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전쟁으로 비화되는 교과서 전쟁
정치전쟁으로 비화되는 교과서 전쟁
  • 이원우
  • 승인 2013.10.04 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9월 11일 원로학자 16인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정원식 前 국무총리, 김정배 前 고려대 총장, 이성무 前 국사편찬위원장, 권이혁 前 보건복지부 장관,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김영한 서강대 명예교수 등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정쟁 중단을 촉구했다.

함께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이들은 “역사교과서가 정쟁의 도구가 되고 있는 이 사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며 “(교학사) 교과서의 내용이 공개되기 전부터 교과서를 매도하고, 집필진에 대한 표적 감사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교사와 학부모들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말고 냉정하게 각 교과서를 비교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논쟁은 학계를 넘어서 정치권으로까지 옮겨 붙었다. 역사 공부 모임인 ‘새누리당 근현대 역사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25일 모임에서 “우리 학생들이 배우던 7종의 교과서가 다 현대사 부분에 있어 부정적 사관에 의한 교과서였는데, 교학사에서 긍정적 사관에 의한 교과서를 발행하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했다.

학계 논쟁 정치권으로까지 번져

이 발언은 큰 파문을 몰고 왔다. 민주당은 김무성 의원에 대해 “일본 극우파와 꼭 닮은 역사관을 드러냈다. 친일파임을 커밍아웃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대해 박재갑 새누리당 수석부대변인은 “테러 협박에 시달리는 교학사에 대해 (김무성 의원이)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한 것을 민주당이 꼬투리잡고 나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부대변인은 “민주당의 논리대로라면 종북세력으로 의심받는 통합진보당과 총선에서 연대했던 민주당은 종북으로 의심해도 괜찮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 역시 페이스북을 통해 “종북은 실체라도 있지만 일제시대도 아닌 지금 친일은 실체도 없습니다. 그래서 종북매카시즘보다 친일매카시즘이 훨씬 질이 나쁜 겁니다”라고 밝혔다.

민주당 의원들의 반발은 멎지 않았다. ‘역사교과서 친일독재 미화왜곡 대책위원회’를 결성한 민주당 의원들은 27일 청와대를 항의 방문했다.

대책위원장인 유기홍 의원을 비롯해 김상희 김윤덕 김태년 도종환 박홍근 박혜자 배재정 안민석 우원식 유은혜 정세균 윤관석 이용섭 인재근 이종걸 설훈 의원 등은 이날 오전 10시께 청와대를 찾아 교학사 역사교과서 검정취소를 요구하는 항의 서신을 전달했다.

‘백년전쟁’ 동영상으로 ‘이승만·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던 민족문제연구소가 교학사 교과서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은 신임 국사편찬위원장 내정 문제로까지 옮겨 붙는 모양새로 확대되고 있다. 길게 보면 지난 2008년 있었던 보수단체들의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 좌편향’ 문제 지적이 진영을 바꿔 재현된 것이기도 하다.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 내정’ 공격

27일 청와대를 방문한 민주당 의원들이 요구한 것은 교학사 교과서 검정 취소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최근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내정된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에 대한 ‘내정 철회’를 함께 요구했다.

야권이 유영익 교수를 공격하는 지점은 주로 ‘이승만 옹호’에 집중돼 있다. 김태년 민주당 의원은 지난 26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서종빈입니다’에 출연해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 내정자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미화하고 비호한 책임이 있다”, “그가 펴낸 역사교과서를 보면 왜곡도 왜곡이지만 포털사이트에서 내용을 그냥 긁어와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그를 내정한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 인식이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배재정 민주당 의원 역시 유영익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해 일제 식민치하를 설명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근거로 든 책은 유 교수가 1992년 저술한 ‘한국근대현사론’으로 “35년간의 일제식민통치는 장기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이 여러모로 한국의 정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는 등의 내용이 언급됐다. 유영익 교수는 대표적인 ‘식민지근대화 비판론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독재자 이승만을 찬양했다’는 비난 또한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유 교수가 최근간인 ‘건국대통령 이승만’ 214~5쪽에서 기독교를 통해 대한민국을 안정시킨 이승만의 업적을 고구려의 소수림왕,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등과 견줘 서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 교수가 이 책에서 일방적으로 이승만을 예찬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음은 같은 책의 147쪽 내용이다.

“이른바 4·19 세대에 속하는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12년에 걸친 장기 집권에서 적지 않게 실정을 저질렀음을 인정한다. 예컨대 건국 초에 친일파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환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서울 시민보다 먼저 수도를 빠져나가면서 중앙방송으로 그릇된 전황 방송을 하도록 방치하고 또 예고 없이 한강교를 폭파함으로써 수많은 인명 피해를 발생시킨 것도 국가 최고 통치자로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또한 전쟁 중에 발생한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 등 일련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과 군의 비리 문제에도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1954년에 사사오입이라는 억지 논리로써 개헌을 강행하고 그 뒤 자유당과 경찰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묵과한 점 역시 용서받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집권 말기에 이승만과 자유당이 반공의 명분하에 조봉암과 진보당에 가한 가혹한 탄압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에 필자는 의문을 갖고 있다. 이 밖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에 흠잡을 점이 더 있을 것이다.”

유영익 교수는 애초에 이승만을 비판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가 과(過)보다 공(功)이 더 크다는 점을 깨닫고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간되지도 않은 교과서 한 권에서 시작된 역사논쟁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연구해온 노 교수의 업적을 폄훼하는 방향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