼 있던 유학에 예상치 못한 난관이 생긴 것이다.

“나라 정책이 바뀌어 저희 아버지 부대 출신에게만 유학비용이 지급되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계획을 미루고 유학을 가게 해달라는 기도만 드렸죠. 섬기던 교회에서 천막 치고 가마니 깔고 예배드리던 시절이었는데 부흥회 때 성령 체험을 했어요. 기도를 하던 중 누가 무릎 위에 신학대학 책을 놓고 간 것을 계기로 현재의 백석대학인 기독신학교를 수료하게 됐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죠.”

기독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자 싱가포르 지도자선교양육센터에서 리 목사를 초청했다. 아시아와 세계 각국의 젊은이를 초청해 크리스천 리더로 양육한 후 자국으로 파송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당시 싱가포르는 제3세계 국가로 분류돼 입국 제약을 가하는 상태였고 영화배우 최은희 납치사건으로 분위기는 더욱 냉랭해져 있었다.

포기할 수 밖에 없던 차에 기적이 일어났다. 출국을 미룬 당일, 싱가포르 에어라인이 연장됐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말레이시아 공사관으로 가니 직원이 모두 바뀌어 수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떠난 선교 유학에서 한국 대표로 프리젠테이션을 맡는 등 이후 목회를 시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한 청년이 찾아왔다. 과거 국군교회에서 성가대로 열심히 봉사하던 청년이라고 한다. 인생의 고민을 털어 놓는 청년의 이야기를 리 목사는 어머니처럼, 친구처럼 들어주다 화통한 목소리로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30년간 길러낸 자식이 몇 명일지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국립서울현충원을 거쳐 간 군인들은 알 것이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이가 있었고 덕분에 과자 한 통과 비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는 것을 말이다.

조진명 기자  jaduj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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