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잊을 수 없는 6·25!
아, 잊을 수 없는 6·25!
  • 미래한국
  • 승인 2012.06.2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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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각 편집고문·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의 6월은 특히 현충일과 6·25동란을 우리 모두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달이다. 나는 6월이 오면 고 모윤숙 여사가 남긴 시(詩)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읽으며 민족의 상처와 6·25를 겪었던 나의 소년 시절을 되돌아보곤 한다.

(전략)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후략).
어찌 가슴 찡함 없이 동족간 싸움에서 전사한 젊은이의 모습을 추모하는 이 시를 읽을 수 있으며 그가 죽음으로 막아낸 북의 남침을 잊을 수 있으랴!

그 시는 살아서 6·25를 겪은 세대들에게 암울했던 전쟁 속의 삶과 죽음의 시절을 떠올려주고 있다. 동시에 숙명적으로 소속된 자기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 용사들을 향해 머리를 숙이게 한다.

금년은 북한이 구 소련제 탱크와 중화기로 무장해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 아직 잠들어 있던 남한에 전면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수많은 인명피해와 동족상잔, 그리고 적대감을 남기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남북간에 중단 없는 이념대립과 적대행위, 그리고 많은 역사왜곡의 씨앗들을 뿌린 지 어언 62년이 되는 해이다.

세월이 바뀌고 변해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남한 속의 전후세대들 중에는 6·25 동란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북침론’이나, 아니면 ‘민족해방전쟁론’을 들고 나와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들과 주장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거짓을 마구 생산하고 있는 무리들이 많아지고 있다.

1950년 6월 28일 나는 만 10세로 삼광초등학교 5학년 때 북한 인민군이 육중한 탱크부대를 앞세워 따발총을 메고 서울역 앞을 지나 한강철교 쪽으로 가는 행군대열환영을 위해 당시 담임교사의 인솔로 박수치기 위해 끌려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부서진 철조망너머로 용산 국군부대는 텅 비어 있었고, 황급히 후퇴한 국군 병영 막사 부근에는 미처 챙겨가지 못한 철모와 군수용품들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숨어 계셨고 가끔 밤이면 보안서원들이 후암동(삼판동) 우리 집에 수색나와 사용하던 미제담요며 식량 등을 몰수해갔다. 먹을 것이 부족해진 우리 식구들은 남산에서 비름나물과 누군가 수확 후 버린 고구마줄기 등을 가져와 먹으며 연명했다. 밤이면 숨겨둔 라디오를 통해 국군 방송을 청취하며 전황을 파악하려고도 했다.

7월 중순경 미군 B29 편대가 당시 용산중학교 옆 남산 비탈에 모여 있던 해방촌(해방 후 북한이주민촌)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많은 폭탄을 무수히 투하하는 것을 보았다. 그 폭탄풍에 날아온 이름 모를 사람의 팔 한 쪽을 우리 집 담벼락 밑에서 연탄집게로 주워 쓰레기통에 버린 기억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서울에서 경북 선산까지 피난

굶주림과 전란 위험을 견디다 못해 우리 가족은 8월 중순 서울을 떠나 조부모님이 계시던 고향 경북 선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전선은 낙동강 부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식구는 부모님, 나의 5세위 누나, 다섯살과 세살 된 여동생 둘, 그리고 그해 3월말에 출생한 남동생 모두 합해 7명이었다. 어머니가 인민보안서원에게 금반지를 주고 통행증을 받은 것으로 안다.

부모님은 손수레에 살림도구를 싣고 끌고 밀며 가시고, 당시 여고생이었던 누나가 4개월 된 남동생을 업고, 나는 3살 된 여동생을 업고 출발했다. 5세였던 여동생을 달래면서 걷게 하여 조각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이천, 충주, 문경, 상주를 거쳐 선산군 옥성면으로 가는 비포장 길을 매일 5, 60리씩 걷고 또 걸었다.

문경탄광에서 아버님 부상으로 우리는 10여일 지체한 후 아버지 대신 손수레를 끌 인부를 한 명 고용해 야음을 타서 사흘밤을 걸어 8월 말 조부모님이 계시던 선산 옥성에 도착했다. 그후 10여일 지나 국군이 반격해 우리 마을 앞 도로를 따라 북진하는 것을 목격했고, 그 와중에도 눈에 불꽃이 철철 튀는 국군 선봉대에 잡혀 세 명의 인민군 패잔병이 마을회관 마당에서 고문당하던 처참한 모습 또한 잊을 수 없는 나의 유년 시절 기억이다.

인민군으로 끌려나온 어린 병정이나 국군으로 싸운 사람 모두 조직과 이념의 희생물이라는 생각을 나는 지워버릴 수 없었다. 군인들은 그냥 전투 현장에서 입은 군복의 차이 때문에 피아간 싸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념의 확고한 고집스러움이나 깊은 뜻도 모른 채 상호 대결의 최전선에서 소속 조직의 소모품으로 희생당하면서도 나름대로 점차 전우들간의 끈적끈적한 유대감과 명백한 숙명으로 뭉쳐 적군에 대한 대항본능을 체득하며 싸우게 된다.

고착화된 상위 지도층의 사상과 이념적 대결로 인해 그들의 생각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돼 균형을 잃으면 정글의 법칙이 작동한다. 이념과 사상의 포로가 되는 과정은 타인에 의한 주입교육을 통한 세뇌일 수도 있고, 현실 상황에 대한 인식에서 개인이 자기 주관적 판단으로 기울어져가는 이른바 자아의식고착화일 수도 있다.

현재 우리 남한사회를 첨예하게 분열시키는 이념과 정책노선상의 좌우 대립문제는 만약 남북한 분단과 적대적 관계만 아니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북한당국이 오로지 공산주의 단일집단체제유지를 고수하는 데 반해 남한은 사상분열과 계층간 내부갈등이 가속화되고 있어 대북이념 대결게임에서 열세를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요즘 남한의 전후세대 중에는 부패한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로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선호하는 의식화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대칭적으로 북한에서도 자유시장경제를 누구나 자유롭게 선호하도록 하는 인권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남북한간 및 남한 내부에서의 사상과 색깔 논쟁은 더 이상 국가적 위험요소로 간주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분단 현실이 그렇지 못한 가운데, 내부 이념 대립과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는 남한사회의 취약성이 상대적으로 심각한 수위까지 이른 것이 문제이다.

사상의 자유, 헌법질서 내에서 허용돼야

자유민주사회에서 사람마다 다른 사상과 생각을 가질 수는 있지만, 국가헌법이 규정하는 제도와 법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생각은 교정돼야 한다. 남북간 대결 상황에서 북한을 옹호하며 일방적으로 남한의 자유민주시장경제체제를 뒤엎어 버리고 남북한 공산화를 기도하는 무리들은 막아야 한다.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든 혹은 남한 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든 우리 사회 혼란을 야기하려는 어떤 책동도 경계해야 한다. 6·25를 맞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달라”며 산화한 국군전사자들을 추모하며 우리 모두는 나라와 자유민주주의 바른 체제를 수호해야 한다. 우리가 어찌 6·25의 비극을 잊을 수 있으며 어찌 허위적 공산주의철학에 미혹당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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