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만능인가
민주주의가 만능인가
  • 미래한국
  • 승인 2013.12.1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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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민주’는 이 나라에선 그 자체로 권력이다. 무소불위다. 이 완장을 차면 뭔 짓을 해도 다 용납이 된다. 법도 규칙도 필요 없다. 국회에서 망치와 톱을 휘두르고 심지어는 최루탄을 터뜨려도 된다.

‘민주’라는 깃발을 휘두르면 도로를 점거하고 난장판을 벌여도 무죄다. 정당이든 노조든 변호사단체든 시민단체든 또 무슨 연대든 회의든 그 이름 앞에 민주라는 단어 하나만 갖다 붙여놓으면 그렇게 ‘마음대로’다.

그냥 그런 것이려니 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다시 묻게 된다. 기껏 이런 꼴을 보려고 그토록 애써 민주화를 한 것인가? 민주팔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떠들어 댄다. 맞다. 위기는 위기다. 한때 모두에게 신성한 대접을 받던 ‘민주화’라는 용어가 도처에서 조롱거리가 돼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위기는 그들의 뜬금없는 주장처럼 ‘독재’ 권력에 의한 게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민주팔이들 자신에 의한 위기다. 그들의 생떼와 그에 선동된 떼거리들의 깽판에 대한 대중적 반발이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점에선 민주주의 자체에 의한 민주주의의 위기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본래 그런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만으로는 결국 그런 위기에 처하게 돼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절대 가치가 아니다

한국에선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불가침의 어떤 절대적 가치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던 것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룩한 만큼 그런 국민적 감정이입은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민주주의 Democracy는 가치기준이 되는 이념으로서의 주의(主義 Ism)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정체(政體 Cracy)일 뿐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그에 대비되는 다른 정체에 대해 상대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칼 포퍼는 “민주주의는 가장 나쁜 국가 형태, 즉 전제정권이나 독재정권을 피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즉 적극적으로 추구할 가치가 아니라 단지 최악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한편 처칠은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시도됐던 다른 모든 정부 형태를 제외한다면 최악의 정치체제”라고 말한 바 있다. 민주주의가 최악이라고 비난하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민주주의가 만능의 완전한 어떤 건 결코 아니라는 얘기다.

민주주의는 어떤 점에선 최선도 아닌 하나의 차악이다. 당연히 그만한 약점과 위험이 있다. 다수의 횡포가 있을 수 있으며 중우정치의 위험도 있다. 인간은 불완전한, 한계의 존재다.

그 불완전함이 쪽수가 많아진다고 느닷없이 완전함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개인이 아닌 다수 대중이 됐을 때 더 비이성적으로 될 수 있다. 광우병 소동을 생각해 보라.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대중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라 좀비와 다를 바 없는 존재 아닌가?

요컨대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한 박정희의 언명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결코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우상화되면 안 된다. 민주주의는 가치 자체가 아니라 가치를 구현하는 정치적 도구다. 어떤 가치인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든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든 ‘결코 양도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다.

어떤 권리인가? 바로 자유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소유권이다. 인간의 소유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다. 그 소중한 자신을 온전히 지킬 권리가 바로 신체의 자유고 양심의 자유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얻은 재산을 지키고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가 바로 재산권이다. 그래서 소유권은 곧 자유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그렇지 않은 민주주의는 그 어떤 그럴듯한 수사를 동원하든 결국에는 우중을 기반으로 하여 다시 전제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자유를 지키는 헌정적 민주주의

민주주의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그 목적과 방법 모두에서 반드시 헌정주의(憲政主義 Constitu tionalism)에 의해 뒷받침돼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라는 지켜야 할 가치를 헌정의 목적으로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법치주의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권리의 장전을 선포하고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그 누구든 즉 통치권력이든 국민이든 모두가 약속된 규칙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헌정주의를 통해 국가권력으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지킬 뿐만 아니라 민중이라는 떼거리로부터도 국가의 법적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헌정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떼거리들의 난장판 이상이 아니다. 참여민주주의? 그것은 본질적으로 법치를 무시한 인민민주주의적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인민재판이 돼 버린 참여재판을 보라. 분위기에 휩쓸린 우중에겐 법도 휴지 아닌가?

마땅히 단죄돼야 할 자가 선동적 분위기에 의해 무죄가 되면 죄 없는 사람이 얼마든지 유죄가 될 수 있다. 법이 휴지가 되면 종래엔 결국 그렇게 인간을 유린하게 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헌정적 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치에는 또 다른 희한한 문제가 있다. 다수의 횡포는 커녕 소수의 뗑깡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차원도 아니고 정치문제도 아닌 일종의 행패다. 국회선진화법이 문제라지만 웰빙족 새누리가 그게 아니라고 제 구실을 했을 것인가? 뗑깡족과 웰빙족의 정치가 정상적으로 될 리가 없다.

민주주의는 결코 그냥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 어떤 제도든 그렇지만 특히 민주주의의 성패는 그 담당주체세력의 존재와 긴밀히 결합돼 있다. 민주주의의 건강한 발전에는 그것을 뒷받침하고 주도하는 건강한 세력이 필수적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민주주의의 발전사에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혁명 직후 공포정치의 도가니에 빠졌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150년이 넘게 각각 두 명의 군주와 황제, 다섯 번의 공화제와 한 차례 원시적인 파시스트 독재를 경험하면서, 2차 대전이 지나서야 드디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파리드 자카리아 <자유의 미래>) 오

늘날은 어떠냐고? 자카리아는 이렇게 덧붙인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드골이 ‘선출된 민주적 군주’라고 불렀던 정체가 유지되고 있다.”

 

신사와 민주주의

지금은 모범적인 민주국가인 독일도 그런 곡절과 진통에선 프랑스 못지않다. 양차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었을 뿐더러 바이마르 체제는 히틀러라는 희대의 인물을 배출했다. 서구 강국들 가운데 민주주의가 안정적이고 순기능적이었던 경우는 사실 영국과 미국뿐이다. 문제는 주도세력이었다.

미국의 정치사회학자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1913~2005)는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1966)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부르주아 없이는 민주주의는 없다.”

자유주의적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한 주도세력이 민주주의 발전의 안정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는 그런 계층과 문화가 튼튼했다. 하지만 프랑스 독일에는 그런 조건이 매우 취약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상업을 천시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영국인들을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상인이라고 했으며 히틀러는 미국인들을 또 그렇게 비판하곤 했다. 한편 나폴레옹은 농민을 가장 중시했으며 히틀러도 게르만 농업공동체를 이상적 모범으로 생각했다. 그런 만큼 둘은 모두 땅을 넓히는 데 집착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달랐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말처럼 그들은 정말 돈에 투철했다. 농업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농업을 해도 언제나 상업적 목적을 갖고 경영을 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농촌에는 늘 과거에 대한 목가적 지향이 존재했다.

그러나 영국 농촌의 요우먼(yeomen)이라는 자작농은 이미 야심적이고 공격적인 작은 자본가 집단이었다. 그리고 귀족계급 아래 광범위한 젠트리(Gentry)는 상업적인 농업경영으로 단단한 기반을 구축했다. 이들이 도시의 상공인들과 함께 영국 민주주의를 이끄는 주역이 됐다. 19세기 대영제국 전성기를 주름잡은 유명한 두 총리 글래드스톤과 디즈레일리는 모두 젠트리 출신이었다.

이들은 그렇게 정치를 이끌면서 문화적으로도 영국을 지배하고 대표하는 세력이 됐다. 바로 ‘신사(Gentleman)’이다. 당시 영국을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런던에선 주인이 시종처럼 옷을 입으며 공작부인이 자기 하녀를 모방한다”고 했다. 비아냥이었겠지만 프랑스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라는 걸 그는 몰랐다.

신사는 신분질서 상으로는 중간계급이었지만 재력 실력 품격을 고루 갖춘 영국 정치의 명실상부한 주역이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자유민의 나라로 시작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또 다른 영국이었다. 미국의 개척민들은 또 다른 요우먼이었으며 와스프(WASP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는 아메리카 판 신사를 자임하고자 했다.

한국의 뗑깡정치

이런 점에 비춰 보면 한국의 민주화세력의 문제가 드러난다. 초창기 YS DJ 등의 세력은 본질적으로는 조선시대적 한량에 가까운 부류였다. 그런 만큼 그들은 상업을 천시했으며 실력은 부족했지만 숭문주의적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화투쟁은 처음부터 부르주아 없는 관념적 선언으로서의 민주화였다. 이것은 마치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적 자유의 실질적 보장이 아니라 이론적 선언에 그친 것과 매우 유사하다. 한국의 민주세력이 늘 프랑스를 흠모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YS DJ 세력의 이런 한계는 뒤를 이은 反유신 세대와 이후의 386세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들은 산업화세대의 자녀세대이면서도 이념적으로는 그러한 기반과는 반대로 상업천시와 숭문주의를 그대로 반복했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좌익성향까지 더해졌다.

그런 요소는 이미 DJ 개인에게도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유의미한 흐름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87년 민주화 이후 하나의 사회적 흐름이 돼 버렸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이른바 민주세력에 건강한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부재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민주당에선 그런 세력은 이미 다 고사해 버렸으며 실질적 주도세력인 친노세력은 명백한 좌익세력이다. 이런 자들이 종북 숙주가 아닌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들은 영미적 발전을 우습게 알고 자코뱅적 발자취를 흠모하는 만큼이나 그 행동양식이 매우 파괴적이다. 그래서 뗑깡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땀 흘려 일한 경험이 없어 매우 건달적인 것도 특징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완장을 자랑하고 군림하려는 속성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다는 걸 증거하려는 듯 끊임없이 돈과 부자에 대해 욕을 퍼부어 댄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하지만 이들의 기준으로는 사실 그 반대다. 그들은 ‘부’ 자체를 원죄로 간주한다. 이들에겐 있어선 없는 게 권리요, 있는 게 죄다. ‘서민’이라고 하면 다 용서되고 ‘재벌’이라고 하면 다 죄가 돼야 한다는 게 이들의 논리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 그들의 ‘선생님’ 김대중은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지만 사실 자유는 돈을 먹고 자라는 것이다. 자유는 말하자면 시장에서 탄생하고 상업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상업과 돈벌이를 천시하는 곳에선 자유도 민주주의도 결코 안정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한국은 지금 내외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 가서는 급박한 대외적 도전에 대한 대응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내적 안정도 어렵다. 정치의 일대쇄신이 필요하다. 대영제국의 영광에는 ‘신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뗑깡족이 아니었음은 물론이요 웰빙족도 아니었다.

품위와 교양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확고한 의지를 갖춘 집단이었다. 대영제국처럼은 아니라도 좋다. 그러나 적어도 양아치 무리들만큼은 확실하게 퇴출시켜야 한다. 물론 기생 무리에 지나지 않는 웰빙족도 당연히 퇴출시켜야 한다.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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