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의 상처받은 자존감 치유가 꿈
청년들의 상처받은 자존감 치유가 꿈
  • 이근미
  • 승인 2011.12.06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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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미스코리아 진 이성혜

 
2011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공식 인정받은 미스코리아 진 이성혜 씨는 요즘 여성들이 선호하는 딱 그 모습이었다. 희고 투명한 피부, 갸름한 얼굴형, 큰 눈, 가녀린 몸매에 긴 다리를 가진 그녀는 동양적인 단아함과 또렷한 이목구비로 이국적인 미를 동시에 풍겼다. 세계 3대 패션디자인학교로 꼽히는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에 재학 중이며 3개 국어에 능통한 이성혜 씨는 각종 기사에 ‘엄친딸’ ‘미모 종결자’로 소개되고 있다.

더욱이 ‘미스코리아 임기 중 방송진행’이라는 최초의 기록을 세워 앞날이 주목되고 있다. 이성혜 씨는 12월 1일 개국한 채널A ‘김성주의 모닝카페’에 김성주 씨와 함께 진행을 맡았다.

8월 3일 열린 55회 미스코리아 본선 선발대회 이후 4개월간 방송 출연과 각종 행사 참석으로 정말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유엔재단과 국제구호단체 월드휴먼브리지가 진행하는 ‘말라리아 퇴치 넷츠고 캠페인’ 홍보대사를 비롯해 디자인 코리아와 여수세계박람회 홍보대사도 맡았다.

이성혜 씨는 미스코리아 상금 2,000만원 가운데 1,000만원을 아프리카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살충모기장 구입 기금으로 기부했다. 나머지 1,000만원은 아버지가 멘토링하는 청년들의 대학원 입학금으로 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정형외과 의사이면서 신학을 전공한 이선일 장로로 20여 년 전부터 청년 사역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다고 한다.

“제가 청소년 사역을 하길 원하셨어요. 그 일을 위해서 이름이 알려지는 게 낫다고 생각해 오래 전부터 미스코리아에 나가라고 권하셨어요. 어릴 때 아빠가 리틀미스코리아, 철쭉한복제 같은데 출전시켜서 그때도 1등을 했어요. 저는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는 걸 싫어해요. 미인대회 특성이 외모를 평가하는 것이니 전혀 나갈 생각이 없었지요.”

더욱이 자신이 예쁘다는 생각을 안했고, 따라서 미모를 활용하는 직업을 가질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으로 혼자 유학을 떠났어요. 처음에 미국인 집에서 좀 살았고 그 다음에는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저를 감싸주는 사람보다 저를 평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산 셈이죠. 내가 예쁘다 존귀하다는 생각보다, 왜 이것 밖에 안 되지, 왜 여기까지 밖에 못하지, 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는 결과물만 보여드리니 ‘내 딸이 잘 하나보나’ 생각하셔서 저에 대한 기대치가 크셨어요. 저는 기대치와 평가 사이에서 만족이 없었고, 언제나 100%가 채워져야만 행복했고 그 행복의 순간은 짧았어요.”

네 살 때부터 성경 암송

힘든 순간을 지탱해준 것은 성경 말씀이었다.

“아빠가 4살 때부터 성경 말씀 한 절 외울 때마다 용돈을 1,000원씩 주셨어요. 용돈 받는 재미에 열심히 외웠죠. 용돈이 필요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같은 짧은 성경 10개를 외워서 아빠한테 달려가곤 했죠.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외운 성경 말씀이 힘들 때마다 생각났어요.”

이성혜 씨의 증조할아버지는 평양에서 교회 영수로 섬기다가 공산군의 죽창에 찔려 순교하셨고 할아버지는 대를 이어 목회를 하셨다.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이성혜 씨는 애초에 음대에 갈 계획이었다. 4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해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월넛힐예술고등학교에 다닌 그녀는 명문 음대 진학이 거의 확정됐을 때 갑자기 바이올린을 포기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첼로, 플루트 등 각종 악기와 한국무용을 배웠어요. 그 중에서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어서 부모님이 시키셨는데 저는 스트레스부터 받으니 재미를 느낄 여유가 없었죠. 대학 진학을 앞두고 평생 바이올린을 할 생각을 하니 전혀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의예과로 진로를 바꾸어서 바로 대학에 들어갔는데 누구에게 말하기 창피한 대학이었어요. 부모님께 미안하고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2학년 때 아이비리그에 있는 학교로 편입할 계획이었죠. 1년 동안 새벽기도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편입할 수 있는 충분한 점수를 다 확보했어요. 아이비리그의 여러 대학에 서류를 보냈는데 다 떨어진 거예요.”

그때 실망의 마음, 섭섭한 마음을 기도로 다 쏟아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면서 이럴 수 있나, 정직한 씨앗과 정직한 눈물을 흘려 정직한 결과를 만들었는데 왜 떨어졌나, 하나님은 공평하시지 않다, 이런 항의 기도를 하다가 유학생활을 관두겠다는 결심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짐을 부치고 오산리기도원으로 갔어요.”

하루 한 끼만 먹고 1주일간 기도굴에서 울면서 기도하고 집회에도 참석했다.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성령충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뭘 일하신다는 거야’ 이런 생각만 드는 거예요. 1주일 정도 지났을 때 힘이 풀어지면서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세요. 저는 아무 의욕이 없어요’라고 기도하는데 ‘네가 행복하길 원한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또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니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때 가슴이 찡했죠.”

집에 돌아와서 자신이 뭘 해야 행복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아빠 엄마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어릴 때부터 만들고 꾸미는 걸 좋아했다는 게 떠올랐어요. 카드도 다 만들어서 보내고 놀러갈 때 친구들 꾸며주고, 친구가 좋아하면 행복하고 그랬어요. 그때 패션디자이너는 자신이 창작한 옷으로 남을 아름답게 해주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길이 맞으면 순조롭게 열어달라고 기도했어요.”

짧은 기간에 준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배출한 파슨스디자인스쿨에 합격했다.
“제일 좋은 데로 가고 싶으니 무조건 넣어달라고 막무가내로 기도해서 한 번 만에 합격했어요. 디자인을 공부하니 제 안의 보석을 찾는 느낌이에요.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고 자존감도 회복됐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하고, 조금 못해도 이것 밖에 안 돼? 이런 생각이 안 들어서 행복해요.”

고교 때 바이블 스터디 그룹 이끌어

이성혜 씨는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말씀을 암송한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아빠가 ‘미국에 혼자 떨어져 있으면 외운 말씀이 힘이 될 거다, 네 발의 등이 될 거다’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스펀지처럼 말씀을 빨아들였고 조금 컸을 때는 아빠가 ‘그 말씀을 읽고 느낀 게 뭐냐’고 물으시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게 하셨는데 그런 훈련이 큰 힘이 된 거죠.”

고등학교 때 바이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이끌면서 성경을 세 번 통독했다.
“제가 다닌 학교의 교사들 중에 레즈비언과 게이가 많았어요. 멀쩡한 한국 애들이 유학 와서 방황하다가 동성연애자가 되는 일도 있었어요. 애들을 바르게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에 학교에는 북리딩그룹으로 신청해놓고 한국 친구 8명과 말씀 공부를 시작했어요. 스터디 그룹을 끌고 가기 위해 성경을 많이 읽었죠.”
이성혜 씨는 힘들 때도 결코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고 기도에 매달린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했다.
“위로받을 데가 하나님 밖에 없었어요. 말씀을 외우면 기도할 때 좋아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기도하면 들어주실 수밖에 없잖아요.”

패션디자인 공부를 하면서 마음이 회복되자 부모님이 권하는 미인대회에 비로소 출전할 자신이 생겼다고 한다.

“파슨스 들어가서 건강해진 모습을 보고 엄마도 때가 됐다고 생각하셨는지 대회에 나가라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안 받아 들였는데 차츰 ‘하나님이 제 삶의 주인이시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면 하겠다’는 기도를 드리게 됐어요. 그때 창세기로 큐티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말씀도 순종에 관한 것이었고 목사님도 그 즈음에 순종에 관한 설교를 하셨어요. 기도하는 가운데 결심하고 출전하게 됐죠.”

패션과도 연관이 있고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 같아 지금은 미스코리아 출전에 만족하고 감사한다고 전한다. 당장 가을부터 시작되는 여수세계박람회 홍보대사 역할에 그녀의 관심이 쏠려 있다.

매일 큐티하면서 말씀으로 산다

“여수세계박람회에 참석하는 G20 정상들의 의전을 제가 맡게 됐어요.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내년에 미스 유니버스대회에 나가는데 각 나라 대표를 만나는 일이 대회에 도움이 될 거라고 봐요. 현재 하는 여러 가지 활동이 다 미스 유니버스를 위한 준비나 마찬가지죠.”

미스코리아 1년 임기 중 영어에 능통한 이성혜 씨에게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아직 내년에 열릴 미스 유니버스대회의 개최국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성혜 씨가 국제대회에 나가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중보기도하는 부대가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에게 무료로 치료해주고 영양주사를 놓아주세요. 미안해하시면 가장 강력한 무기인 기도를 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전 세계에 흩어져 계신 선교사님들과 목사님들 500분이 미스코리아 대회 기간에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어요.”

이선일 장로가 1년의 반을 국내외 청년집회를 다니느라 자리를 비울 때면 부원장이 병원을 운영한다. 이성혜 씨는 “아빠가 선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진료하면 신기하게도 병원 재정이 다 채워진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의사이니 경제적으로 풍족했을 것 같다고 하자 손사래를 쳤다.

“어렸을 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아빠가 청년들 선교에 너무 열정적이셨어요. 갖고 싶은 크레파스를 사달라고 하면 어떤 언니들 학교 보내야 한다며 안사주시는 거예요. 어릴 때 ‘나는 아빠 딸 아닌가?’ 그런 고민도 했어요. 그때는 아빠를 뺏긴 느낌에 엄청 서러웠는데 아빠가 뿌린 씨앗을 저와 동생들이 지금 고스란히 받고 있어요.”

170cm에 52kg인 이성혜 씨는 어릴 때 미국에 갔으면서도 패스트푸드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너무 스케줄이 바빠 운동을 못하지만 평소 하루에 2시간씩 운동을 한다. 그녀는 매일 아침 8시에 방송하는 ‘김성주의 모닝 카페’ 진행을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난다. 

“4시면 도착해요. 제가 부족하니 일찍 와서 준비하는 거예요. 방송은 생각하지 않은 일인데 미스코리아가 되면서 여러 가능성이 생겼어요. 어떤 가능성이든 닫아둘 생각은 없어요. 패션디자인은 경험한 만큼 작품이 나오니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라고 봐요. 저를 충분히 상품화해 가치를 올리고 브랜드화 하고 싶어요.”

매일 새벽 빠짐없이 큐티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하루 15분에서 30분 정도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갖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그 정도 시간을 못 뺀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주말에는 요청하는 교회에 가서 간증집회를 한다.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어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한정된 인생, 단 한번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시간이 가장 소중해요. 이 시간 동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일, 감사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비전을 갖고 하나님 나라 회복하는 데 자신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현재 파슨스디자인스쿨을 2학년 1학기까지 마친 상태이다. 복학해서 공부를 마치면 패션과 연관 있는 일을 할 것 같다고 전한다.

“패션을 통해 누군가를 아름답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존감까지 치유해주면서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존귀하게 지으셨는지 알려주고 싶어요. 자존감을 회복한 아이들을 다음세대를 키우는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만드는 것과 전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일에 헌신하고 싶어요.”
글 /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 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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