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절, 내가 겪은 남과 북
청소년 시절, 내가 겪은 남과 북
  • 미래한국
  • 승인 2013.04.30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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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대학생 박철준 군 증언


나는 2009년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왔다. 북한에서 나는 군인가족이었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부대에서 돌아가셔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혼자 나와 동생을 키우셨다.

집안이 어려웠지만 시골학교에 등록했고 교장선생님의 추천을 받아서 부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군대 가기 전에 할머니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할머니 생신이 있는 10월에 맞춰서 함경도에 갔다.

그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땐 이미 고모가 중국에서 10년간 살고 계셨다. 그래서 고모랑 전화 통화를 했다. 그러니까 고모가 “중국에 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가라”고 하셨다. 호기심 반 그리움 반으로 3주간 고민하다가 중국행을 선택했다.

동생도 군대에 갈 시기가 됐는데 잡힐 게 무서워 탈북을 포기했다. 갑자기 결정을 내린 후 고모와 연락해서 11월에 두만강을 넘었다. 할머니가 두만강 지리를 잘 알고 계셨다. 건너다가 강에서 넘어진 할머니를 내가 구해드렸다.

추우니까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옷이 다 젖었다가 얼음덩어리가 됐다. 그 상태에서 5시간 동안 걸었다. 살기 위해 무조건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행히 거기서 고모가 보낸 브로커들을 만나서 무사히 중국 공안에게 걸리지 않고 올 수 있었다.

이후 한국으로 오는 경로에서 라오스에서는 경관들에게 추격을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태국에 6시간 만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태국 근처에 가니 그들이 쫓아와서 거꾸로 라오스 쪽으로 4시간을 갔다. 그리고 라오스 빈민가에 가서 하룻밤을 꼬박 샜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도왔다. 아침에 안개가 너무 끼어서 30cm 앞에 있는 사람도 안보일 정도가 된 것이다. 안개가 아니었다면 그 마을을 둘러싼 경관들 때문에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아침에 다행히 안개가 끼니까 뱃사공을 다시 불러서 배를 타고 태국 쪽으로 갔다.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1시간 정도 걷다가 경찰에게 잡혀서 6개월간 지방 감옥에서 수갑을 찬 채 생활했다. 그러다가 6개월 만에 방콕에 도착했고 마침내 할머니, 고모와 함께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국정원과 하나원을 거쳐 2009년 8월에 평택에 집을 배정받고 거기서 생활하게 됐다. 당시 하나원에서 한국 사회에 대해 교육한 건 전체적이고 원론적이어서, 사소하고 세부적인 건 잘 몰랐다.

실제로 현실에서 내가 겪어본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2009년 내가 20살이었는데 처음엔 돈을 벌어서 어머니와 동생을 데려오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TV와 신문을 보며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엔 할머니가 나를 나무라셨다. 20살이 돼 한국에 와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공부를 하느냐고, 철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할머니와 고모를 설득했고 내가 살던 평택 지역 학교를 찾아갔다. 교장선생님은 탈북학생을 처음 맡게 돼 당황하시는 모습이었다.

20살에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에 들어갔다. 난 북한에서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 교복을 입어보는 게 꿈이었다. 주변의 관심과 노력 그리고 선생님들과 각종 단체 도움으로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공부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내가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게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친구들이 죄다 게임 얘기만 하는 것이 신기했다. 어떤 친구는 북한에 게임, 노래방, 햄버거 등이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들에게 내가 신기해 보였을 것이다. 현재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서강대에 재외국민특별전형으로 입학해 다니고 있다. 어려움이 많지만 포기하지 않고 살면서 어머니도 북에서 모셔오고 싶다.

세이브엔케이 북한구원기도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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