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우리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
8월 15일 우리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
  • 이원우
  • 승인 2013.08.1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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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著, 기파랑 刊, 2013

‘역사(歷史)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건국 65년을 맞은 대한민국에서 역사란 종종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싸움’이 되곤 한다.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아가 대한민국 자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개진할 뿐 양보는 없다. 이 나라에는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운 국가’로 보는 사람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나라’로 보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새 정부 수립 후 올해 초 진행된 인사청문회는 과거의 역사 논란이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지를 보여준 격전장이었다.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인사들은 보직과 직책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5·16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답해야만 했다.

여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코멘트를 할라치면 정치인과 언론,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로부터 십자포화가 날아들었다. 진땀을 흘리며 그들의 주장을 기계적으로나마 반영해주지 않으면 단번에 ‘몰상식한 인간’이 돼버리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역사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논란을 최전선에서 감당해 온 인물이다. 2006년 고등학생용 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 심포지엄 현장에서 이영훈 교수를 포함한 학자들이 4·19 관련 단체들로부터 폭행을 당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종군위안부를 자발적 성매매로 규정한 인물’이라는 날조 또한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괴롭혀 왔다.

최근엔 경기도 공무원 대상의 역사교과서 ‘경기도 현대사’를 집필한 사실이 새로운 논란을 파생시켰다. 경기도청이 기존 교과서의 이념 편향성을 지적하며 독자 발간한 이 교재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고 있다”며 경기도의회와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을 샀다.

해방부터 6·10민주화운동까지의 집대성

지난 7월 15일 발간된 이영훈 교수의 신간 <대한민국 역사>는 ‘경기도 현대사’ 집필 과정에서 추진된 연구를 계승한다.

“이순신-김유신 장군에 대한 책은 있어도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주는 책은 없었다”는 이영훈 교수의 문제 의식과 “대한민국을 누가 세웠느냐는 질문에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답변을 하는 경기도 공무원이 10%도 되지 않는다”는 김문수 도지사의 의뢰가 결합돼 탄생한 책이다.

총 일곱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이영훈 교수의 전공인 경제사 뿐 아니라 정치사와 사회사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주체를 국가나 민족이 아닌 ‘개인’으로 보려 애쓰면서 해방부터 6·25전쟁, 이승만의 나라 만들기, 고도경제성장, 6·10민주화운동까지 대한민국의 굵직한 역사들을 하나하나 다루고 있다.

“다른 나라와 축구시합을 할 때 제 나라를 응원하는 것은 애국심이라기보다 민족감정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 민족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가 세대 간에 자연스럽게 물리고 계승하는 집단적 감성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이성의 영역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은 역시 이승만이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던 건국 초기 ‘이승만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의도와 이후 북한에서 벌어진 정치적 변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면서도 이승만은 대한민국에 처음부터 온전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애썼다. 흔히 1986년 6·10민주항쟁의 성과였다고 기억되는 대통령직선제의 ‘원작자’가 이승만 대통령이었음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많은 교육자들이 학생들에게 ‘분단의 시작점’으로 암기하도록 가르치는 1946년 정읍 발언(“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의 맥락을 밝히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주요 포인트다.

이승만이 남한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를 언급했을 당시 이미 북한에서는 훨씬 체계적인 형태로 임시정부가 소련의 지원 하에 성립돼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책은 이처럼 우리가 사건 중심으로 인식하고 있는 근현대사의 ‘맥락’을 짚어 주고 있다.

“그(이승만)에게서 공산주의와의 협상은 집에 불을 지르는 사람과 타협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에게서 좌우 합작은 처음부터 될 일이 아니었다.”

상처뿐인 영광? 상처를 딛고 이룩한 영광!

그렇다고 해서 비판론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승만 대통령을 포함한 위정자들을 ‘미화’하는 책은 아니다. 이영훈 교수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실정과 한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논란이 됐던 제주4·3사건에 대해서도 이 책은 지금까지의 어느 교과서나 예술작품보다 공감이 가는 서술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는 ‘해방 후 좌익세력에 의해 장악된 제주도의 공산주의세력이 대한민국 건국에 저항하여 일으킨 무장반란’임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일어난 경찰 당국과 서북청년회의 잔혹행위가 제주도 주민으로 하여금 무장반란에 협조하도록 만든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을 함께 강조한다.

“제주4·3사건은 자유 이념의 전통을 결여한 고립된 지역에 반공 이념의 국가권력이 들어설 때 얼마나 폭력적인 반(反)인권의 비극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역설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단어는 ‘상처’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 과정에 수많은 상처가 존재했다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숱하게 목격한 많은 역사책은 이 상처들을 1차원적으로 서술하고 끝났던 게 보통이다. 일면 객관적인 듯한 이 관점은 과거의 상처가 어떻게 현재의 번영으로 이어졌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대화’로서의 역사는 아니다.

‘대한민국 역사’는 건국 이후 새겨진 수많은 상처가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돼 왔는지를 밝히며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과거와의 대화를 할 여지를 열어둔다. 건국일의 의미가 거의 사라져버린 8월 15일, 우리가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책으로 이 책을 꼽을 수 있는 이유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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