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0세대가 짚어봐야 할 보수와 진보
2040세대가 짚어봐야 할 보수와 진보
  • 미래한국
  • 승인 2012.02.0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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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신드롬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을 해부하기 전에 안철수 신드롬을 낳은, 혹은 안철수 신드롬에 가장 많이 휩쓸려 있는 2040세대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보수와 진보다.

여러 사회 조사에서 들어나듯, 2040세대는 무이념, 무당파다. 물론 ‘나는 아니오’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이런 무이념 무당파의 젊은이들에게 보수 진보를 새삼스레 들먹일 필요가 무엇이냐고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진보는 무이념 무당파에 관계없이 언제나 논의되는 이념이고 정책이다. 이는 고대, 중세에도 그러했고, 근 현대는 더 이를 것도 없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세워 나가는 한 보수·진보의 틀과 보수·진보의 사고는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보수는 무엇이고 진보는 무엇인가. 이 둘을 최고로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보수는 ‘좋은 것’을 ‘지키겠다’는 것이고, 진보는 ‘나쁜 것’을 ‘고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수’하면 으레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한다. 무얼 지키려고 하는가는 묻지 않는다. 보수에 대해서 거의 습관적으로 그렇게 낙인하고 있다. 또 진보라고 하면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한다. 역시 무엇을 고치려고 하는가는 묻지 않는다. 보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거의 습관적으로 그렇게 낙인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좋은 것을 지키려고 하지, 나쁜 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본능적으로 나쁜 것을 고치려고 하지, 좋은 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왜 보수 진보가 서로 다투고, 지지자와 반대자가 서로 엇갈려 싸우는가. 좋은 것 지키려고 하지 않는 사람 없고, 나쁜 것 고치려고 하지 않는 사람 없다면, 편을 나눠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죽기 살기로 당을 가르고 파를 만들어 무리지어 싸운다.

그렇게 싸우는 것도 따져보면 너무 당연하다. ‘좋은 것’은 자기에게 ‘이익 되는 것’이고, ‘나쁜 것’은 자기에게 ‘손해 되는 것’이다. 자기에게 이익 되는 것,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자기에게 ‘손해 되는 것’, 그것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그 이익은 물질적 이득일 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이득이다. 그 손해 또한 물질적 손상일 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손상이다. ‘좋은 것’ ‘나쁜 것’이 구극적(究極的)으로는 이같이 이익과 손해로 갈라지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익 지키기 위해,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쉼 없이 싸운다.

그런데 이 싸움에는 보수가 언제나 불리하고 진보가 언제나 유리하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익 봤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적고, ‘손해 봤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의 주류는 수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는 보수파가 형성한다. 연극으로 말하면 주 무대는 보수파가 장악하고 진보파는 마치 막간극에 나오는 배우처럼 틈틈이 장악할 뿐이다. 왜 그러할까. 민주주의 국가는 수적으로 다수파가 국회의원도 많이 내고 정권도 잡는다. 그런데 왜 진보파가 역사의 주류가 되지 못할까.

그것은 단 하나, 메스돌로지(methology)- 방법론의 차이 때문이다. 보수파의 ‘지키겠다’는 주장이나 정책은 언제나 현실 지향적이다. 현실에 뜻을 두고 현실에 기반하기 때문에 그 방법은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실용적인 것을 찾는다. 반대로 진보파의 ‘고치겠다’는 주장이나 정책은 미래 지향적이다. 내일에 뜻을 두고 내일을 오늘보다 더 중시한다. 그래서 그 방법은 이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더 큰 차이는 개혁의 방법에서다. 개혁은 보수파든 진보파든 다 한다. 현상에 고착하면 어느 파든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개혁은 필수다. 그런데 보수파는 개혁을 해도 그 개혁의 과정은 지극히 점진적이다. ‘점진적’이라는 말은 영어로 그래듀얼(gradual) - 서서히 한다는 말이다. 개혁을 하는데 올해 5% 정도 하고, 내년에 그 부작용을 보아가면서 10% 정도 바꾸는, 그 같은 느리고 느린 개혁이기 때문에 사실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비칠 뿐이다.

반대로 진보파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처럼 밑뿌리째 통째, 그것도 긴 시간이 아니라 단시간 내에 위에서 밑에까지 다 바꿔 버린다는 사고와 정책을 쓴다. 소위 말하는 급진적 개혁이다. 너무 화끈하게, 마치 혁명하는 것처럼 바꾸려고 하기 때문에 진보파는 종종 급진파 내지 과격파로 인식된다.

진보파의 실패는 이런 급격성(suddenness)과 이런 과격성(radicalness)에서 온다. 급격성과 과격성을 띤 개혁은 열 중 열, 잘해도 열 중 아홉은 실패한다. 실패해 버리는 결정적 이유는 인간이 만든 구조(structure)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자기를 철저히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갑자기 바꾸는 것을 이 인간의 구조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파의 이상(理想)은 바람직하지만 실용적이 못되고, 진보파의 미래지향은 좋지만 현실구조와 멀어져 있어, 무대를 장악해도 주류에서 곧장 밀려나 조연으로 추락하고 만다.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진보파는 지식은 있는데 지혜가 없고, 도전하는 힘은 센데 경륜이 없다고 말해 왔다. 반면 보수파는 빛나는 지식은 없어도 지혜가 있고, 도전하는 힘은 약해도 깊게 쌓은 경험과 경륜이 있다고 말한다. 얼굴에 비유하면 보수파는 점잖기는 한데 매력이 없고, 진보파는 참신하기는 한데 경망해 보인다. 전자가 재둔유덕(才鈍有德)이라면 후자는 재승박덕(才勝薄德)이다. 하나는 둔하기는 하지만 덕이 있어 보이고, 다른 하나는 재주는 있는데 덕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최근 한나라당 비대위에서 한나라당 정강에 들어 있는 보수라는 말을 빼자는 논의로 당내가 뜨겁게 달았다. 정강에 보수라는 말을 넣은 것도 미숙하지만, 넣어놓은 것을 구태여 없애자는 것도 ‘보수’답지 못한 것이다. 한번 ‘보수’라는 말을 넣었다면 그냥 보수하는 것이 보수다. 보수는 정책으로 행태로 표현하는 것이지 말로 장난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진보는 그 같은 논의 그 같은 언행에서 훨씬 자유롭다. 진보는 영원한 실험이고, 실험정신이다. 그래서 이상을 높이고 꿈을 키우고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행동보다 말이 더 중요하다. 말이 언제나 행동을 앞서 가기 때문이다. 그 말이, 그 선언이 행동이 되고 정책이 되고 제도가 되면 그 순간 진보는 보수가 된다. 그리고 다른 진보가 나온다.

유럽에서 처음 진보였던 자유민주주의가 보수가 되고, 구 소련이나 현 중국에서 진보였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보수가 돼 버리듯이, 진보와 보수는 어느 순간 바뀐다. 그 경계는 상황에 따라 이동한다. 무너지고 다시 만들어지고, 그리고 또 무너지고 또 다시 만들어진다. 그것이 우리가 해 온 역사다.
출처/뉴스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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