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왜 반공주의자가 되었나
이승만은 왜 반공주의자가 되었나
  • 미래한국
  • 승인 2012.07.1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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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승만 박사는 확고한 반공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 접할 때부터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이 박사가 청·장년 시절부터 견지해온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민주주의 애호 입장은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와 상합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1919년 3·1운동 전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당시 소련 공산주의체제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소련 공산정권의 지도자 레닌과 소련 공산정권이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그의 저서 <제국주의론>에서는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이승만 박사는 레닌과 소련 공산정권의 이러한 선전을 듣고 한때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소련의 지원을 획득하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독립운동연구가 김희곤에 따르면,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은 소련 정부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연결선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승만은 시베리아까지 장악한 소련 정부를 서유럽 여러 나라도 곧 승인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을 국내로 진격시키려는 방안을 검토하였다는 것이다.

김희곤은 당시 이승만이 지인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과 이승만과 임시정부가 소련 정부에 대표단을 파견한 것 등을 근거로 그렇게 추론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으로서 1920년 이희경을 러시아에 파견하기도 했으며, 임시정부는 1921년 5월 국무총리 신규식의 이름으로 이희경과 안공근을 대표단으로 선정해 소련정부에 파견했다.

소련에 대표단 파견, 지원유치 검토

한편 임정 내부 및 임정 주변의 공산주의자나 그 동조자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승만을 임정에서 거세하기 위한 공격을 임정 초기부터 전개했다. 임정 내부 및 임정 주변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공산당이 제공한 공작금을 이용해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다양한 공작을 전개했다.

이런저런 구실을 대면서 이승만에게 임시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라고 면전에서 요구하기도 하고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해 이승만을 몰아내려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국민대표대회에서 이승만을 제거하는 데 실패하자 안창호세력과 합세해 임시정부 의정원을 통해 이승만을 탄핵했다. 그들은 탄핵만 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이 워싱턴에 구성해놓은 대한민국 구미위원부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공포해 미국에서의 이승만의 독립운동 발판을 없애려 했다.

공산주의자 및 그 주변세력의 이승만에 대한 이 같은 공격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도록 자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만은 상해에서 자기를 축출하기 위한 국민대표대회가 진행되고 있던 시기인 1923년 3월 그의 영향 하에 하와이에서 발행되던 잡지 <태평양 잡지>에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다.

‘공산당의 當不當(당부당)’이란 제목의 그 글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평등주의는 합당한 것이나,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재산의 평등 분배, 자본가 계급의 타도, 지식계급의 제거, 종교탄압, 국가폐지 등은 부당한 것이라고 해설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면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도움이 된다면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협조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러한 이승만의 태도는 앞서 인용한 ‘공산당의 당부당’ 말미에서도 천명돼 있다. 이승만은 “우리 한족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다 공산당 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이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과 한인 좌익세력은 이승만을 배척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소련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서 이승만과 더불어 미·중·한·소 4개국 항일연대를 구축하기로 합의해 놓고서는 그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이승만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소련 정부는 돌연 이승만에게 발급한 비자가 ‘착오’였으므로 즉시 출국하라고 통고해 이승만을 추방했다.

이승만의 귀국 연설

그러나 막상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난 후 민족단합에 의한 조속한 독립을 위해 좌우합작이 불가피한 상황이 전개되자 이승만은 좌우합작을 수용했다. 조선공산당이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주석에 이승만을 일방적으로 추대했을 때 이승만은 그런 추대를 상당 기간 거부하지 않았다.

인공이란 기구가 공산당이 일방적으로 조직한 변태적인 기구이고, 그 주석이란 직책이 공산당의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귀국과 함께 좌우를 초월한 민족 대단결을 통한 조속한 독립 성취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이승만은 귀국 다음날인 17일 저녁에 행한 라디오 방송연설에서 “모든 정당과 당파가 협동하여 우리 조선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을 찾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이승만의 귀국과 이승만의 민족단합 메시지에 대해 좌우익을 초월해 모든 정치세력들이 환영했다. 우익진영이 환영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좌익진영이 환영한 것은 특기할 사항이다. 당시 좌익진영의 통일전선 기구였던 조선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의 귀국에 대해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 이승만 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삼천만 민중의 敬仰待望(경앙대망)의 的(적)이었던 만큼 전국은 환호에 넘치고 있다. 우리 해방운동에 있어서 박사의 위공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서의 추대는 조선인민의 총의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해방조선은 독립조선으로서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으로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라는 환영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도 방송연설을 통해 좌익진영의 환영에 화답했다. 그는 10월 21일 저녁에 행한 방송연설에서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천명했다. 조속한 독립을 위해 공산당과 협력할 의지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나는 공산당에 호의적”, 좌우합작 시도

이러한 입장에서 이승만은 우리 민족의 모든 정치세력이 하나가 되어 독립을 조속히 실현하기 위한 단체로서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결성을 제안했다. 이승만은 독촉중협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모임에서 친일파 숙청 문제와 임시정부 봉대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익이 대립하면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고 중재자의 입장에서 ‘악수할 점이 있으면 무조건 악수하고 나가자’고 호소했다.

그리하여 해방정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좌우를 초월한 모든 정치세력이 실질적으로 참여한 단체인 독촉중협이 결성되었다. 독촉중협에 참여한 공산당은 연합국에 보내는 독촉중협의 메시지 내용, 이승만의 인공주석 취임,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배정 등을 놓고 이승만과 줄다리기를 했다.

공산당은 이승만이 초안을 작성한 연합국에 보내는 메시지에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라고 촉구하는 구절이 연합국에 불손한 내용이라는 점을 들어 그것의 수정을 요구했고, 이승만에게 조속히 인공 주석에 취임할 것과 인공주석에 취임하지 않으면 이승만을 지도자로 받들지 않고 ‘민족통일전선 분열의 최고 책임자로 규정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또한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좌익이 과반수를 차지해 독촉중협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하려는 노력을 전개했다.연합국에 보내는 메시지 수정이라는 쟁점은 수정을 요구했던 박헌영이 문안수정회의에 불참하고, 공산당이 독자적으로 연합국에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해소됐다.

이승만에 대한 인공 주석 취임 요구는 이승만이 공개적으로 취임을 거부하고, 그에 대해 좌익이 이승만을 초당파적 인사로 취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피장파장이 됐다.

각종 장애물을 설치하면서 독촉의 정식 출범을 방해하는 공산당의 행태에 실망한 이승만은 11월 21일 공산당의 그러한 행태를 온건하게 비판하는 방송연설을 했다. 이승만의 공산당 비판 연설이 방송되자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이 반발해 독촉중협에서 탈퇴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행태에 분노한 이승만은 12월 19일 저녁에 방송된 라디오 방송연설을 통해 공산당에 대한 대결을 선언했다. 이승만은 그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세계 각국에 선언합니다. 이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오, 공산당 극좌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조작하여 국민 전체에 분열 상태를 타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분자들과 싸우는 방법은 먼저는 그 사람들을 회유해서 사실을 알려주시오.…시종 고치지 않고 파괴를 주장하는 자는 비록 친부형이나 親子姪이라도 원수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 이승만은 단호한 반공 입장을 취하면서 건국운동을 전개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반공 입장은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는 물론이고 4·19로 대통령직을 사임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승만의 반공이 없었더라면…

거칠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이승만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남한 국민은 자유민주주의체제 하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확고한 반공노선과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겸비한 이 박사가 없었더라면 남한의 정치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다음의 3가지 코스 중 어느 하나의 코스로 진행됐을 것이다.

첫째, 좌익과 남북협상파가 남한 정계를 주도해 남북협상을 계속했을 것이다. 감성적 호소에 유난히 잘 동조하는 한국인들의 성향에 비춰볼 때 이승만이 없었더라면 “통일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협력하지 아니 하겠다”는 김구의 감성적 호소는 남한 국민의 마음을 지배했을 것이다.

둘째, 미·소공위에서 한반도 통일 임시정부 구성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져 좌익이 다수를 차지하는 통일 임시정부가 구성됐을 것이다. 미·소공위에서 통일 임시정부 구성과 관련해 미국이 주장할 수 있는 최대 요구는 남북한의 인구 비례에 따라 남한 정당에 2, 북한 정당에 1의 비율로 배정할 것과, 남한 정당 간에는 좌·우·중을 균형적으로 배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대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통일 임시정부는 남북한의 좌익이 50%이상을 차지하고, 중도파의 상당수가 그에 동조하는 구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한반도는 신탁통치 종료와 함께 공산체제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셋째, 남북협상과 미·소공위가 다 결렬되고 유엔결의에 따라 남한에서 선거가 실시돼 남한에 좌익-중도파-김구세력의 연립정권이 수립됐을 것이다. 당시 중도파 정당들에는 좌익 프락치들이 깊이 침투해 있었고, 김구의 주변도 북한 간첩에 포섭된 자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연립정권은 사실상 좌익정권과 다름없는 정권이 됐을 것이다.

이상의 3개 코스 가운데 어느 코스로 진행되더라도 남한의 정치적 운명은 공산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이승만은 공산화 통일을 바라는 세력에게 있어서 ‘민족통일을 저지한 원흉’이 되는 것이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정치학

이승만연구원 강좌 발표 6/29
요약/ 본지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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