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고문사건과 김상철 변호사
김근태 고문사건과 김상철 변호사
  • 미래한국
  • 승인 2012.01.20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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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 그때 그사건

지난해 말 사망한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이 1985년 구금과 고문을 당할 당시 그를 변호해 국가를 상대로 한 법정소송에서 승소한 이가 김상철 변호사(본지 발행인)이었다. 김 변호사는 당시 법적 전례가 없던 고문흔적에 대한 신체증거보전신청을 적용해 승소했고 이 때문에 이듬해인 1986년 국세청 조사국 100여명이 투입된 철저한 보복 세무조사를 당하기도 했다. 한편 김근태 씨는 1989년 민주화 이후 북한인권운동에 헌신하게 된 김상철 변호사를 북한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김씨정권이 뭔지...김상철 변호사의 간증집 <7일간의 서울시장>(1993년 刊)에 기록된 관련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편집자주)  

1985년 9월 26일 오전 김근태 씨의 부인이 사무실로 찾아와 “남편이 오늘 남영동에서 검찰로 송치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남편을 어떻게 만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전 의장 김근태 씨와 나는 대학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처지이므로 그가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자 그 부인이 나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였었다.

나는 그 부인에게 대개 오후 1시 넘어 송치를 하니 그 시간에 검찰청 5층에서 기다려 보라고 이야기하고, 나도 오후 재판을 마치는 대로 담당검사실로 가겠다고 했다. 내가 오후 2시 20분경 검찰청 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니, 그 부인이 나를 보더니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하기를 “남편이 남영동에서 엄청나게 고문을 당했다고 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담당검사실로 들어갔다. 입회계장이 무슨 일로 왔느냐고 하면서 앞을 막아서는데, 검사석 옆 소파에 검사와 김근태 씨가 마주 앉아 있었다. 나는 그 계장에게 “변호사입니다”하며 밀치듯 들어갔다. 담당검사가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는 나와 고시동기생으로 대학은 선배가 된다. 나는 검사 앞자리로 앉았고 김근태 씨는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며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담당검사실에서 고문 증언을 듣다

검사는 나에게 조사 중에 마구 검사실로 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나는 변호인 접견권이 검사실이라고 해서 금지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막바로 김근태 씨에게 “고문을 몹시 당했다는 이야기를 부인으로부터 들었다. 그 내용을 좀 이야기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언제 무슨 고문을 어떻게 당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기적거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걷기가 어렵고 발뒤꿈치에 상처도 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양말을 벗는데 그의 발을 잡고 본 즉, 그 양 발뒤꿈치에 지름 1㎝가 좀 넘는 원형의 불그레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그 상처가 양발이 묶인 채 고문을 당할 때 생긴 것이라고 했다.

담당검사는 고뇌어린 표정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그만하면 됐소. 검사실이 접견하는 곳은 아니니 이제 그만 하시지요.” 나는 검사에게 “곧 나가겠습니다. 나가기 전에 변호인으로서 할 도리나 좀 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하고 김근태 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주었다.

“검사 앞에서 진술할 때 조심하십시오. 어떤 경우라도 사실 아닌 것을 자포자기하듯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진술 자체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진술거부권을 피의자의 권리로 인정합니다. 진술거부권은 또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말을 안해도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검사는 나에게 “정말 이러기 있소?”라고 했고, 나는 “저는 지금 진술거부권을 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고 했다. 나는 그 소파에 놓여 있던 법전을 펴서 김근태 씨에게 관련 조문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앞으로 변호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강구하겠다고 말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나를 배웅하려고 했다.

내가 검찰청 로비로 내려오니 김근태 씨 부인과 또 한 여인인 이을호 씨 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검사실에서 접견한 이야기를 전해 주고 함께 내 사무실로 와서 대처방안을 논의하였다. 우리는 최소한 더 이상의 고문을 막기 위해서도 이 고문사건을 즉시 폭로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 그 날이 종로5가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목요일마다 열리는 인권을 위한 기도회 날이므로 두 부인들은 그 날 저녁 그 기도회에서 자기들이 보고 들은 내용을 폭로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처참한 고문사건을 직접 확인하고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저 고문사실의 증거도 확보하며, 최소한 더 이상의 고문만은 방지되는 모슨 법적인 방도는 없을까’하고 생각을 거듭했다. 그때 김근태 씨의 신체상태를 증거보전의 방법으로 법원으로 하여금 검증토록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음 날은 분주한 일정 때문에 실제로 어떤 조치를 취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또 ‘고문흔적에 대한 증거보전신청을 한다면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나를 원수로 여길텐데, 그들의 보복을 내가 어떻게 감당하는가’하는 걱정도 되었다. 그 날 밤도 잠을 못 이루었다. 나는 아내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번민은 계속되었다. 이런 법적 대응은 전례도 없고 누구 알 사람도 없으니 내가 증거보전신청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 해서 누가 힐난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문 흔적에 대한 증거보전신청을 낸다면 그 무서운 대공분실이 나를 가만 두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에게 증거보전이라는 법적 대응책이 생각나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미 알고 있는 내가 가만히 있는다면 나 자신을 속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어떻든 내 양심을 속이지는 말자. 그래, 증거보전신청을 하자.’

잠 못 이룬 밤과 보복 각오
 
다음 날인 월요일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나는 같은 건물에 있는 고 황인철(黃仁喆) 변호사에게 김근태 씨의 고문흔적 증거보전신청 구상을 이야기 하였다. 황 변호사는 이돈명(李敦明) 변호사 등 몇 분과 상의를 좀 해 보겠다고 했다. 수일 후 그 두 분과 조준희(趙準熙), 홍성우(洪性字) 변호사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의 변호사와 야당 국회의원인 목요상(睦堯相), 장기욱(張基旭), 신기하(辛基夏) 변호사 등 8인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하였다.

아직 수사단계에 있는데 대공수사기관의 고문을 폭로할 뿐 아니라 그 증거를 확보하는 법적 대응책을 취한다는 것은 사상 최초의 일로서 용기도 필요할 뿐 아니라 보복 당할 각오까지 해야 했다.

한편 김근태 씨는 내가 검사실에서 일러준 대로 철저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 완전한 묵비권 행사 역시 사상 최초의 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검찰은 피의자의 묵비권 행사를 이유로 구속기간을 연장하였는데 그 후 법원에서 서면으로 통지해 오기를 증거보전신청을 각하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비록 경찰에서 고문을 당했다 하더라도 경찰조서는 고문여부에 상관없이 그 내용을 부인하면 증거능력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고, 검찰조사에서는 피의자가 현재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불리한 자백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고문 흔적의 증거보전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나 김근태 씨가 검찰송치 이후에는 고문당하지 않은 것만도 하나의 효과라고는 하겠다.

그 후 기소가 되어 첫 공판기일이 다가올 때 우리는 재판의 모두절차에서 김근태 씨가 그 고문당한 내용을 밝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필요한 법이론적 무장을 해두고 있었다. 형사소송법상 검사의 기소요지 진술 후 피고인의 ‘유리한 사실’의 진술이 보장되어 있는 것을 활용키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 12월 19일 서울형사지법 118호 법정에서 열린 제1차 공판기일에 김근태 씨는 그가 당한 고문피해에 대하여 상세한 진술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법정 안팎은 전경과 대공수사 요원이 가득했으나 그들 역시 이러한 고문폭로로 인해 양심의 갈등을 적지 않게 느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날의 피고인 모두진술은 이후 모든 시국사건에 통용되기 시작한 ‘피고인 모두진술권’의 선례가 되었다. 이는 법적인 절차에 따라 법정투쟁을 한다는 우리 변호인단의 원칙과 법관으로서의 양심과 공정성을 지키려고 노력을 많이 한 그 재판부의 현명한 태도의 합작품이라 하겠다.

나는 또한 담당검사가 어려운 입장에도 불구하고 검사실에서 김근태 씨를 접견토록 허용하고 이후 그의 묵비권 행사를 용납하여 더 이상의 강압수사를 억제케 한 사실을 늘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도 자기 직무의 수행에는 성실을 다하면서도 시종 고뇌어린 표정과 진지한 자세로 일관했고 피고인에 대한 인격적 처우에 있어서도 소홀함이 없었다.

국세청 조사국 전원이 동원된 세금조사

증거보전신청 등 김근태 씨 고문에 대한 법정투쟁을 전개한 이래 우리 집과 사무실은 수시로 전화가 도청되었다. 급기야 다음 해인 1986년에 나는 지독한 세무조사까지 당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지방국세청 조사국의 1개 반 8명이 투입되어 지난 3년간의 내 모든 수입과 지출을 정밀 실시하였는데, 듣기로는 보통 조사국 1개 반의 인력으로 대기업 1개 그룹의 조사를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1개월 동안 나와 우리 가족의 예금구좌를 조사하고 교환이 들어온 수표들을 추적하며 모든 사건의뢰인을 일일이 조사하는 등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그래도 이렇다 할 실적이 나오지 않자 당시 동원 가능한 조사국의 총 요원 1백여 명을 2, 3일간 투입하여 그때까지 확인치 못한 지난 3년간의 모든 사건의뢰인에 대하여 방문조사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몇 번이나 이사를 한 사람도 찾아내고 심지어 도피중인 사람까지 찾아가 나에게 수임료를 얼마 주었는지 조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별 실적이 나오지 않자 조사기간을 1개월 더 연장하여 모두 2개월간 조사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 추가 부과한 세금이 7백 몇 십만 원 된다.

그 후 그 고문경찰관에 대한 재정신청 사건과 형사사건 그리고 국회 국정감사에서 나는 송치 당일 검사실에서 김근태 씨를 접견하고 그의 신체상태와 발뒤꿈치 상처를 확인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서도 썼고 선서하고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사건에서 우리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또한 우리가 소송대리인으로 제기했던 국가 상대의 고문피해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 사건도 승소하게 되었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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