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허명(虛名)과 진가(眞價) 사이에서
케네디, 허명(虛名)과 진가(眞價) 사이에서
  • 미래한국
  • 승인 2013.11.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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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96세다. 살아 있다면 말이다. 많은 나이지만 장수시대인 만큼, 잘 하면 아직 생존해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년이라는 단어를 맛조차 보지 않은 채 갔다. 케네디 얘기다.

오는 11월 22일이면 그가 사망한 지 50년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젊었다.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나이가 43세였는데 3년도 안 돼 46세의 나이로 명을 달리했다. 암살당했다.

신화, 그러나…

미망인으로 남겨진 그의 아내 재클린의 나이는 불과 34세! 요즘 한국의 사회적 연령으로 보자면 더더욱 그냥 젊은 언니다. 아들 케네디 주니어의 나이는 4살! 아직은 죽음이 뭔지 알기에는 너무 어린 꼬꼬마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운구차가 지나가자 거수경례를 붙였다. 주니어의 누나도 겨우 6살!

젊은 미망인은 어린 딸과 아들을 양손에 잡고 서서 장례식을 지켰다. 재클린은 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미국 국민들은 모두 울었다.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살아생전에는 마치 동화의 주인공 같았던 인물은 그렇게 신화 속으로 들어갔다.

케네디! 미국의 리버럴(Liberal)들에게 그 이름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함께 그 이념을 대표하는 양대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딜을 선도하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루즈벨트의 이미지가 ‘극복’이라면 케네디는 ‘전진’이라는 진보적 이념의 체현자였다. 캐치프레이즈 ‘뉴프런티어’는 꽤 적절했다. ‘새로운 개척자 정신’은 진보와 개혁이라는 이상에 매우 잘 어울렸다. 물론 리버럴의 입장에서였다.

확실히 1960년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리버럴의 시대였다. 더욱이 케네디는 젊고 잘생긴데다 ‘스펙’까지 흠잡을 데 없었다. 거기에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아내를 동반하고 있어 마치 연예인처럼 대중적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반대편이 없을 수는 없었다. 비판적 시선은 만만치도 않았다.

케네디는 닉슨과 맞붙어 겨우 이겼었다. 뿐만 아니라 일부의 증언에 따르면 케네디의 승리에는 부정선거 혐의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닉슨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미국을 위하여’ 그대로 넘어갔다.

게다가 케네디는 대통령으로서의 직무 수행도 좋은 이미지만큼 훌륭했던 건 아니었다. 사실 업적을 논하기엔 그의 기간은 너무 짧았다. 그의 신화는 업적 자체보다는 갑작스런 비극적 죽음으로 인한 극적 효과에 힘입은 바 컸다.

쿠바 피그스만 침공 작전 실패의 전말은 서툴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극복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지적된다.

첫째 미국은 소련의 요구에 따라 결국 터키에서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했다. 둘째 쿠바에서 소련과 군사동맹을 맺은 공산정권이 유지되도록 묵인했다. 특히 두 번째 타협의 대가는 컸다. 남미 일대에 좌익혁명운동 확산을 부추기게 된 것이다.

베트남 대책도 문제가 있었다. 좌파 리버럴들은 케네디가 베트남에 개입하는 데 반대했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케네디는 1961년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의 힘을 확실히 보여주는 문제만 남았습니다. 적당한 장소는 베트남이 될 것 같군요.” (폴 존슨 著 ‘모던 타임스’)

젊음? 미숙함이 컸다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겠는데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의 실제 베트남 정책은 어정쩡했다. 단호한 조치는 취하지 않으면서 쓸모없는 지원만 대폭 확대했다. 덕분에 기대했던 화려한 성과는 없으면서도 미국의 부담만 가중되기 시작했다.

케네디 정부의 이런 한계는 어느 정도는 예견된 것이었다. 케네디 행정부는 좋게 말하면 젊음이 넘쳐났지만 나쁘게 보자면 경륜 없는 미숙함이 가득 차 있었다. 케네디가 당선되자 동부 아이비리그 출신의 ‘젊은 인재’들이 대거 워싱턴으로 몰려들었다.

케네디 자신이 그러했듯이 좋은 집안에다 명문대 출신인 덕분에 고생하며 생활비를 벌어본 경험은 거의 없는 ‘도련님’들이 많았다. 베트남전이 미국의 패배로 귀결되는데 적잖은 책임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맥나마라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하버드 MBA 출신으로 포드 자동차 사장이었던 인물이다. 케네디는 그를 국방장관으로 뽑았다. 회사경영과 외교안보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대중과 속류언론들은 분위기와 이미지에 휩쓸려 케네디의 백악관을 마치 캐멀롯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전설이었을 뿐, 케네디는 아더 왕이 아니었고 그의 막료들도 원탁의 기사들은 아니었다.

케네디가 죽지 않았다면?

만약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경험이 쌓이면서 자질만큼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을까? 열광적 지지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믿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헤아려 본다면 그런 식으로 아쉬워하기는 어렵다. 케네디를 승계한 존슨의 정책을 평가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은 케네디 시절의 국내 사회정책을 큰 줄기에선 그대로 이은 것이었다. 민권의 증진, 빈곤퇴치와 복지의 확대 등은 당시 민주당 리버럴 전반의 기본 입장이었다. 리버럴들은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큰 정부’는 당연시 하고 있었으며 그 점에선 케네디도 존슨도 전혀 차이가 없었다.

큰 정부는 곧 큰 비용을 뜻했다. 그러나 당시는 1950년대 아이젠하워 시대까지의 번영의 절정에 여전히 젖어 있던 시절이었다. 경제적 자원은 무한하니 이제 사회를 리버럴적 이상에 맞춰 끌어올리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존슨은 그 일반적인 시대 조류에 맞춰 ‘위대한 사회’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위대하지 않았다.

흑인인권 등 민권의 증진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는데도 거리는 오히려 폭동이 휩쓸었다. 빈곤퇴치와 복지증진을 위한 프로그램도 재정부담은 가중시키면서도 성과는 미미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과도한 우상화는 퇴폐의 확산을 가져오며 사회의 건강성을 잠식했다. 케네디 시대였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케네디의 역사적 진가, 자유의 전사

케네디의 진짜 평가할 만한 점은 좌파 리버럴적 통념과는 다른 데 있다. 그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자유의 수호와 번영을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치를 것이고, 어떤 짐도 짊어질 것이며, 어떤 고난도 받아들이고 어떤 우방도 지원할 것이며 어떤 적과도 싸울 것이다.”

매우 파격적인 천명이었다. 냉전이 격화되던 시절이었다. 케네디는 그 시대의 한복판에서 마치 후대의 네오콘을 연상케 하는 도발적인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西베를린을 방문해서도 그런 진면목을 보여줬다. 시민들의 5/6가 쏟아져 나와 운집한 현장에서 그는 외쳤다. “모든 자유인은 그들이 어디에 있건 베를린 시민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저 또한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냉전의 현장 한 가운데서 자유진영의 수호를 위해 공산진영과 맞서 싸울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마치 레이건의 데자뷰(기시감)를 느끼게 한다고 하면 과장된 감상인가? 그러나 케네디를 아무리 평가절하한다 해도 적어도 그의 이런 자유의 전사와 같은 면모만큼은 이후 역사의 전개에 비춰 전혀 손색이 없다. 특히 아직 ‘역사를 마무리 짓지 못한’ 우리의 입장에선 더 그렇다.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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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복 2013-11-25 13:00:26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