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센트의 기적,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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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3.08.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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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한은희 청년교육봉사단체 ‘누리알찬’ 기획홍보팀


하와이와 독립운동. 이들을 연관해 손쉽게 한 번에 떠올릴 수 있는 이는, 아마도 미미하게 언급되고 평가돼 버리고 마는 국외 독립운동사(史)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민족의 독립운동은 국내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일제의 국권강탈과 식민지 정책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데 한계가 많았다. 일제의 직접통치와 탄압, 기아와 빈곤 등 때문이다. 국외의 독립운동은 조금이나마 가능했기에 수십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은 해외 이주를 했다.

우리가 대부분 인식하고 있는 국외의 독립운동지는 대표적으로 만주지역과 중국 관내의 상하이나 베이징 정도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탓에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에 비해 이역만리 하와이 땅에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독립운동에 힘썼던 것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이번 하와이 탐방은 우리 국외 독립사에 있어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의 시작점으로서 그 흔적과 의미를 되새겨 볼 기회가 됐다.

1세기 전 미주 한인들은 고된 뱃길을 통해 하와이에 도착했다. 문화도 사람도 낯선 먼 곳에서 이들은 빅 아일랜드의 억센 사탕수수 밭에서 고된 하루 노동 후에 받은 25센트라는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독립운동 자금과 이민자들의 학교, 교회 설립을 위해 기부했다. 이렇게 고국의 해방을 위해 애쓴 것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하와이 이민자들의 흔적은 지금 빅 아일랜드의 ‘알라이 공동묘지’ 정도에서 중국인, 일본인 묘지석들과 함께 흐릿해진 비석의 이름으로만 있을 뿐이다. 이 외에도 인천 하와이 공원과 빅 아일랜드의 초대 한인 정착지 등 하와이 이민자들의 삶을 둘러봤지만 미국의 행정처리상 대부분 사라져 버린 그 터들을 보며 독립운동의 흔적과 의미를 되새겨 볼 수밖에 없었다.

하와이 독립운동사에서 언급되지 않을 수 없는 우남 이승만. 그는 한국인 이주 노동자를 위한 교육과 그들의 정치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기반을 설립했다.

특히 교육과 종교를 통한 조국 독립을 믿었던 이승만은 한인중앙학교를 비롯 ‘코리아 디아스포라’를 내세워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했다. 교육과 기독교를 통해 하와이 이주민들의 결속과 정체성 확립에 힘썼던 것이다. 이승만은 당장의 독립뿐만 아니라 독립된 조국의 광영을 위한 기반을 닦아 준비했던 것 같다.

이런 독립운동의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사적지들은 어떠한 표지판도 없이 현재 방치되거나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탐방단이 태평양잡지 발행소 터를 방문했을 때에는 낯선 동양인 관광객의 방문을 경계하는 민가 주민에게 항의를 받기도 했다.

서영길 하와이 총영사는 독립사적지에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하와이 주민들을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고국의 관심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짧지 않은 5박 7일의 하와이 일정에서 기억나는 것을 꼽으라면 민가 주민의 항의를 받았을 때다. 그 당시에는 당황스러움이 컸지만 숙소에 와서부터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조차 마음이 불편해 귀국 후 하와이 탐방 일정을 되짚어봤다.

독립운동에 순위를 매길 수는 없다. 한쪽에 치우친 역사평가는 서글퍼질 정도다. 미주 독립운동의 발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하와이 독립운동과 이승만의 재평가와 유적지를 잘 보존해 후에라도 많은 관광객들이 우리의 독립운동 탐방을 하러 가서 항의를 받고 얼굴이 화끈해지는 경험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은희
청년교육봉사단체 ‘누리알찬’ 기획홍보팀·숙대 정외과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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