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왜 친구 황용주를 버렸나
박정희는 왜 친구 황용주를 버렸나
  • 미래한국
  • 승인 2013.06.28 20: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리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안경환 著, 까치 刊, 2013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접하게 된 황용주라는 사람은 내겐 참 오랫동안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5·16을 모의하던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 앞에 홀연히 나타난 대구사범 동기이자 부산일보 주필, 박정희와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함께 세상을 뒤집어엎을 궁리를 했던 사람, 박정희 장군이 정권을 잡은 후에 조선시대 같으면 ‘1등공신’으로 봉해져야 마땅했을 사람, 하지만 MBC-부산일보 사장을 잠깐 맡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정에 선 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린 사람….

도대체 황용주는 어떤 사람일까? 왜 그는 그렇게 일찍 친구 박정희의 곁에서 퇴장당해야 했을까? 늘 궁금했다. 황용주와 동향(밀양)인 인연으로 말년의 황용주와 가까이 지냈던 저자는 이 책에서 황용주가 평생 써온 일기, 황용주 및 그의 가족들과의 대화 등을 바탕으로 녹록지 않은 그의 삶을 풀어낸다.

‘학병세대’와 4·19세대

이 책에 나타난 황용주는 ‘학병세대’ 지식인의 전형이다.

일제 말에 성인(成人)이 됐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물을 먹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족운동이나 사회변혁의 방편으로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져본 일이 있는 세대, 그러나 자신의 인생과 민족의 장래에 대해 한창 고민해야 할 나이에 일제의 병정으로 끌려갔던 세대, 해방공간의 혼란과 6·25의 참화 속에서 건국과 호국에 일익을 담당한 세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어떻게 하면 지지리도 가난한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울까를 고민하면서 나세르의 이집트와 아유브 칸의 파키스탄, 네윈의 버마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던 세대, 그러나 조카뻘 되는 4·19세대로부터 일제와 독재에 항거하지 못한 비겁한 기성세대로 낙인찍힌 세대…

이들 ‘학병세대’를 향해 안경환 교수는 무척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책의 상당 부분을 ‘학병세대’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할애한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글을 쓰는 지난 수년 동안 나는 새삼 나의 세대의 무지와 후속세대의 경박한 오만에 절망하곤 했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고뇌하고, 만들어가면서 분노하고 좌절하던 고인의 세대, 그 세대 지식인들이 입었던 상처에 따뜻한 위로와 깊은 경의를 표한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성공한 역사다. 그 성공한 역사에 이분들의 열정과 좌절, 환희와 분노가 밑거름이 되었다.”

4·19세대의 ‘학병세대’에 대한 불신과 비토에 대한 대목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먹먹했다. ‘해방 후 세대’, ‘한글세대’임을 자부하는 4·19세대의 눈에 ‘기성세대’인 ‘학병세대’의 아픔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과오만 눈에 들어왔다.

일제 말 학병에 끌려간 것은 친일이었고,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고 6·25 때 나라를 지킨 것은 이승만 정권에 협력한 것이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대생들의 선언문 속에는 “우리는 기성세대를 불신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그리고 4·19의 성공은 그들의 자기 정당화의 근거가 됐다. 4·19세대가 ‘학병세대’를 부인한 것은 이후 뒷세대가 앞세대를 부인하는 시초가 됐다.

‘학병세대’의 고민은 근대화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는 같은 학병세대인 장준하가 <사상계>를 통해 제3세계의 군사혁명을 열심히 소개하고 5·16 직후 <사상계> 권두언을 통해 군사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데서도 드러난다. 황용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용주는 박정희의 민족관의 뿌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용주 자신이 프랑스어로 민족의 대외적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믿었듯이, 박정희는 총칼로 나라를 바로잡아야겠다는 결의를 다진 것이다. 이러한 사명감의 원천은 ‘결핍에 대한 한’이었다. 뼛속 깊이 뿌리 내린 결핍에 대한 한이 민족의 중흥을 꿈꾸는 이상가로 만들었다.

이 이상의 명령과 지휘에 따라 총칼로 혁명을 감행한 것이다. 박정희의 거사는 단순한 권력 찬탈이 목적이 아니라 권력을 장악한 후에 실현할 구체적인 이상과 계획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5·16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라 민족주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박정희와 황용주, 가깝고도 먼…

안경환 교수가 보는 부산일보 주필 시절의 황용주는 군사혁명을 꿈꾸는 박정희에게 ‘민족적 민주주의’의 이념을 제공한 ‘혁명의 이데올로그’였다.

황용주는 <세대>지 필화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내침을 당한 후에도 그 자부심으로 평생을 살면서, 박정희를 추억했다. 죽음을 앞둔 순간 그가 “아, 정희야! 아, 난서야!”라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짠해진다.

하지만 황용주에 대한 저자의 애틋한 이해는 박정희에 대한 온전한 이해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이는 저자가 박정희 시대를 ‘전체주의 시대’로 규정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법대 교수가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나?

어쩌면 저자는 한때 ‘마르크스 보이’였고, 평생 부강하고 통일된 한반도를 꿈꿨던 동향 출신의 좌절한 ‘근대화 지식인’ 황용주는 이해했을지 몰라도, 그 황용주의 ‘정신적 배우자’ 였던 박정희는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황용주 자신도 박정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안경환 교수는 황용주가 <세대>지 사건 이후 무대에서 퇴장당한 이유를, 박정희의 절친인 황용주에 대한 권력 내부(이후락, 김종필 등)의 견제, 박정희 정권 내부의 좌경분자에 대한 미국의 견제에서 찾는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두 가지 정도를 안경환 교수는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황용주에게 박정희는 ‘전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황용주는 ‘one of them’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황용주는 박정희가 이미 갖고 있던 근대화혁명에 대한 확신을 더해 주는 역할을 했을지 몰라도, 그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황용주에게는 안 된 얘기지만, 그는 박정희가 혁명 과정에서 만나고 동원했던 수많은 인적 자원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박정희로서는 그 효용이 다하거나, 정권에 부담이 됐을 때(<세대>지에 기고한 황용주의 글을 용공으로 몰아 정치공세를 편 것은 당시 보수야당이었던 민정당과 삼민회였다!), 황용주는 버릴 수 있는 카드였던 셈이다.

다른 하나는 박정희와 황용주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인식의 차이었다. 황용주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나 시민이 아니라 ‘한반도의 주민’임을 자처했던 사람이었다. 근대화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통일이 되기 전까지 한반도에 존재하는 나라는 온전한 나라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군수기지사령관 시절의 박정희와의 술자리에서 “통일의 유일한 방법은 군인들이 궐기하여 정권을 잡고, 즉시 북쪽의 김일성을 판문점으로 불러 당장 휴전선을 틔워 한 나라를 만들어버리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고(思考)방식은 김일성과 경쟁하면서 ‘네이션빌딩’ ‘스테이트빌딩’을 해야 했던 ‘군인-대통령’ 박정희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으리라. 박정희가 황용주를 버린 진정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