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으로 규정된 세계
‘땅’으로 규정된 세계
  • 미래한국
  • 승인 2013.06.07 15: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강호의 명화산책: ‘펄 벅’의 <대지(大地)>
 

박경리의 <토지>, 평자에 따라선 해방 이후 한국 최고의 문학적 성취로 꼽기도 한다.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중국판 토지라 할 만한 소설이 있다. 펄 벅(Pearl S. Buck, 1892~1973)의 <대지(大地)>다.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작자는 중국인은 아니다. 미국인이다. 소설의 영어 원제는 <The Good Earth>다.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한 미국인 선교사의 딸로 태어났다.

미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20살 성년이 될 때까지 줄곧 중국에서 자랐다. 그녀의 부모가 펄이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함께 다시 중국으로 들어간 덕분이었다. 국적은 미국이었으나 고향은 중국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녀의 문화적 근본 뿌리는 서양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인 남편을 만나 Buck이라는 성을 얻었다. 하지만 ‘중국 이야기’를 쓸 수 있을 만큼의 배경은 있었다 하겠다.

대지는 1931년에 발표됐다. 이후 이어져 나온 <아들들>(1933년) <분열한 집> (1934년)과 함께 전체 3부작을 이룬다. 이중 첫 번째 작품이 1937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감독에서부터 출연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양인’들이었다. 하지만 그 점을 잠시 잊게 할 만큼 매우 ‘성실하게’ 중국을 보여주고 있다.

펄 벅의 대지는 발표 당시 대단한 선풍을 일으켜 퓰리처상도 타고 세계 각국어로 번역도 됐다. 그리고 영화화된 이듬해인 1938년 마침내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하게 됐다.

물론 대지에 대한 오늘날의 문학적 평가는 당시의 성과만큼 높지는 않다. 사실 냉정히 볼 때 문학적 성취는 박경리의 토지가 더 위라고 해도 결코 실례는 아닐 것이다.

대지에서 유장한 문장이나 심오한 사상을 읽어내려 한다면 기대가 좀 빗나가게 된다. 평범하고, 대중적인 만큼 상투적이다. 그러나 대지라는 작품은 문학적 평가가 어떻든 놓쳐서는 안 되는 가치를 갖고 있다.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든 중국의 중국다운 특징을 포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작품 제목 대지 그대로 ‘땅’의 의미에 대한 것이다.

소설 대지 3부작은 중국 근현대사의 최대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다. 평범한 전형적인 중국의 빈농 왕룽에서부터 시작해 그 아들대의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왕룽은 곡절 끝에 지주이자 큰 부자가 되지만 그의 사후 아들들은 지주, 상인, 공산주의자 각각으로 분열된다. 왕룽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의 곡절을 보여주고 있다.

대지는 표면적으로는 왕룽 집안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어떤 점에선 제목 그대로 ‘대지’ 자체가 주인공일 수 있다. 왕룽의 아내 오란은 ‘대지의 여인’이다. 펄 벅은 오란을 ‘대지의 미덕’을 구현하고 있는 존재로 그려내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대지’의 존재감을 확정한다.

소설 대지의 알파요 오메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땅’ 자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위에서 갈등하고 명멸할 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중국’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중국문명의 처음과 끝은 ‘땅’이다. 중국적 특징은 바로 ‘땅’ 위에 서 있다. 좋든 싫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러하다.

그런데 ‘땅’에 의해 규정되는 세계, ‘대지’에 긴박돼 있는 삶이 오늘날에도 보편일 수는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이미 중국 자신부터가 그렇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산업의 시대, 상업의 시대는 확실히 대지의 시대가 아니라 그것을 종횡하는 길의 시대다. 대지 같은 작품을 다시 영화화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강호 편집위원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