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와 여인을 지키지 못해서야…
어린아이와 여인을 지키지 못해서야…
  • 이강호 기자
  • 승인 2012.08.27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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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주자라면 먼저 안전한 사회부터 약속해야 한다!

쓰레기들의 만행

2008년 12월 안산시 단원구의 한 교회 안에서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57세 먹은 조두순이라는 자였다. 그런데 피해자는 8살짜리 여자아이였다. 피해 여자아이는 상해로 평생 불구가 되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범인은 2009년 1월 9일 강간상해죄로 기소되어 3월 4일 무기 징역형을 구형받았다. 1심 판결은 징역 12년형이었다. 가해자인 조두순은 "형량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를 했다. 그러나 담당 검사는 항소를 하지 않았고 최종 선고는 12년형으로 확정되었다.

성범죄의 최고형량은 징역 15년까지다. 미성년자에 대한 경우에는 가중처벌을 받게 돼 있다. 그런데 아직 아기나 다름없는 어린 소녀를 참혹하게 유린한 사건인데 가중처벌은커녕 최고형량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전국이 분노로 들끓어 오르고 국회에선 온갖 법안이 경쟁하듯 제출됐다. 하지만 그 때뿐, 그 모든 대단한 案들은 어느 틈엔가 그냥 국회의 서류더미 사이에서 잠을 자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2010년 2월 24일 또 어린 여중생이 유린되고 살해까지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길태 사건이다. 아이가, 아직 피지도 못한 중학생 여자 아이가 할퀴어지고 목 졸려 죽은 채 알몸 상태로 묶여 차가운 물통 속에 처박혀 버려졌다.

그리고 2012년 현재, 갖가지 끔찍한 성범죄가 거의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다. 8월 10일 한 피자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대생이 사장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8월 20일에는 전자발찌를 찬 성범죄 전과자 서진환이라는 자가 주부를 성폭행하려다 저항하자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8월 21일에는 특수강간죄로 복역한 강남진이라는 자가 출소한지 43일 만에 또 성폭행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흉기를 휘둘러 1명이 죽고 4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래서야 문명의 자격이 있나?

문명의 가치는 무엇인가? 원시적 폭력이 난무하는 야만 상태의 불안함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물리적으로는 절대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인과 어린아이 같은 존재도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문명의 자부심 아닌가?

여인과 아이를 먼저 보호하는 것이 문명인의 명예 아니었나?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아이와 여인이 불안에 떨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래서야 문명사회 문명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문명의 여러 기재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성(性)과 관련한 윤리와 제도들이다. 그것은 문명이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기반임과 동시에 문명다움의 목적이기도 하다. 성적인 무질서 특히 폭력적 성행동의 횡행은 그 자체로 문명의 붕괴다. 더욱이 아동에 대한 성범죄는 그 차원도 넘어서는 문제다.

모든 성범죄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만 특히 아동 대상 성범죄는 인간의 ‘인간적 잘못’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행위다. 그것은 일탈을 넘어선 인간 자체에 대한 포기며 부인이다. 짐승 어쩌고 하는 표현은 애꿎은 동물을 모욕하는 얘기다. 짐승도 어린 새끼를 성폭행 하지는 않는다.

문명화된 사회는 범법자의 인권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권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인간으로 간주할 수 없는 존재’를 놓고 인권 운운에만 몰두하는 게 옳은 일인가? 자신의 딸, 자신의 손녀가 그렇게 유린당했다면 과연 토론만 할 만큼 한가할 수 있을 것인가?

성범죄에 대해선 그냥 대책이 아니라 ‘전쟁’이 필요하다. '서릿발 같은 결연한 전쟁'이 필요하다. 모든 범죄에 엄격해야 하겠지만 특히 아동 대상 성범죄에는 어떠한 관용도 없어야 한다.

우리 자녀들의 최소한의 안전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출산율 저하 대책을 떠드는 것은 난센스조차도 못된다. 아동 대상 성범죄자들은 인간 범주의 바깥에 있는 쓰레기, 그것도 재활용의 여지가 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재활용 가능성이 없는 쓰레기는 폐기처분이 정답이다.

어설픈 동정론, 위선적인 포퓰리즘

8월 22일 여의도 퇴근길에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있었다. 이를 놓고 또 '사회적' 병리가 어떠니 하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걸핏하면 사회를 탓하는 위선적인 논리가 세상을 더 어지럽힌다.

공자는 야합으로 태어난 서자(庶子)였고, 석가모니의 생모(生母)는 그를 낳자마자 죽었다. 예수의 모친은 마리아였으나 그 남편 요셉은 어떻든 생부(生父)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자가 아니라 성인(聖人)이 되었다. 불우한 환경이 어쩌고 하는 어설픈 동정론은 이제 그만 떠들었으면 한다.

그런 식의 논법은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고 일어선 모든 이들을 모독하는 얘기다. 불우한 환경을 가진 모든 이들이 범죄자가 되는 게 아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훌륭히 성장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기에 그래도 세상이 존속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 환경이 불우해도 잘 자라날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만드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환경 운운을 범죄, 그것도 인간으로 간주할 수 없는 짓의 변호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인간사 많은 일들이 그렇듯, 어설픈 동정심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인간은 견고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추상같은 율법 없는 설익은 휴머니즘만으론 일탈의 유혹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한다. 불우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환경조성에는 오히려 범죄를 엄격히 다스리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율법은 즐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불편해도 결국은 우리를 더 안전하게 한다.

대선까지 불과 4개월도 안 남았다. '추상같은 다스림으로 우리의 아이들과 여인들의 안전을 약속하겠다'는 건 대선공약감이 못되는가 묻고 싶다.(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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