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의 부활
국가주의의 부활
  • 이원우
  • 승인 2012.09.0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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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의 자유주의]

히틀러 이후의 역사가들은 그를 악마로 묘사했다.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오로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짐승처럼 달리면서 오줌을 누고, “내일 아침”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던 아우슈비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였다. 그 역사를 차마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말할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은 냉엄하다. 당시의 독일이 히틀러를 ‘열망’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문건들은 지금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당시 대중들은 극장 스크린에 히틀러의 얼굴이 비춰지기만 해도 열광했다고 한다.

히틀러를 숭배했던 게르만 민족

본래 반(反)나치주의자였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히틀러와 2시간 15분을 만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아름다운 손을 언어의 반주로 썼는데, 그 제스처는 우아했으며 음성도 인간적으로 매우 듣기 좋았다. (…) 나는 히틀러를 매우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로이드 조지와 프랑수아 퐁세 역시 히틀러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나섰다.

히틀러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음침한 시대에 강림한 메시아였으며, 유토피아의 원작자이자 카리스마적 인간의 정점이었다. 이제 현실은 오히려 암울할수록 좋았다. 그래야만 히틀러에 의해서 구원받을 때 더욱 더 극적일 테니까. 이쯤 되면 히틀러를 악마로 서술하는 것이 도리어 조작이 된다. 적어도 동시대의 독일인들에게 그는 천사였다.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를 ‘변화를 향한 시대의 열망’이라 판단했다. 이것은 매우 예리한 통찰이다. 마르크스주의 안에 숨어 있는 격동의 에너지가 한 집단 전체로 투사됐을 때 잠재력이 무한할 수 있음을 그때 이미 간파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호명했던 ‘만국의 노동자’를 삭제하고 ‘게르만 민족’을 집어넣자 극좌는 극우가 됐고 대중들은 열광했다. 국가주의의 만개. 그 뒤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잘 아는 대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의 파멸을 보면서 그 속으로 들어간다.”
-레오폴트 랑케(L. Ranke)

최근 동아시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올림픽 직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자국의 깃발이 맨 위에서 휘날리는 금메달의 환희는 잠시나마 비루한 현실을 잊게 해줬다.

그뿐인가? 판정 시비와 결과 번복은 번번이 시청자를 ‘국민’의 하나로 각성시켰다. 그 순간만큼은 평범한 대중이 아닌 국가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한국 바깥에서도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일본으로 귀국한 메달 수상자들을 위한 카퍼레이드가 도쿄 긴자에서 열렸을 때 50만 명의 일본인들이 운집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환호와 열광 속에서 세대 단절도 장기 불황도 잊은 채 ‘일본인’이기만 하면 된다는 걸 그들은 처음 알았을 것이다.

퍼레이드를 기획한 것은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의 핵무장을 지지하며 틈만 나면 민족적 DNA를 운운하는 인물이다.

각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국가주의는 복잡다단한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마스터키의 역할을 해 준다. 국적을 유지하는 것 외에 국민들을 향해 그 어떤 변화도 촉구할 필요가 없고, 그저 보이지 않는 외부의 적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지지율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불거진 러시아-중국-한국-일본의 영토분쟁은 차라리 기회다. 특히 일본 내의 상황은 점점 ‘누가 더 심한 막말을 후련하게 할 수 있느냐’의 배짱 싸움으로 흘러가고 있다.

막말을 한다고 현실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와 일왕 발언 이후 일본 정치인들은 통화스왑이며 국채매입 등 각종 보복수단들을 생각해냈지만 하나같이 파괴력은 적다. 도리어 일본의 낮아진 위상과 줄어든 영향력이 애잔할 따름이다.

쿠릴 열도로 갈등을 빚고 있는 러시아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하지 못하는 일본이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국 이 문제가 ‘국력’의 위상에 따라 정리될 것임을 암시한다.

위험한 국가주의의 용틀임

그러나 이 시간에도 국민들 사이의 감정 싸움은 심상치 않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 내의 반(反) 한류 기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인터넷 여론마저 ‘악플 올림픽’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 최고의 개그맨인 타무라 아츠시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발언하며 “개그맨이기 전에 일본인”이라고 말했다. 이 말 한 마디가 모든 것을 함축한다. 그 말을 듣고 분노하는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이기 전에 한국인’이 돼버린다.

이와 같은 경험은 결국 선거구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얄궂게도 한국, 일본, 중국 3국의 정치지도자가 올 하반기에 전부 교체될 예정이다. 대중들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서 누가 더 ‘강경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고려할 가능성이 높다. 무엇 하나 달라질 것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의 후련함을 선사할 수 있는 게 누구일지를 고르는 선거가 개봉박두 상황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 주변엔 스스로 메시아를 자처하는 정치인도 있고, 대통합을 강조하는 대선 후보도 있다. 일련의 상황은 점점 더 국가주의의 위세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대중들은 아무 것도 바꿀 필요 없이 그저 ‘한국인’이기만 한 채로 비루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고 싶어 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더욱이 정치인은 국민을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각자 스스로의 인생을 개선해 나가려는 차분한 노력일 뿐이다. 스포츠 경기를 보듯이 상황을 판단하고 투표를 했다간 뜨거운 환호 속에서 21세기 버전의 히틀러를 출현시킬 수도 있다.

극좌와 극우는 개인을 버리고 전체에 복무한다는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그것을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이라 명명했다. 지금은 우리 앞에 깔려 있는 노예의 길을 거부하고 자조(自助)의 길을 선택하려는 용기가 절실한 시점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말했을 땐 그와 같이 숙고하는 삶의 자세를 지칭하는 게 아니었던가.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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