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이라는 기적
한미동맹이라는 기적
  • 미래한국
  • 승인 2012.06.2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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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한미동맹은 결코 미국의 능동적 선택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한국은 미국에 그런 존재감이 없었다. 2차 대전 직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주된 관심은 일본을 어떻게 다시는 도전할 수 없도록 철저히 무력화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한반도는 적국 일본 영토의 일부로 점령 대상에 불과했으며, 소련의 38도선 이북 점령을 전후 처리 부담을 더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조차 있었다. 소련은 2차 대전 동맹국이었으며 1945년 당시 중국에는 장개석이 버티고 있어 한반도에서의 공산세력 억제는 아직은 주요 관심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미 영토 기준으로는 한 줌도 안 되는 크기의 한반도, 그 반쪽에 겨우 자리 잡은 신생국가였다. 반면 미국은 전승국에다 세계 최강국이었다. 이런 미국이 한국과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고래와 새우의 동맹만큼이나 난센스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아직은 아무런 전략적 가치가 없는 그저 부담에 불과했다. 한국을 방위선에서 제외한 애치슨라인이 전혀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6·25 발발 당시 한미 간에 군사적 동맹관계가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미군이 참전할 수 있게 한 법적 근거는 유엔결의였다.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기습남침 당일의 ‘북한군 철수 촉구’에 이어, 6월 27일 ‘북한의 무력 공격 격퇴와 필요한 지원의 한국 제공을 권고’하는 결의를 했다. 이에 따라 7월 1일 미 제 24사단의 선발 부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이어 7월 7일 유엔 안보리는 미군 통솔 하의 유엔군 통합사령부 설치를 결의했다. 이후 미군은 유엔군의 자격으로 싸우게 됐다.

그런데 개전 초, 미군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아직은 마련되지 않은 공백기의 그 며칠 사이에 서울은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만약 6·25 이전에 한국과 미국이 현재와 같은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한미동맹의 탄생

6·25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일단 끝이 났다. 애초 6월 18일 체결로 예정돼 있던 협정이 미뤄진 것은 휴전을 반대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6월 18일 당일 반공포로 석방 조치를 단행해 공산권이 다시 공세에 나선 때문이었다. 협정 체결의 성공이 시급했던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경제원조 약속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했다.

휴전협정 체결 뒤 1953년 8월 8일 미국의 약속대로 서울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됐다. 그리고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정식 조인되고 양국 국회 비준을 거쳐 1954년 11월 18일부로 발효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요구한 북한의 침략시 자동개입 보장은 유보됐지만 대신 미군을 주둔시켜 유사시 미군의 자동개입을 가능케 하는 인계철선(引繼鐵線 trip wire) 역할을 하도록 했다. 미군이 북한의 남침 억제를 위한 인질 역할을 하게 한 셈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한미동맹과 미군의 존재는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는 강력한 억지력이었다. 당연히 북한은 줄곧 미군철수를 요구했다. 남한 적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고리는 한미동맹의 와해와 미군의 철수였기 때문이다.

역으로 남한은 한미동맹이 제공하는 안보우산 덕분에 안보비용의 부담을 덜면서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다.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을 별도로 한다면 한미동맹이 제공한 기회요인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한미동맹은 대한민국의 안보의 생명선이었을 뿐 아니라 경제발전의 기초였다.

북한은 6·25 이후 한동안은 경제적으로 한국을 앞서 있었다. 이런 상황은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 역전되기 시작해, 1988년 올림픽 이후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결정적 종점으로 치달았다. 소련의 시혜적 원조에 지나지 않았던 ‘사회주의 형제무역’시스템이 사라지자 북한 경제에 궤멸적 타격이 온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민주화의 진통을 겪으면서도 성장을 계속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으며, 국제적 경제위기의 와중에도 마침내 2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에 세계 7번째로 들어서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GUTS와 Korea As Number One

美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최신호에서 “한국(South Korea)은 이미 선진국이며 독일(Germany) 미국(USA) 터키(Turkey)와 더불어 새로운 세계 4대 강국 GUTS의 하나”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포린폴리시는 그 다음호에도, 한때 일본이 “Japan As Number One"으로 표현됐지만 이제는 한국이 “Korea As Number One”으로 불려야 한다며 한국경제에 찬사를 보내는 기사를 실었다.

한미동맹은 앞으로 성공적 동맹의 중요성을 웅변하는 가장 놀라운 사례의 하나로 국제정치사에 기록될 가능성 크다. 포린폴리시가 연거푸 극찬할 만큼 미국의 입장에서도 한국과 맺은 관계만큼 성공적인 결실을 낳은 경우는 없었다. 한국의 입장에서도 한미동맹은 우리 역사상의 대외관계들 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역사의 각 시대에서 대외적 세력관계의 조건이 우리의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면 그 점은 더욱 극명하게 다가온다.

한국인들은 단군신화는 알면서도 漢武帝의 고조선 침략시기의 국제관계에 대해선 대부분 잘 모른다. 그런데 이때의 상황은 이후로도 변함없이 관철되는 한반도 일대의 국제정치 상황의 원형을 보여준다. BC 109년 漢무제의 침공을 받은 고조선은 1년여를 버티지만 BC 108년 결국 내분으로 무너졌는데, 고조선의 항복소식을 들은 漢무제는 다음과 같이 기뻐했다고 한다.

東伐朝鮮 起玄·樂浪 以斷匈奴之左臂(동벌조선 기현토낙랑 이단흉노지좌비)

후한(後漢) 초 역사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권(卷) 73 위현전(韋賢傳) 중 한 대목인데 “동쪽으로 조선을 쳐서 현도군과 낙랑군을 일으키니 이로써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는 뜻이다. “흉노의 왼팔” 운운이 바로 당시의 관계구도를 시사한다.

漢무제는 흉노를 BC 129년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고조선을 공격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인 BC 109년이었다. 흉노를 먼저 공격해 충분히 약화시킨 뒤 고조선을 공격한 것이다. 이것은 흉노가 북방 초원에 강력하게 군림하며 중원을 압박하던 시기에는 고조선을 먼저 공격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삼각 구도는 7세기, 당(唐)과 돌궐 고구려 사이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재현된다. 돌궐은 唐 건국 초 고조가 신하의 예를 갖춰야만 했을 만큼 강국이었다. 그러다 동서로 나눠져 약화되고 630년 동돌궐이 唐태종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644년 唐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唐태종은 나중에 고구려와 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우리 역사상 대외관계 변동들의 파장

그러나 唐은 이후에도 거듭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럴 만도 한 게 근근이 버티던 서돌궐조차 657년 唐에 복속돼 그 움직임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더 이상 없었던 덕분이다. 수당 양대의 거듭된 침공을 모두 물리쳤던 고구려도 이렇게 계속 공격을 받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고려는 한때 칭제건원(稱帝建元)이 결코 비현실적으로 생각되지 않을 만큼 위상이 강력했다. 그런데 이는 중국 쪽의 분열로 인한 세력균형 상황에 힘입은 바 컸다. 한족의 송(宋)은 중국 역사상 최약체였으며, 북방을 차례로 아우르던 거란의 요(遼), 여진의 금(金)은 물산은 풍부하지만 약체였던 宋을 주로 공략, 약탈하고 있었다. 거란과 여진이 차례로 고려를 공격했지만 결국 제한적으로 끝난 것은 어떻든 배후에 宋을 두고 마냥 고려와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몽골이 중국 전체를 석권하면서 결국 끝이 났다.

조선시대의 국제정치적 상황은 근본적으로는 몽골-고려 구조의 연장이었다. 중국을 하나로 아우른 명(明)과 청(淸)을 견제해 조선에 국제정치적으로 자립적 공간을 부여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잠시 일본이 힘을 행사했지만 동북아시아 세계는 아직은 대륙과 해양의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온 것은 19세기 말 서구 해양세력이 동아시아에 등장하면서였다. 일본은 강제 개항의 굴욕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편승하면서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조선은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청의 몰락 이후에도 영미해양세력 반대편의 러시아라는 전근대적 내륙형 전제주의 세력에 기대는 쪽으로 가면서 몰락으로 치달았다.

우리 민족에게 다시 기회가 온 것은 일본이 자신의 동아패권을 가능케 했던 영미 해양세력을 적으로 돌려 패망하면서였다. 그런데 해방은 선택의 기로를 함께 제공했다. 한반도에는 대륙과 해양 세력의 대치구도가 다시 재현됐는데 이번 구도는 치열한 이념의 대치까지 동반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소련이 돼 있었고, 중국도 공산화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해양세력의 역할을 자유민주주의의 미국이 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선택이 우리의 운명을 가를 참이었다.

대륙-한반도-해양 대치구도도 세력구도의 관점에서만 보면 한-고조선-흉노의 삼각구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었다. 바뀐 것이라면 과거 중원세력을 견제하던 북방유목세력의 역할을 해양세력이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미국이라는 해양세력은 단순히 그 역할만 대체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군사적으로 강력할 뿐만 아니라 그를 뒷받침하는 시장경제라는 강력한 상업 문명, 여기에 이를 지탱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의 3박자를 갖추고 있었다.

새로운 역사적 기회가 오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발전을 가로막은 모든 압박은 사실상 대륙으로부터 왔다. 북방 유목세력이 때때로 중원을 억누를 때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으나 어느 쪽에 의해서건 대륙이 하나의 힘으로 통합됐을 때는 언제나 한반도를 향해 힘이 엄습해오곤 했다. 해양시대가 열리기 전의 한반도는 그러한 질곡을 타개할 출구가 없었다. 해양상업문명시대의 도래와 그 선두 미국의 등장은 대륙의 힘이 어떻게 형성되든 더 이상 출구 없는 고립에 처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승만이 이끈 한국은 그 길을 택했고 북한은 반대로 갔다. 북한은 이념의 차원에서도 그랬지만 그 점을 논외로도 우리 역사를 압박했던 대륙세력의 퇴행적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소련은 곧 러시아였으며, 중공도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모택동의 말이 드러내듯 한반도에 대한 전통적 야심에 변함이 없었다.

미국은 달랐다. 미국은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토적 야심의 이유가 없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가장 큰 존재가치는 공산주의의 확대를 저지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방파제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공산화와 6·25가 그것을 확증했다.

만약 중국이 공산화되지 않았다면 미국은 자신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역할, 즉 일본을 견제하고 소련의 진출을 막는 임무를 ‘자유중국’의 몫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여전히 중국의 전통적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1949년 중국이 공산화하고 북한이 남침하면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저절로 사라졌다.

만약 한국이 넘어가면 다음은 일본 차례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에 엄청난 출혈을 야기했던 일본이 이번에는 붉은 제국이라는 적국이 돼 재등장하는 것을 뜻했다. 공산화는 한반도에서 단연코 저지돼야 했으며 자유민주주의는 반드시 대한민국에서 수호돼야 했다.

또 다시 다가오는 도전

그 자유수호의 최일선이라는 조건이 대한민국의 기회였다. 자유로운 중국이든 공산중국이든, 중국은 적어도 한반도의 남쪽에는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됐다.

우리에게 굴욕을 안겼던 일본도 미국의 힘 아래 있었다. 미국은 6·25를 계기로 일본의 경제적 재무장을 허용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미국은 스스로 한반도에 주둔해 군사적 부담을 질지언정 일본이 ‘경제’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의 눈으로 볼 때 여전히 전과자요 우범자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보다 더 강력해지는 것은 언제나 미국의 국익에 부합했다. 지금도 그렇다.

중국의 본격 대두로 지금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일각에선 이에 발맞춰 美中 사이에서 보다 중립적인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같은 부화뇌동은 어리석음 이상의 불순함이다. 중국은 한국에 대해 “만약 미국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손 봤을 것”이라는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그리고 “냉전시대의 낡은 유물” 운운하며 노골적으로 한미동맹의 해소를 주문한다. 그러면서 북한의 핵놀음에는 어떠한 근본적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북한의 핵장난의 배후에는 결국 한미에 대해 간접 도발을 지속하려는 중국의 국제정치적 술책이 있다는 뜻이다.

중국의 전통적 야욕의 재현은 완연하다. 자립적 존재 능력을 상실한 북한은 현재 그 머슴 노릇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야욕도 그에 기대고 있는 북한의 장난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국이 정치 경제 양면 모두에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그 여파는 결국 북한을 향하게 돼 김정은 정권의 종말을 부채질할 것이며, 이것은 대한민국에 의한 통일의 기회가 될 것이다. 머지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우리 내부의 적 종북 무리들이다. 이들은 암적 존재다.

만약 지금 이 암을 도려내지 못하면 우리는 기회를 갖기 전에 먼저 악성종양의 확산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 외부의 적은 단결로 맞설 수 있으나 내부의 적은 그 단결을 해친다. 도려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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