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유희'에서 '사색유희'로
'사망유희'에서 '사색유희'로
  • 이원우
  • 승인 2012.11.23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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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유희 '1층 토론'은 팩트의 승리
 

TV토론은 우리 시대 가장 과대평가된 논의방식이다.

토론(討論)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각각 의견을 말하며 논의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찬성과 반대로 나뉘는 주제에 대해 각자의 논리를 주장하며 의견의 격차를 확인하고 소통을 도모한다는 목적이다.

일면 그럴듯하나 토론이 TV와 만나는 순간 논리와 팩트는 너무도 쉽게 실종되고 토론은 쇼로 변질되고 만다. TV토론이 처음 시작된 순간부터 이와 같은 경향은 태동되었다.

미국 제35대 대통령선거는 후보 간 TV토론이 투표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친 최초의 선거였다. 1960년 9월 26일 공화당의 닉슨과 민주당의 케네디가 TV토론으로 맞붙기 전까지 대세는 닉슨이었다. 달변가 닉슨의 유려한 말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둘의 라디오 토론에서도 논리의 우위는 늘 닉슨의 차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후보가 화면에서 격돌하자 분위기는 급변했다. 자신감 있는 표정의 미남 케네디는 소위 ‘카메라 울렁증’을 이겨내지 못한 닉슨보다 훨씬 더 ‘대통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상원의원 출신의 케네디였다.

일련의 사건은 미디어가 정치와 결합할 때의 파괴력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 TV토론에서는 ‘승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진실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진중권’으로 상징되는 것

TV토론의 한계가 한국사회를 빗겨갈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 특히 한국의 이념지형이 ‘보수’와 ‘진보’라는 두 낱말로 나뉘면서 TV토론은 진영논리 확산의 본진과도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야밤에 양복을 차려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스튜디오에 앉아있는 패널들은 상대편 패널을 향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시청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논객이란 애초부터 자신의 논리를 전파하는 게 일이니까.

하지만 그 논객조차도 논리보다 레토릭에 천착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자신의 지식을 ‘당의정’으로 능숙하게 포장하지 못하면 남는 것은 패배(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의 조롱)뿐이다.

이는 곧 사실(fact)에 대한 치열한 추적을 거치지 않은 사람도 TV에서의 순발력과 말솜씨만으로 ‘실력 있는 논객’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의미다.

진중권 교수가 최고의 논객으로 등극한 비결을 전부 교묘한 레토릭 덕분이라고만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긴 시간동안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며 자기만의 연륜을 쌓아 왔다.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쫄지 않고’ 장내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히 커다란 능력이다.

네티즌 ‘간결’과의 NLL 논쟁은 지금껏 적층된 진 교수의 스킬이 총천연색으로 펼쳐지는 승리의 금자탑이었다. 말문이 막혀버려 토론대회에 참가한 대학생보다도 기운이 없어진 네티즌에게 “인정하십니까?”를 몇 번이나 반복한 것은 승리의 확인에 다름 아니었다. 토론 이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간결에 대해 “승자에게는 영예를 패자에게는 명예를….”이라고 트윗한 것은 패자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승리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변희재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 회장의 제안으로 이뤄진 ‘사망유희 토론’은 진 교수의 승리가 영속적으로 이어질 것처럼 보였던 국면에서부터 기획되었다.

혹자는 둘의 오랜 악연을 상기시키며 이 대결을 개인적 차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한겨레21>은 노골적으로 변희재를 3류 취급했고, 보수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진중권 교수를 이소룡으로 만들어 주는 것 아니냐’며 우려했다.

하지만 첫 번째 토론에서부터 곧바로 성사된 변희재-진중권의 직접 대결은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묵직한 의미를 남긴 채 변 대표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대선이 끝날 때까지 당초 기획대로 지속될지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이미 ‘사망유희’는 작은 의미 하나와 큰 의미 하나를 남겼다.

‘사망유희 토론’이 남긴 두 가지 의미

‘사망유희’가 이룩한 작은 업적 하나는 토론에 ‘승패’의 개념을 확실하게 들여와 결과에 승복하는 분위기(번복하면 치졸해지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이다.

이소룡이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위층으로 올라갈 수 없었던 것처럼 사망유희는 그때그때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를 확실하게 구분 짓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특성은 사망유희가 (말문이 막혀도 편 들어줄 사람이 없는) 1:1 토론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A는 틀렸다. 왜냐하면 A는 틀렸기 때문이다.”라는 논리로도 방송시간을 전부 채울 수 있었던 기존 TV토론의 구멍은 메워졌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망유희’가 남긴 진짜 중요한 의미는 토론을 레토릭 아닌 팩트(fact)의 장으로 이행시켰다는 점이다. NLL을 주제로 이뤄졌던 변희재-진중권의 1층 토론은 변희재의 승리인 동시에 팩트의 승리였다.

진중권조차 토론 직후 “팩트에서 밀렸습니다”라고 인정한 것은 화려한 레토릭의 향연으로 승패가 결정되었던 기존 토론방식에 균열이 생겼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토론 직후 변 대표는 “중요한 건 토론의 승패가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친노(親盧)세력이 NLL을 북한 김씨 일가에 넘기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하며 논점을 잃어버렸던 NLL논쟁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는 진중권-간결의 토론 시에는 없었던 일로 좋은 토론 하나가 지적 논쟁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승자든 패자든 사회의 지성을 고양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바람직한 토론의 모델일 것이며 패자조차 고급논객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상생적 시스템이다.

변희재와 진중권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지금은 서로 다시 안 볼 듯 싸우고 있지만 10년 쯤 후에는 송대관-태진아 모델을 벤치마킹해서 ‘토론 쇼’를 개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2년의 사망유희가 그저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논리와 팩트가 승리하게 하는 흐름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10년 후의 쇼에는 ‘사색유희’라는 이름을 붙여줘도 좋을 것이다. (미래한국)

* 사망유희 토론이란?
: 1978년 공개된 이소룡 주연의 액션영화 <사망유희>에서 유래한 이름. 진보논객 진중권이 10명의 보수논객과 토론하는 형식으로 기획되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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