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정치가 이승만을 회고하다
기독교 정치가 이승만을 회고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11.08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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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초 기독교국가 건설 목표” 역설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자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였다.

왕족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만 20세인 1895년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해 기독교 교리를 익혔다. 그러나 그는 ‘야소교’는 절대 믿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약속했기 때문에 재학 중에는 기독교에 개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배재학당 졸업 후 이승만은 박영효(朴泳孝) 중심의 입헌군주제 정부를 세우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1899년 1월 경무청 감방에 투옥됐다.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이후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한계 상황에서 목에 드리운 칼에 머리를 얹은 채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기독교에 귀의한다.

이후 이승만은 평리원(고등재판소)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서로 이감된다. 1904년 8월 출옥할 때까지 그는 옥중에서 여러 가지 큰 일을 벌였다. ‘옥중도서실’을 개설하고 ‘옥중학교’를 운영하며 <영한사전>을 편찬하고 <독립졍신>을 저술했다.

그는 영문 및 한문으로 된 성경을 정독하면서 동료 정치범들과 성경을 함께 공부하고 또 감옥을 가끔 심방하는 벙커, 언더우드, 존스 등 북미 선교사들과 예배를 드리면서 동료 죄수 및 옥리(獄吏)들에게 전도를 했다. 그 결과 40여명의 죄수와 옥리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한편 이승만은 기회가 있으면 미국에 건너가 기독교 교육에 관련된 공부를 할 욕심을 품었다. 그는 한성감옥서에서 석방되자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동부에 위치한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했다. 도미(渡美)에 앞서 그는 서울에 있는 북미 선교사 7명으로부터 미국 대학 입학에 필요한 추천서 19통을 받아냈다.

박사학위 받고 귀국, YMCA에서 활동 시작

덕분에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의 니덤(Needham) 총장으로부터 전액 장학금까지 지급받는 조건으로 3학년에 입학을 허락받았다.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에서 2년간 공부해 학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하버드대 인문대학원에 입학해 1년간 석사과정을 이수한 후 프린스턴대 대학원의 박사과정에 입학, 그곳에서 2년간 국제법, 외교학, 서양사, 철학사 등을 전공한 끝에 1910년 7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10년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에 돌아온 그는 서울YMCA의 ‘학감’직을 맡아 청소년들에게 성경, 서양사(특히 미국사) 및 국제법을 가르치고 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지방 사립학교에 YMCA를 조직하는 일을 시작했다.

일제 총독부는 이승만이 사실상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105인 사건’ 에 연루시켜 그를 체포 구금하려 했다. 이승만은 서울 및 국제 YMCA 임원들의 개입으로 체포를 면하고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은 호놀룰루에 정착해 그곳에서 약 5,000명의 한인 교포를 상대로 기독교 전도와 교육 사업을 벌였다. <태평양잡지>라는 월간지 창간했고 ‘한인기독학원’이라는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으며 또 ‘한인기독교회’라는 교회를 창립해 사실상 목회자 역할을 담당했다.

1919년에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와 서울 등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는 국무총리, 집정관총재, 임시대통령 등 임시정부의 최고위 지도자로 추대됐다.

그 후 1919년 8월에 이승만은 한성(서울)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의 직권으로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이 기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 기독교인들간에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그들로부터 독립운동의 지원을 받았다.

제헌국회 개원식, 감사 기도로 시작

해방 후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11월 28일 정동예배당에서 김구(金九) 선생과 함께 예배를 드린 다음 아래와 같이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40년 동안 사람이 당하지 못할 갖은 고난을 받으며 감옥의 불 같은 악형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온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후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제1차 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됐다. 그때 그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회를 개회하는 역사적 순간에 다음과 같은 말로써 이윤영(李允榮) 목사(의원)에게 식순에 없는 기도를 부탁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후 약 두 달이 지난 7월 24일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어서 7월 24일에 거행된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서를 했다.

이승만의 기독교 장려 정책들

이상과 같이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를 발족시킨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 하야할 때까지 12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이 기간에 그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조석으로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실천했으며, 서울 정동감리교회의 등록교인(1956년 이후에는 ‘명예장로’)으로서 주일 예배를 거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독실한 신자의 모범을 보인 그는 기독교를 장려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요 조치를 취했다.

(1) 국가의 주요 의식을 기독교 의식에 따라 집행하는 관례를 세웠다.
(2)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정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바꿨다.
(3) 군대에 군종제도(軍宗制度)를, 또 감옥에 형목제도(刑牧制度)를 도입했다.
(4) 기독교 교인들이 정부 요직과 국회에 많이 진출하도록 장려했다.(정부 요직의 약 40%, 국회의원 중 약 25%)
(5) 기독교 언론사, 기독교계 학교와 신학교의 설립, YMCA 등의 활동을 장려·지원했다.
(6) 기독교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6·25전쟁 당시 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통해 배분토록 조처했다.

해방 전 한국 전체의 기독교 교인 수는 37만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통치기간에 교인수가 부쩍 늘어 1960년에 남한의 기독교인 수는 114만 명이 됐다.

그후 우리나라의 기독교 교세는 이 대통령 재임 시에 굳혀진 기초를 바탕으로 날로 번창해 2005년 말 현재 교인 총수가 1,376만명(개신교인 861만명, 가톨릭 교인 514만명)을 헤아리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기 313년에 ‘종교 자유의 칙령’을 발포함으로써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기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공적에 필적하는 업적을 한국 종교사에서 남겼다고 말할 수 있다.

유영익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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