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영혼을 울린 50년의 벨칸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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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3.05.2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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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너 박인수 교수, 자서전 ‘삶과 음악’ 출간
 

‘넓은 벌 동쪽 끝으로’로 시작하는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 우리에겐 대중가수와 클래식 성악가가 함께 불러 화제가 된 ‘가요’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으로 시작되는 맑은 고음파트는 대중에게 성악 발성의 매력을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그 주인공인 테너 박인수 교수가 자서전 <테너 박인수의 삶과 음악>을 출간했다.

테너 박인수는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62년 국내에서 데뷔해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1983년 귀국할 때까지 미국에서 활약했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국내 대표적인 테너의 자리를 지켜왔다.

이제껏 오페라 무대 주인공으로만 300여 회, 개인 공연만 2,000여 회가 넘는다. 물론 성공의 고개가 높았던 만큼 절망의 나락도 있었다.

성악가로서는 전부였던 목소리를 잃는가 하면 오페라단에서 퇴출되는 쓴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그런 그의 삶과 음악, 부제대로 ‘참 소리를 얻기 위한 외길 인생’이 담겨 있다.

1970년대 미국 오페라단 주인공 활약, 해외 언론 극찬

1938년 출생이니 올해 76세이고 지난해 데뷔 50주년 기념공연을 한 이 원로 테너는 요새도 매년 50~60회 이상 국내외 공연을 소화할 정도로 아직 ‘쌩쌩’하다.

박 교수는 “사람과 건강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40대에도 목소리가 쇠퇴할 수 있다”며 “계속 했다는 데 의미가 있고 발성법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17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유행했던 벨칸토 발성을 익힌 덕분이다. 이를 위해 박 교수는 해외 도서관의 성악 서적들을 보며 발성법을 정리하는가 하면 당시에 태어난 성악가들의 녹음을 들으면서 발성법을 연구했다.

“아무래도 사람이니 젊을 때보다 목소리가 약간 굵어진 느낌은 있어요. 그래도 발성법을 잘 훈련해서 고음도 다 나오고, 어떤 면에서는 소리가 좀 더 깊어지고 힘이 세진 느낌이 있어요. 흔들리는 것도 없고요.”

대중가요를 통해 국민적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사실 박인수 교수는 해외에서 더 유명했던 실력파 성악가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후 1970년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에 초청받다시피 가서 뉴욕 버펄로극장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 공연하고 그곳에 자리 잡아 음대에서 공부했다.

당시 서양 오페라에서 아시아인 남자가 주인공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들어간 학교는 지금도 어렵다는 줄리어드 음대 마스터클래스였고, 오디션에서 그를 발탁한 교수가 그 유명한 마리아 칼라스다.

그후 13년 동안 박 교수는 미국을 근거지로 해서 100회 이상의 공연을 하며 프로 성악가로서 활약했다. 당시 현지 언론에서 ‘박인수는 훌륭한 음질과 영웅적인 폭을 가진 테너다’(뉴욕타임스. 1972)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50인의 목소리를 가진 신, 스텐토리안 보이스!’(토론토 스타. 1978) 라고 극찬했으니 어찌 보면 원조 한류스타라고 할 수도 있겠다.

클래식-대중음악-민요의 가교 역할

“KBS에서 녹음한 노래 테이프를 지인이 미국으로 가져가 버펄로 심포니오케스트라 교수에게 들려줬어요. 그 교수가 노래를 듣고 저를 초청한 것이죠.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의 ‘그대의 찬 손’ 등이 담겨 있었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버펄로의 오페라에 출연했고 더 있으면서 공부하라 해서 눌러앉았죠. 그게 1970년인데 주변에선 서양오페라단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동양인을 시킨 전례가 없다면서 많이 말렸어요.

그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성악가는 소리에 대한 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에요. 그 후 83년에 귀국할 때까지 13년 동안 수백회 정도 공연한 것 같아요.”

서울대와 백석대에서 30년 동안 후학을 기르고 있는 박인수 교수. 많은 것을 이룬 그가 이토록 현역으로 공연을 활발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 교수는 “국악 즉 판소리와 서양 성악의 접목에 지난 30여 년 간 노력하고 있다”며 “처음에는 외국에서 우리 가곡을 섞어 부르면서 나름 자부심을 느꼈는데 1978년 한 공연에서 외국인이 ‘가곡도 결국 서양음악이 아니냐’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 고유의 음악인 민요나 판소리의 깊은 맛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대로 하면 서양인에게 어필이 안 돼요. 쉰 목소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죠.

그래서 서양의 맑은 발성으로 오리지널 판소리와 민요를 하면 어떻겠나 생각했고, 그게 1978년부터 30년 넘게 하게 된 것이에요. 호응이 굉장했습니다. 유럽 대도시 순회공연도 하고, 미국에서는 해마다 하고 있어요. 올해도 7월 LA 공연이 예정돼 있습니다.

판소리하시는 분들도 많이 힘을 보태주시고 있어요. 판소리 창법을 배워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돌아가신 박동진 명창이 판소리는 우리가 할 테니 당신은 서양 발성으로 그대로 하라고 해서 지금까지 왔어요.”

박인수 교수가 항상 정상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50대 후반에 갑자기 그 좋던 고음을 잃어서 주변에서 은퇴 권유를 받기도 했고 서울대 재학 중인 1967년 국립오페라단 공연 <마탄의 사수>에 주인공 막스로 전격 발탁돼 나섰으나 실패해 음악을 때려치운 경험도 있다. 이때 생계 때문에 포장마차를 차려서 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를 곧추세운 건 바로 음악과 소리에 대한 열정이었다.

“목소리를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은퇴할까 생각했죠. 하지만 그때 포기하지 않고 벨칸토 발성을 연구한 것이나, 음악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도 다시 돌아온 건 모두 소리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어요.”

‘향수’로 오페라 잃었지만 …

국내에서 한창 활동하던 1989년 대중가수 이동원 씨와 가요 ‘향수’를 발표하면서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시의 가사가 좋고, 김희갑 씨의 작곡한 곡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동원 씨의 듀엣 음반 취입 제의를 덥석 수락했다는 게 박인수 교수의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생각과 달랐다.

지금 상황에서는 다소 생소한 이야기지만 당시만 해도 성악과 대중음악의 차이는 더 컸다. 일부 성악계 인사들이 그가 이동원 씨와 방송에 나와 공연한 것을 문제 삼아 결국 국립오페라단에서 퇴단되는 불운을 겪었다.

대중가수와 가요 음반을 낸 그를 고깝게 여긴 것이다. 게다가 박 교수의 퇴단을 주도한 건 다름 아닌 그와 가깝던, 이전까지 친구로 알던 지인들이었다.

“서울올림픽 다음해였는데도 음악계 분위기가 좀 엄숙했던 것 같아요. 성악은 이래야 하고, 대중가요는 어떻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컸던 것이죠.

융통성이 없었고, 자유로움이 없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안 좋은 일을 겪고 인간적인 배신감도 있었지만, 이후 대중들이 클래식이나 성악에 호감을 느끼고 활성화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클래식이 딱딱한 것만은 아니다 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그리고 지금은 성악과 대중음악의 벽이 많이 없어졌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 덕분에 박인수 교수는 엄정행 교수와 더불어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테너가 됐다.

공연 횟수가 1년 200회를 넘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와서 노래를 불러 달라는 초청이 쇄도했다. 그리고 정통 오페라단과는 일정 거리를 두게 됐다. 전문 오페라 가수에서 좀 더 대중과 ‘우리 소리’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대중 속으로 가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음악회를 했는데, 깨달은 것은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현장에서 내 노래를 듣고는 클래식음악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다는 사실이었다.

클래식 발성이 갖는 매력과 아름다움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심금을 울린 가사가 그들의 마음속에 파고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 내가 만난 수많은 주부들과 노동자와 농민, … 그들은 내 노래에 때로는 환호했고 때로는 눈물을 흘렸다.(103페이지)

박인수 교수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클래식과 대중음악, 그리고 전통음악의 접목과 크로스오버에 상징적인 인물이 됐다. 많은 공연에서 ‘박연폭포’ ‘진도 아리랑’ 등의 민요와 ‘향수’ ‘그리운 금강산’ 등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를 함으로써 성악을 대중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도록 했다. 그 때문인지 최근에는 가수 하춘화 씨가 찾아와 그에게서 성악 발성을 배우고 있기도 하다.

음악사에서 볼 때 고전음악도 불과 1,2백 년 전만해도 대중의 것이었다. 특히 오페라는 철저히 대중적이었다. … 지금의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이었고 오페라 가수가 대중가수였다. … 대중들은 순수음악이든 대중음악이든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방법이나 유형에 앞서서 음악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106~107페이지)

정재욱 기자 jujung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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