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 사건을 말한다
부림 사건을 말한다
  • 이원우
  • 승인 2013.12.13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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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인권적 고문은 슬픈 일이지만 용공조작은 아니다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1982)

지난 11월 18일 국내 최고의 영화배우로 꼽히는 송강호의 신작영화 ‘변호인’이 예고편을 공개했다. 이 작품이 故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조명한다는 건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이날 공개된 2차 예고편은 더 뜨거운 관심을 자아냈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부림 사건’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포털 네이버 검색창에 ‘부림 사건’을 기입하면 가장 윗줄에 보이는 것은 두산백과의 정의다. “1981년 제5공화국 군사독재 정권이 집권 초기에 통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일으킨 부산지역 사상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이다. ‘부산의 학림(學林) 사건’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그때의 일을 기억하기는커녕 태어나지도 않았던 인터넷 세대에게 부림은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81년의 부산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부림은 정말로 용공조작 사건이었을까? 부림 사건의 맥락과 본질을 해부한다. 이 기사의 취재에는 80년대 당시 운동권에서 맹활약했던 복수의 인사들이 도움을 줬다.

두산백과의 정의대로 부림(釜林)은 ‘부산의 학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부림을 이해하려면 학림 사건을 이해해야 하고, 학림을 이해하려면 무림(霧林)으로 대표되는 당시 학생운동권의 동향과 성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무림-학림-부림으로 이어지는 흐름

학생운동이 처음부터 좌익 성향을 띠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 4·19는 말할 것도 없고 1968년의 3선개헌 반대투쟁 때만 해도 학생운동은 좌익보다는 반(反)정부에 가까웠다. 이 흐름이 급격하게 좌편향된 계기는 통상 1971년의 위수령으로 잡힌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학내 서클들을 모두 해체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해체된 서클은 이름을 잃었지만 본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특히 위수령은 막스-레닌주의자들을 지하화하도록 자극했다. 이름을 잃은 이들은 스스로를 서클이 아닌 패밀리(family)라는 은어로 불렀다.

그리고 조직의 구성과 지휘체계를 철저히 숨기는(아예 정하지 않는) 무정형성(無定形性)을 유지했다. 1980년 12월 수사당국이 서울대 학생 운동권에 ‘안개 숲’이라는 의미의 무림(霧林)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바로 이 무정형성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대의 대표적인 패밀리로는 ‘게이트’가 있었다. 왜 게이트였을까? 게이트는 대문(gate)을 의미하고, 이것은 ‘대학문화연구회’의 약칭이다. ‘애플’이라는 패밀리도 있었다. 이는 사과(apple)를 의미하며 ‘사회과학연구회’의 준말이다.

말이 사회과학일 뿐 막스-레닌 중심의 경제사, 혁명사, 투쟁사를 공부했다는 것에 운동권 출신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여러 갈래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와중에 막스-레닌을 공부한 게 아니라 막스-레닌만을 중심으로 한 사회과학을 공부한 것이다. 이 당시 운동권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욕설에 가까웠다고 한다.

당시 이 분야에서 공부하던 ‘혁명가’들은 현장준비론(현준론)이라는 논조를 채택하며 점점 학생운동의 주류 세력이 돼 갔다. 이들은 ‘반독재 투쟁을 해 봐야 크게 달라질 게 없고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 현장에서 의식화된 노동자에 의한 혁명만이 유효하며 학생들은 혁명의 그날을 기다리며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모든 운동권 세력이 현준론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장기적인 준비는 해야 하나 현실투쟁을 방기할 수 없다는 입장도 있었다. 현준론자들과는 별개로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이라는 이름으로 뭉쳐 동숭동학림다방에서 논의를 하던 이들은 결국 1981년 7월 ‘학림 사건’으로 덜미를 잡혔다. 그리고 1981년 9월에 이어서 터진 것이 부림 사건이다.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은 부림의 실체를 더 정확히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부림과 부미방의 관련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두 세력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암시되기 때문이다. 당시 방화로 동아대 장덕술 학생이 무고하게 사망했다.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김현장 씨는 이후 사면돼 현재는 전향한 상태다.

무림, 학림, 부림은 전부 경찰에 의해서 이름이 붙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당시 학생운동 세력은 경찰 쪽에서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조직의 존재를 규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련의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들에게 반인권적 고문이 가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현대사의 비극이자 엄혹한 시절의 상처로서 한국인들이 함께 극복해야 할 숙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건에 가담한 이들을 ‘대한민국의 체제를 위협한 적이 없는 선량하고 무고한 사람들’로 볼 수는 없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인연에 이끌려 따라갔다가 잡혀서 억울하게 구타당한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그런 이들이 형을 살지는 않았다는 데 증언이 일치한다.

무림, 학림, 부림은 그 당시 존재했던 수많은 운동권 세력 중에서도 톱클래스에 속했으며 그 중에서도 형을 산 사람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던 막스-레닌주의자로 볼 만한 정황 증거가 충분했다는 것이다. 당시 좌익 운동권에서 전향한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불완전한 법치주의’의 시대였을지언정 무법(無法)의 시대는 아니었어요. 적어도 법과 근거에 의해 처리하려는 노력은 했다는 거죠. 없는 게 있는 걸로 둔갑을 하진 않았습니다. 정말로 무법시대였다면 북한처럼 총살을 해버리면 그 뿐이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부미방’도 민주화운동인가?

‘변호인’은 영화이므로 반드시 노무현의 삶을 그대로 복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전제로 깔고 있는 ‘부림=용공조작’이라는 공식에는 해명이 필요하다. 용공은 공산주의를 용인했다는 말인데 과연 그들의 사상은 ‘조작’된 것이었던가? 부림 사건으로 형을 산 이들은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부림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버린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부림이 민주화운동이라면 그와 연관을 맺고 있는 부미방 사건도 민주화운동이란 말인가? 부림 사건 관계자들이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을지언정 그들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벗겨지지 않았다. 지난 3월부터 부산지법은 유죄 부분에 대한 재심을 진행 중이다.

어차피 영화일 뿐인데 자유민주주의냐 아니냐의 여부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묻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1980년의 광주를 폭동으로 ‘전제’하고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고 할 때 과연 그걸 견딜 수 있을지부터 자문해 볼 일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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