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길자 경인여대 명예총장
[인터뷰] 김길자 경인여대 명예총장
  • 미래한국
  • 승인 2012.05.0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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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환란 이기고 3년 만에 눈부신 발전 이룩한 경인여대

인천 유일의 여자대학인 경인여자대학교가 개교 20주년을 맞았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학도 있지만 경인여대의 20주년은 특별히 의미가 깊다. 전액 출연해 설립한 대학을 잘 가꿔나가던 중 외부 불순세력에게 빼앗겼다가 7년 만에 되찾아 3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1992년 3월 ‘정의, 사랑, 진리, 창조’의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설립한 경인여대는 6개 계열 31개 학과에 4400여명이 재학 중이다. 졸업생이 2만6000여명에 달한다. 요즘 학생 숫자가 줄어 지원자를 다 못 채우는 대학이 늘고 있다는데 경인여대의 평균 경쟁률은 15대 1이 넘는다.

경인여대는 지난 1월 교육성과와 교육환경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인천?부천권 대학에서 유일하게 ‘전문대학 기관 평가인증’을 획득했다. 3년 연속 ‘교과부 전문대학 교육역량 우수대학’ 선정, 2년 연속 ‘전문대학 대표 브랜드 사업’ 최우수 A등급 선정, 한국대학신문 ‘교육 콘텐츠 우수대학’ 선정 등 성과가 이어지고 있다.

 
설립자인 김길자 명예총장에게 20주년 소감을 묻자 “20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순수한 열정과 도전정신, 모험심과 실천력이 강한 희망적인 나이”라며 감개무량해 했다. 화려하게 부활한 경인여대의 중심에 올해 72세인 김길자 명예총장이 있다.

경인여대는 1988년부터 태동했다. 김길자 명예총장은 당시 태양철관공업과 백일산업 대표였던 경인여대 백창기 현 이사장과 재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진지하게 의논했다. 세 자녀에게 아파트 한 채씩을 준 뒤 “더 이상의 유산 상속은 없다”고 못 박은 부부는 육영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그녀는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평탄한 삶을 살았다.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석유난로도 제대로 없었어요. 남편이 일본에서 중고 석유난로, 중고 오토바이 같은 걸 수입해서 팔았는데 일본 쪽에서 송이버섯, 오징어 같은 걸 수출해달라는 거예요. 수입품과 수출품이 다 잘 팔리니 사업이 땅 짚고 헤엄치기였죠. 점차 우리나라가 발전하면서 오징어를 우리가 먹게 되고 신상품을 사게 되면서 1970년에 철관공장을 세웠는데 그 사업도 잘됐어요.”

1972년에 160평 대지에 건평 130평짜리 멋진 양옥을 짓고, 1973년부터 자가용을 타고 다녔다. 한 번도 실패 없이 사업이 잘 된 비결을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유동자산 투자를 잘 했어요. 사업과 주식, 부동산에 적절히 배분해서 투자를 했는데, 부동산이 효자노릇을 했지요. 하나님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주신 것은 나눠 쓰라는 뜻입니다. 그 돈을 다 쓰려면 방탕해지죠. 우리는 청지기들이잖아요.”
 
40대에 새 인생 시작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던 그녀는 41세 때 새 삶의 기지개를 폈다.

“1981년에 친구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교회에 영어로 공부하는 통신신학 코스가 있었어요. 재미 있어서 2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 교회가 너무 복잡해 집에서 가까운 새문안교회로 옮기게 되었어요.”

새문안교회로 옮긴 후 바로 챔버오케스트라와 함께 유럽 한인교회를 돌며 공연을 했다.

“그때 총무를 맡아서 유럽일주를 했는데 다녀오니 사명감이 생기면서 신학공부를 계속 하고 싶더군요. 1983년에 대신대학에 들어가서 장학금도 받았지요.”

원래 전북 익산에서 서울 숙명여고로 유학을 올 정도로 공부도 잘하고 학구열도 높았던 그녀는 내친 김에 연세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을 설립하려고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에요. 교회에 다니게 된 게 계기가 되었고, 1981년에 딸이 예비고사 전국 수석을 해 집안에서 제 주가가 올라간 것도 영향이 있었죠. 남편도 만족시키고, 공부하고 싶은 욕구도 있고, 그런 게 계기가 되었어요. 좋은 집에 좋은 차 타고 아이들 좋은 학교 가고, 한마디로 할 일없는 유한마담으로 살기 딱 좋은 환경이었지만 자아실현 욕구가 늘 있었어요. 매일 신문을 읽고 영어와 일어를 독학으로 공부했어요. 그러다가 교회에 나가면서 세상과 이어진 거죠.”

학교 설립을 결정한 후 재산을 정리해 200억 원을 마련했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10억 원도 함께 출연했다.

“우리가 가진 돈이 가족이 나눠쓰기에는 좀 많고 더 큰일 하기에는 부족해서 하나님 영광 위해 뜻있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젊은 여성을 교육시키면 남편과 자녀가 바른 길로 가게 된다는 생각에서 여자대학 설립을 결정했죠.”

1990년에 법인 허가받은 뒤 2년 안에 교사 짓고 기자재 사고, 학생 모집에다 학사 준비까지 하느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2년 만에 학교를 완공하지 못하면 허가가 취소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1992년에 개교해서 1년 동안 아무 것도 살 게 없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했어요. 시스템화를 위해 미국에서 주전산기까지 들여왔을 정도니까요. 개교 이후 100억 원을 들여 체육관을 지었고, 올 2월 개교 20주년 기념관을 착공했습니다.”

학교가 순탄하게 발전하던 1998년 1월, 그녀는 명예총장으로 물러나려고 이사회 승인을 받았다. 후임 총장이 정해지면 영종도에 제2캠퍼스 건립하는 일에 전념할 계획이었다.

“원래 우리 학교 자리가 고등학교 부지였어요. 학생들이 자꾸 늘어나 제2캠퍼스를 지으려고 자금을 다 마련해놓은 상태였어요.”

좌파가 학교 점령

김대중 대통령 취임 이후 여러 사학이 비리 명목으로 도마에 오르더니 2000년 5월 경인여대로 불똥이 튀었다.

“좌파들이 20개 대학을 장악하려는 시나리오를 꾸몄어요. 상지대학이 넘어가면서 하나씩 뺏기 시작했죠. 여론을 등에 업고 치기가 가장 좋은 게 족벌인데, 우리 학교는 남편이 이사장, 부인이 총장, 아들이 기획실장이니 구성요건이 되잖아요. 아들은 자기 사업하면서 회계 감사를 한 것 뿐, 정식으로 근무한 것도 아니었어요.”

외부세력이 한총련 출신 교수와 손잡고 학생들을 부추겨 연일 학내 데모를 벌였다.

“불순세력이 재단에서 105억 원을 횡령했다고 고발하자 국세청 직원들이 조사를 시작했는데 횡령은 커녕 2캠퍼스 지을 돈이 쌓여 있었어요. 학생들이 ‘우리가 데모하면 출석체크해주고 학점도 주겠다고 시켰다’고 증언을 하면서 주동세력들이 바로 구속되었어요.”

하지만 재판은 노무현 정부 끝날 때까지 7년이나 질질 끌었다. 학교는 교육부에서 나온 관선이사들이 경영했다.

“처음에는 하늘이 노랬죠. 지금도 TV에서 뉴스 시그널 뮤직이 나오면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어요. 그때 하도 충격을 받아서. 남들한테 괴로운 얘기를 안했어요. 말하면 피차 망하니까.”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말씀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낮에는 교회와 집에다 계속 꽃을 심었다. 밤에는 시집을 분류해 출판사명, 출판일시, 저자명 등을 기입했다. 다른 생각할 틈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모은 시집이 1만권이나 된다. 그즈음 1972년에 지은 양옥집을 ‘뿌리의 집’으로 명명해 한국을 찾아오는 입양인들의 쉼터로 헌납했다. 목사 부부에게 관리를 맡겼는데 요즘도 해외 입양인들이 찾아오는 게스트하우스로 활용되고 있다.

“재판이 빨리 끝나지 않고 연장에 연장을 계속하면서 피를 말렸어요. 제풀에 나가 떨어지게 하려는 거였죠. 7년간 버틸 수 있었던 건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기 때문이에요. ‘쓰러지면 내가 인정하는 거다’ 그 생각을 하면서 버텼어요. 그때 표적이 된 대학 중에 아직도 해결 안 된 곳이 있어요. 대개 2세들이 경영하는 대학인데 우리는 설립 1세대인데도 걸었던 거죠. 지금도 사학의 자율성이 없어요. 외부세력이 이사회를 교란시켜 문제를 일으키면 바로 관선이사가 파견됩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전까지 오로지 학교일만 했을 뿐 사회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2003년에서야 그 모든 것이 좌파들의 준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러다가 학교를 빼앗은 세력들이 대한민국도 빼앗아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자들이 대한민국을 빼앗아 가면 학교를 찾을 수 없겠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거다’라는 생각에서 애국운동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죠. 미래한국 김상철 회장님도 만났고 미래한국 주주로도 가입했어요. 국민운동본부 서정갑 본부장, 조갑제 대표, 서경석 목사님도 만났죠. 우파운동에는 중심인물도 없고, 상징인물도 없었어요. 여성도 없어 제가 독보적이었죠. 대한민국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자고 하면서 그게 뭔지 내놓지는 않고 외치기만 하더군요. 그래서 ‘하나님, 애국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라고 기도했어요. 기도 중에 ‘대한민국 정체성과 정통성은 이승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파 운동으로 고난 이겨내

2005년부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탄신일, 돌아가신 날, 포럼 등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행사에 2년간 참석하면서 공부하니 확신이 딱 서더군요. ‘왜 대한민국이 혼란스럽고 좌파가 득세하는가, 대한민국의 뿌리를 확실히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이 난 겁니다. 2007년 8월 15일 건국일에 대한민국사랑회를 설립했습니다.”

대한민국사랑회는 건국절 제정운동, 건국대통령 동상 건립운동, 이승만 10만원권 운동, 우남 이승만 애국상 제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7년에 오래 끌던 재판이 끝났다.

“학교에 가보니 7년 전 모습 그대로였어요. 한마디로 영혼이 없었어요. 일례로 1997년에 100억 원을 들여 수영장 볼링장 인도어골프장을 갖춘 체육관을 지었는데 사회체육과가 가장 인기 없고 볼링선수, 수영선수 하나 없었어요. 교수도 학생도 학교에 애정이 없으니 지원율은 떨어지고, 총체적 문제였죠.”

설립자가 나타나자 위기의식 가운데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구성원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책임질 수 있는 구조로 학교 체제를 개편했다.

“학부로 묶어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이었던 걸 과로 다 쪼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어요. 전문대는 새로운 직업에 따라 새로운 학과가 계속 생겨요. 인기 없는 과는 바로 도태됩니다. 학생이 지원 안하는 과는 없애고 입학해서도 전과를 할 수 있게 했어요. 폐과되면 교수들도 나가야 하니 다들 정신을 바짝 차린 거죠.”

새롭게 도약하는 경인여대

구성원들이 똘똘 뭉쳐 경인여대는 3년 만에 가파른 성장을 했다.

“2009년부터 계속 교육부 지원금을 받았어요. 작년에 우리 대학이 교육인증대학이 되었어요. 전국 135개 전문대 중에 3개 대학만 받았어요. 그동안 4년제 대학에만 주다가 최초로 전문대로 확대했는데 우리가 첫해에 들어간 거죠. 학교 발전은 학생들이 먼저 알아요. 지원율이 큰 폭으로 오른 게 증거죠.”

7년간 힘든 일을 겪었지만 오히려 감사하다고 전한다.

“그 일을 통해 애국운동을 하게 되었잖아요. 대한민국 정체성을 위해 모기 같은 목소리라도 내게 하니 감사하지요. 좌파에 시달리다 병들면 지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는 세상을 이겨요.”

지난 3월, 김 명예총장은 중국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를 위해 11일간 단식을 했다. 경인여대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해 눈길을 끌었다. 탈북난민돕기 운동을 오래 전부터 해온 만큼 앞으로도 계속 참여할 생각이라고 한다. 그녀는 요즘 새로운 일에 관심을 쏟고 있다.

“명예총장이니 결재권 없이 자문만 하고 있어요. 학교 구성원들이 잘할 수 있도록 측면지원을 하는 거죠. 대한민국사랑회는 계속 열심히 해나갈 계획입니다. 요즘 수목장에 관심이 많아 수목장실천협의회 이사로 참여하고 있어요. 님비가 심해 수목장이 쉽지 않은 형편이라 안타깝죠.”

지난 4월 25일, 스무 살 된 경인여대는 2020 비전선포식을 갖고 ‘인간을 품고 세상을 움직이는 감동대학’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동안 변화가 많아 힘들었다는 김길자 명예총장은 “그럼에도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며 화사하게 웃었다.

글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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