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레임덕’ 두가지 경우의 수
‘박근혜 레임덕’ 두가지 경우의 수
  • 이원우
  • 승인 2012.12.3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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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 덕(lame duck)은 ‘다리를 저는 오리’라는 뜻이다. 재선에 실패한 미국 대통령의 권위 없음을 비유하는 데서 유래된 표현이다. 흔히 임기 말의 리더에 대해 사용하는 말로 정착됐지만, 엄밀히 말해 시점(時點)을 암시하는 표현은 아니다. 그저 오리가 다리를 전다는 것뿐이다.

말인즉슨 잔여 임기와 관계없이 모든 대통령은 레임덕이 될 수 있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취임 첫 해에 촛불에 휩싸인 MB정부가 그랬다. 오리의 두 다리 중 ‘(자칭) 진보’가 보행을 거부하자 5년 내내 정부의 걸음걸이는 비틀비틀 위태로웠다. 지켜보는 사람들마저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 불안의 나날들이었다.

18대 대선에서 50대 이상 중장년층들이 폭발적인 투표율을 기록한 것은 이 공포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비틀거리며 다리를 절지언정 오리가 쓰러지는 사태만큼은 막아야겠다는 사명감으로 투표장에는 ‘노장(老壯) 폭풍’이 불어 닥쳤다. 51.6%라는, 숫자조차 미묘한 득표율의 중요한 지분이 거기에서 비롯됐다.

희망과 절망 사이

또 한 판의 승부가 그렇게 끝이 났지만 한국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 박근혜의 승리는 방어적 성격이 매우 짙었던 것이다.

우리는 “박근혜를 떨어뜨리려고 나왔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던 후보를 겨우 배제했을 뿐이다. 선동을 엔터테인먼트로 승화시킨 나꼼수를 겨우 밀어냈을 뿐이다.

NLL을 넘겨줄 뻔 하고도 변명에 부실했던 후보를 가까스로 비토 했을 뿐이다. 승리라기보다는 비(非)패배에 가까운 것인 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박근혜 이후 보수 진영의 스타는 없으니 상황은 엄중하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절반은 박근혜의 승리에 지나치게 커다란 승리감을 표출하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그동안 박근혜(혹은 새누리당)에게 비판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비아냥거림이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워낙 승부가 접전이었던 탓에 응원을 하면서 혼자 정이 든 경우도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의 당선만으로 좋은 세상이 온다는 기대는 일찌감치 버리는 편이 좋다. 레임덕은 반대 진영의 ‘전진 거부’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너무 큰 환상을 품고서 너도 나도 올라타는 경우에도 오리는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다리를 절 수밖에 없다. 한 쪽 발을 다친 상태에서 자기 체중 이상의 짐을 싣고 걸어가는 오리를 상상해 보라. 지금 이대로라면 박근혜는 바로 그러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백신이 필요하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틈만 나면 새 대통령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여전히 엄존한다. 이문열 선생이 ‘불복의 구조화’라고 표현한 대로다. 당선 직후 ‘민영화 괴담’이 포털 검색창을 점령한 것은 박근혜가 실패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는 점을 표상한다.

목표 지점 한 발 앞에서 권력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자들이 패배 이후 나름의 반격을 시도하는 건 일견 불가피한 일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일반시민들까지 언제든 새로운 선동의 흐름에 휩쓸릴 수 있다는 점이다. 체제를 흔들려는 목소리는 유난히 크고 재미있게 들리는 법이다.

앞으로도 박근혜 집권 이후의 상황을 창의력 넘치는 비아냥거림으로 승화시키는 자들은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세상을 온통 비관적 권력투쟁으로만 바라보는 그들에게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51.6%는 미리부터 대응의 논리를 만들어둬야 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두 번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효력이 좋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은 역시 ‘자유주의 백신’이다. “정치는 중요하지만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다”는 사실, 정치가 아니라 개인의 분발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기적이 된다는 진실을 일찍부터 파급시켜둬야 한다.

5년 후, 우리는 지금보다 고단할 것이다

자유주의적 시각으로 한 가지 예언을 해 보자면, 박근혜 집권 이후 한국인들의 삶은 한층 더 고단해질 것이다. 왜일까. 박근혜가 국정 운영을 제대로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아니다. 글로벌 불황이 다가오기 때문에? 틀렸다.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은 본래부터 갈수록 고단해지는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고단함의 크레센도’다.

향후 5년 동안의 인생에 대해 고찰해 보자. 스무 살 청춘은 취업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올해 취직한 신입사원은 결혼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올해 결혼한 신랑 신부는 육아와 생활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올해 아기를 얻은 부모는 아이의 교육을 걱정하기 시작할 것이다. 한 마디로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닥치고 정치’류의 주장은 정치인과 비(非)정치인의 연관성을 과장하면서 투표가 권력을 이긴다는 둥 다시 한 번 헛소리를 시작할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인생의 고단함을 전부 정치인 탓으로 돌리는 논리에 솔깃하는 순간 제2의 촛불은 시작되는 것이다.

5년 동안 개인의 삶에 충실하지 않은 상태라면 그들의 주장에 쉽게 동조하고 말 것이다. 박근혜라는 카드 한 장이 모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줄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이 정말로 위험한 이유다. ‘지지’에서 ‘안티’로 돌아선 사람보다 무서운 적은 없다.

51.6%는 이제 박근혜와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 박근혜의 승리는 박근혜의 승리일 뿐이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라는 대한민국의 주요 축에서 이탈할 시에는 제 아무리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해도 격렬한 비판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기세로 새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주시하는 한편 유권자들 인생 각자 스스로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2012년, 정치의 파티는 끝났다. 이제는 다시 관점을 개인에게로 돌리자.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 각자의 삶을 향상시킬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설익은 비관주의자들로부터 절름발이 오리를 지켜낼 수 있다. (미래한국)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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