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위로 달리며 선교에 매진하는 화가 목사
전방위로 달리며 선교에 매진하는 화가 목사
  • 미래한국
  • 승인 2012.02.29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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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목회열전]대석교회 정재규 목사

 
목사, 교수, 화가, 시인, 미술평론. 한 가지 활동만 하기도 쉽지 않은 분야들이다. 다양한 전문분야를 누비면서 선교활동과 시민운동, 교단활동, 연합사업을 동시에 펼치는 전방위 목회자를 만났다. 서울 금천구에 위치한 대석교회 담임인 정재규 목사가 주인공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네이버 검색창에 이름을 쳤을 때 인물정보가 떠야 유명인으로 인정하는데 ‘정재규’를 검색하자 바로 사진과 함께 신상명세가 나왔다. ‘목사·미술평론가’라는 소개와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상임총무, 한국기독교문화예술총연합회 담임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대학원장, 할렐루야태권도단 단장이라는 경력이 주르르 올라왔다.

정 목사는 68세의 나이에도 활력이 넘치고, 말이 빨랐다. 건강 비결을 묻자 “하나님의 은혜”라는 목회자들의 단골 답변이 돌아왔다. 여의도 월드비전 건물 6층에 위치한 한국기독교문화예술총연합회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벽에 걸린 정 목사의 제주 성산포 그림이 보였다. 정 목사는 매년 자신의 그림을 넣어 만든 달력을 교인들에게 배부한다.  

그는 서라벌예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8년간 미술교사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3회에 걸친 개인전시회와 다양한 회원전을 개최했으며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미술평론은 기독교인들의 작품을 제대로 해석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된 겁니다. 기독교인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평론가들이 ‘주술이 들어 있다’는 식의 샤마니즘적 평가를 내리는 걸 보니 안 되겠다 싶더군요. 크리스천 아닌 화가들의 그림에 관한 평론도 많이 썼습니다.”
5년 전에는 시인으로도 등단해 시집 출간의 숙제를 안고 있다.

대학 떨어지고 낙심 중에 신앙 입문

다재다능한 그가 예수를 영접한 것은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서울대 미대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후 낙심하고 있을 때 친구가 보내준 성경책을 읽은 게 계기가 됐다. 초창기에 뜨거운 믿음생활을 하면서 목사가 되겠다는 서원까지 했다. 하지만 대학 다닐 때 몇몇 목사들의 삶에 실망을 하고 목표를 교수로 바꿨다. 평택여고를 거쳐 한영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대학 교수의 꿈을 꾸고 있던 중, 집안에 도둑이 들어 귀금속을 비롯해 값나가는 물건을 몽땅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 갑자기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일이 떠올랐어요. 교수가 되는 길도 막히고 도둑도 맞고 하니까 목사가 되라는 뜻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바로 신학교에 진학했죠.”
나중에 호헌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대학원대학교 학생들을 오랫동안 가르쳤다.

정 목사는 1976년 시흥4동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사준 집을 팔아 123평의 대지를 마련한 뒤 그 위에 천막을 쳤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천막이 축 처졌는데, 무거워서 물을 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냥 그 아래에서 새벽예배 드렸던 일이 생각나네요. 천막교회 때부터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초창기에 정신여고 교사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쳤는데 그들이 모두 십일조헌금을 해준 덕분입니다.”

2년 후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목회 현장에 뛰어들었다.

“땅을 팔아 집을 사고 그 건물 지하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철공소를 운영하신 아버지가 철판으로 만들어 주신 세계지도를 걸어놓고 초창부터 선교 의지를 다졌습니다. 다시 그 집을 팔아 현재의 예배당을 마련해 지금까지 목회하고 있습니다.”

대석교회는 매주일 700여명이 출석한다. 1999년에 한 차례 리모델링을 하면서 한 층 더 올려 4층으로 증축을 했다.

“한때 교회 뒤에 있는 집을 매입해 교회를 더 크게 확장하려다가 그만 뒀습니다. 우리 교회를 건물을 크게 짓기보다 해외에 교회를 짓자는 생각 때문이었죠.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우리 교회가 열과 성을 다해 실천하는 일이 선교입니다. 우리 교회 헌금의 50%를 선교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초창기부터 전 교인이 선교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고, 35년 동안 변함없이 실천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지요.”

지금까지 대석교회가 해외에 건축한 교회는 멕시코 2곳, 필리핀 1곳, 베트남 2곳, 모스크바 1곳, 몽골 1곳, 중국 1곳이다. 20년 전 필리핀에 파송한 선교사는 대학생선교회를 부흥시켜 큰 열매를 맺었고, 몽골에 파송한 선교사는 탈북자 돌보는 사역을 하고 있다.

정 목사는 “대석교회 성도들은 한 가정에서 선교사 한 명씩 파송한다는 각오로 신앙생활 한다”고 전했다. 현재 대석교회가 파송한 해외 선교사는 34명이고 선교사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대석교회가 후원해 해외에서 뿌리내린 선교사들도 많아, 그간 지원한 숫자는 일일이 셀 수가 없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에 190개의 교회와 13개 선교병원을 건축한 장요나 선교사와도 15년 전부터 교류하면서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 초청한 게 인연이 돼 후원하게 됐죠. 당시 현지 신학생 한 명을 돕는 데 5만 원이었는데 10명을 담당했죠. 지금은 많이 올랐어요. 제가 국제사랑의선교회를 맡으면서 선교회 차원에서 돕고 있습니다. 대석교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베트남에 충희유대석교회를 건축한 데 이어 베너쎄대석교회도 봉헌했습니다.”

정 목사의 동생 정재선 목사도 미국 네바다주에서 선교를 하고 있으며 딸 유미 씨는 평신도 선교사로 베트남에서 17년째 선교하고 있다. 정재선 선교사는 로마왕립미술학교 출신 조각가이고 정유미 선교사는 옻칠을 배워 선교에 활용하는 등 가족들이 미술에 재능이 있는 것도 닮았다.

다양한 시민운동 펼쳐

 
정 목사는 국제사랑의선교회 회장과 할렐루야태권도단 단장 등 다양한 선교단체에 관여하고 있다. 할렐루야태권도단은 모스크바에서 ‘할렐루야컵 국제태권도대회’를 11회 개최했다. 인근 국가에서 다 참석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최근에는 모스크바와 유럽에서 번갈아가며 열린다.

“2010년에 크로아티아에서 태권도대회를 열었습니다. 5대 도시의 시장이 참석하고 우리나라 대사도 참석했습니다. 모스크바에 있는 선교사의 제자가 2,500명이나 될 정도로 태권도를 통한 선교가 잘 되고 있습니다.”

태권도 승단심사 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고 요한복음을 써와야 한다. 아직 글자를 배우지 않은 아이들은 엄마가 대신 성경 말씀을 써온다. 그 과정에서 예수를 영접한 부모들도 있다고 한다. 2010년에 정 목사는 할렐루야태권도단 선교 후원을 위한 전시회를 열어 2500만원을 마련했다.

“태권도시범단이 방문하려면 경비가 많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풍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작품으로 드러내는 일에 감사드립니다.”

정 목사는 세계체육인선교회, 세계스포츠선교회, 할렐루야축구단 활동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또한 기독교시민운동협의회, 한국교회언론회, 자유대한민국지키기운동본부(자국본) 등의 수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기독교시민운동협의회는 2002년 월드컵 때부터 ‘친절 질서 청결’을 모토로 내걸고 ‘동네를 청소하기, 물 절약과 쓰레기 버리지 말기’ 등 생활 실천운동을 펼치고 있다. 3월 24일에는 3월 26, 27일 양일간 열리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성공 개최를 위한 기도회를 연다.

한국교회언론회에서는 중앙일간지와 공중파 방송의 기독교 관련 보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과를 요청하는 등 10여년에 걸친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부 지원이 타종교에 몰리고 기독교를 홀대하는 것에 항의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

자국본은 기독교 안티들을 배척하고 국민들을 깨우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요즘 ‘악플은 마음이 아파요’ 라는 스티커를 제작해 나눠주는 중이다. 2003년에는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기지협) 실무진으로 일하면서 시청 앞에서 열린 반핵반김 데모를 주도했다.

“2003년 3월 1일에는 미래한국의 김상철 회장님이 주도하고, 6월 21일에는 기지협이 주도를 했는데, 각각의 대회를 할 때 서로 도왔죠. 당시 서울시청에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붉은악마의 붉은색 티셔츠를 흰색으로 바꾸자는 의미에서 집회에 흰옷을 입고 오라고 홍보해 광장이 흰색으로 물드는 장관이 이뤄졌죠.”

기지협은 지난 1월 31일 서울 광화문 코리아나호텔에서 ‘서울시 학생인권 조례안 폐기를 위한 특별기도회’를 열었다. 교계 지도자 250명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폐기되지 않을 경우 기독교단체 및 시민단체와 연합해 반대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민간외교, 선교 방송광고 활동

2005년에 김상철 미래한국 회장, 김동권 목사, 신신묵 목사와 함께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된 일을 비롯해 국가를 위해 미국에서 비공식적으로 펼친 활약상을 들려주던 정 목사는 1983년에 TV를 통해 전도광고 한 일을 소개했다. 여의도광장 부활절연합예배 홍보분과위원을 맡아 각 방송사를 방문했던 그는 방송을 통해 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방송광고공사를 찾아갔다.

“종교 광고도 방송할 수 있는지 문의했는데 마침 광고공사 대표가 기독교인이었어요. 광고를 만들어오라는 겁니다. 광고를 만들려고 MBC를 찾아갔더니 제작진 가운데 제 제자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무비카메라로 광고를 만들어줬어요. 녹음은 우리 교회 다니는 성우와 제가 한마디씩 번갈아서 했는데 ‘주예수를 믿으세요.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 집이 구원을 얻습니다’라는 내용이었어요. 30초 짜리 광고가 통과돼 1983년 4월부터 6월까지 석 달 동안 아침 6시 59분에 나갔어요. 한 달에 4번 내보내는데 400만원이었어요. 석 달 동안 TV를 통해 복음의 씨를 뿌렸죠.”

정 목사는 특별히 보람 있는 일로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 공모전을 19회 동안 계속 해온 것을 꼽았다.
“한국기독교문화예술총연합회 내에 10개 단체가 있는데 미술선교회의 활동이 가장 활발해요. 20여 년 전에 결성했는데 어려울 때 공모전을 거르자는 의견들이 있었어요. 그러다 영영 못하게 될까봐 힘들어도 계속 끌고 온 걸 회원들이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정재규 목사는 다양한 일 가운데 목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강조했다.
“특별한 건 없어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관심입니다. 저는 한 해에 두 번, 봄 가을로 전교인의 집을 심방합니다. 목자가 교인들 숟가락을 헤아리지 못하면 안 되죠. 양의 형편을 알아야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각 가정의 아이들 이름까지 다 외웁니다.”

매일 새벽 5시, 새벽강단에 서는 것도 35년간 계속하고 있다.
“새벽예배는 부교역자를 안 세웁니다. 우리 교회는 토요일과 주일에도 새벽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교인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기드온 300용사 같은 일꾼이 되라고 강조합니다.”

정 목사는 교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선교에 나서는 것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3월 10일에 베트남 교회 준공예배를 드리고 20일에 귀국, 바로 봄 심방을 하기 위해 스케줄을 짜는 중이라고 한다. 전방위로 달리는 정재규 목사에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잘하는 비결을 묻자 “비결은 없어요. 그래도 여유가 있어요. 바쁘지 않아요”라며 느긋해 했다. (미래한국)
글 /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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