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이제는 보수주의다
2014, 이제는 보수주의다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4.01.08 09:1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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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준의 Book & World: 프랭크 메이어의 <자유를 수호하며>(In Defense of Freedom)를 읽고
 

최근 철도노조파업과 관련, 종편에 몇 차례 출연했다. 전체 평균연봉이 6800만 원을 넘으며 파업의 중심세력인 기관사들의 연봉만을 따질 경우 평균 9000만 원이 넘는다는 사실은 많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국민들의 분노는 단순히 이들의 연봉이 높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효율과 시장에 의한 임금 및 소득 격차를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같은 고연봉의 배후에는 18조라는 어마어마한 부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3년 철도공사로 전환할 당시 이미 3조에 달하는 부채를 탕감해 준 바가 있다. 그런데 불과 10년 만에 다시 부채가 18조로 불어난 것이다. 18조 빚이란 5천만 국민 1인당 36만원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결국 전체 국민 가구당(4인 가족 기준) 144만원씩 빚을 떠안게 만든 것이다.

“국민의 혈세로 고임금을 받아먹으면서 뻔뻔스럽게 또 파업이라니! 그것도 정치파업을?!”이라는 것이 일반 국민의 정서였다. 이러한 국민적 분노와 외면에 봉착, 철도노조는 “정치권의 비호 속”에 ‘전술적 후퇴’를 감행했던 것이다.

‘귀족노조’보다는 ‘떼강도 노조’에 가까운 철도노조

철도노조를 비판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된 용어 중의 하나가 ‘귀족노조’였다. ‘약자 코스프레’를 시도했지만 철도노조는 강자 중의 강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철도노조를 ‘귀족노조’라 함은 ‘귀족’ 혹은 ‘귀족노조’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귀족’은 ‘특권’을 누린다. 그러나 귀족은 ‘특권’의 대가로 ‘희생’이 강제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귀족은 기본적으로 ‘품위’를 기반으로 존재한다. 서구의 기사도와 한국의 화랑도 등이 그 대표적 예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로 표현됐다.

물론 ‘희생’과 ‘품위’를 상실한 귀족들도 존재했다. 그럴 경우 프랑스 대혁명에서의 예와 같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다. 아니 철도노조가 어떤 형태의 ‘희생’을 보여주었는가? 작년 12월 28일 시청역 앞 집회 현장에서 소주를 마시고 아무데나 방뇨하는 행위를 ‘품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고 단두대에 올라간 것도 아니고…

귀족노조란 용어는 민노총과 철도노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귀족노조란 19세기 말 노동조건이 개선되면서 사회혁명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앞세운 서구 국가들의 사회민주주의 노조를 비꼬기 위해 공산혁명 진영의 과격파들이 만들어낸 용어이다. 서구 귀족노조의 경우 많은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며 나름대로 ‘귀족적 품위’를 유지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최소한 자신들의 이익만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했다(비록 현실에서는 많은 한계를 노정시키기도 했지만). 또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이들은 공산노조와 투쟁, 반공의 방파제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 볼 때 현재 민노총과 철도노조는 귀족노조라 불릴 자격도 없다. ‘떼강도 노조’가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혈세를 빨아 먹으면서 ‘떼거리’의 힘만으로 밀어 붙이려는 노조, 떼강도 이외에는 다른 적절한 표현을 찾기 힘들다. 이들이 떼강도에만 머물러도 성인군자라면 참고 견딜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떼강도 노조의 배후에는 사회체제 전복 세력이 존재하며 바로 이들에 의해 이번 사건이 임금인상 등과 같은 경제투쟁이 아닌 ‘정권퇴진’을 중심 슬로건으로 한 ‘정치투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세히 관찰한 분이라면 그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이번 파업은 경제파업이 아니었다. 정치파업이었으며 이는 민노총의 정치총파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민노총은 2월 ‘정권퇴진’을 위한 정치총파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를 4월 춘계 임금투쟁과 연결시키겠다는 치밀한 계획을 수립,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지난 연말 어느 대학생 모임에서 강연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소련에서의 개인적 체험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모순을 중심으로 안보 강연을 하려 했다. 그러나 참여한 대학생 대부분이 이미 자신들을 ‘우익’으로 규정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기초적 안보강연’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됐다.

이에 “현대 보수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들어보고 또 관련 서적들도 읽어 보았으나 ‘보수주의’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본다는 것이었다.

 

美 현대 보수주의 3대 구성 요소

특히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하이에크, 미제스와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글은 제법 많이 보급됐다. 그러나 ‘현대 보수주의’ 사상과 철학은 거의 소개도 되지 않은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이에 ‘보수주의’하면 고리타분한 노인(?)들의 “현실안주적 태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에 가장 관심 있게 읽은 책이 프랭크 메이어(Frank Meyer)의 <자유를 수호하며>(In Defence of Freedom)이다. 메이어는 미국 공산당 간부 출신으로서 이른바 ‘전향자’ 중의 한 사람이다.

메이어는 <내셔널리뷰>지(誌)의 편집위원으로서 ‘미국 현대보수주의’ 이론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이다. 메이어의 보수주의는 이른바 ‘퓨전 보수주의’(Fusion Conservative)로 알려져 있다. ‘퓨전’이라 불리는 것은 ‘미국 현대보수주의’의 3대 구성요소인 경제적 자유주의, 전통주의적 보수주의, 반공적 보수주의를 ‘융합’(혹은 혼합)시켰기 때문이다.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집권하면서 미국의 ‘현대 자유주의’(Modern Liberalism)는 “∼로부터 자유”(freedom from)을 중심으로 한 19세기 유럽의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로부터 이탈, “∼를 위한 자유”(freedom for)라는 이름하에 국가의 경제에 대한 개입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종 자유주의는 사회주의 성향의 흐름과 접목되면서 이름만 ‘자유주의’일 뿐 사실상 ‘집단주의’(Collectivism)로 전락됐다. 바로 현재 미국식 영어로 리버럴리즘(liberalism)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집단주의로 전락한 현대 리버럴리즘(liberalism)에 대한 반기

이러한 ‘현대 리버럴리즘’은 뉴딜(New Deal)을 거치면서 미국의 주류로 전화됐다. 이러한 미국 ‘현대 리버럴리즘’에 대한 저항은 3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다. 첫째가 경제적 자유주의 흐름이었다.

이들은 시장경제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면서 ‘현대 리버럴리즘’의 ‘집단주의’에 저항했다. 두 번째 흐름은 ‘전통주의적 보수주의’로도 불리는 흐름이다. 영국의 19세기 정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의 입장을 따르는 흐름이다.

이들은 가치(value), 덕(virtue), 질서(order)를 중시하며 ‘현대 리버럴리즘’의 급진성과 사회공학적 진보주의에 반대한다. 세 번째는 반공적 보수주의로 ‘현대 리버럴리즘’의 ‘반(反) 반공주의’(Anti-anticommunism)에 맞서는 조류이다.

이 세 흐름은 1950년 미국 ‘리버럴 헤게모니’에 맞서 연합하지만 내부 갈등 및 모순이 전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전통주의적 경향’과 ‘리버테리안적 경향’은 서로 충돌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셔널리뷰>를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지게 됐으며 결국은 ‘퓨전’(fusion)의 형태로 정전(停戰)된다.

물론 완전히 ‘융합’됐는지에 대한 의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신의 존재 여부 등 철학적 신학적 문제 등이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천적’(practical) 정치사상으로서의 ‘미국 현대 보수주의’는 바로 이 ‘퓨전’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물론 강조점에 따른 경향적 차이는 항상적으로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퓨전’했는가? 메이어는 ‘리버테리안적 경향’에 대해 “진리의 절대적 기반”(absolute ground of value)을 부정할 경우, 공리주의(utilitarianism)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지적한다.

19세기 고전적 리버럴리즘이 건강성을 지닌 이유는 당시도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유기적 도덕질서에 대한 믿음의 토대”(the foundations of belief in an organic moral order)에 대해 공격했음에도 불구,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 세계에서의 내재된 도덕적 양심”이 생활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도덕적 양심”이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에 의해 붕괴될 경우, 리버럴리즘은 분화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바로 그 결과는 ‘미국의 현대 리버럴리즘’과 ‘자유방종주의’(Libertinism)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메이어는 하이에크와 미제스의 ‘리버테리아니즘’(libertarianism)은 미국 현대 보수주의의 주요한 자산으로 간주하나 동성연애, 마약 등의 문제에서도 자유를 주장하는 머레이 로스바드(Murray Rothbath)나 칼 헤스(Karl Hess) 등의 급진적 리버테리즘과는 선을 분명히 긋고 있다.

메이어가 ‘퓨전’을 위해 보다 치열하게 싸웠던 진영은 ‘리버테리안적 경향’이 아니라 ‘전통주의적 경향’이었다. 책 제목이 “자유를 수호하며”라고 붙인 이유도 이 점에 있다.

그 이유는 리버테리안적 경향이 아카데미 영역에서는 강하지만 현실 정치 영역에서는 약했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 영역에서는 ‘전통주의적 경향’이 더 문제시된다고 판단했으며 여러 가지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 시장경제와 개인적 자유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 못할 경우, ‘권위주의’ 혹은 ‘국가주의’로 전락 혹은 변질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메이어는 ‘권위’와 ‘권위주의’를 엄격히 구별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권위’는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하나, ‘권위주의’는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다. 또 권리(right)와 의무(duty)를 ‘주고받기’(give & take)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도덕적 토대를 상실한 권리는 특권(privilege)으로, 도덕적 토대를 상실한 의무는 복종(obedience)로 전락되어 버리는데, 둘 다 인간의 존엄성의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메이어는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일부 ‘리베테리안적 경향’과 구별된다. 그러나 모든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목적이 덕(virtue)이라는 원칙을 가진 자유 질서(free order)”라고 주장한다.
그럼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특징은 무엇인가? 메이어는 7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현대 보수주의는 존재론적 토대(ontological foundations)에 기초한 객관적 도덕 질서(objective moral orde)의 존재를 상정한다. 도덕을 도구적 혹은 기능적으로 보는 입장에 반대한다.

둘째, 개인적 인간(individual person)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구체적 인간을 계급이나 인민(people)과 같은 추상적 개념의 종속물로 보는 입장에 반대한다.

셋째, 반(反) 유토피아(anti-utopian) 주의이다.

넷째, 국가의 권력은 제한돼야 된다고 믿는다.

다섯째, 자유경제체제의 우수성에 대한 확신이다. 자유경제체제는 자유로운 인간의 본성이 맞는다는 원칙적 측면에서, 그리고 그 어떤 체제보다 효율적인 경제체제라는 점에서 정당하다.

여섯째, 미국헌법에 대한 강한 지지이다.

일곱째, 서구문명과 미국 애국주의에 대한 헌신이다.

한국 현대 보수주의의 모습은?

‘한국 현대 보수주의’는 어떤 모습일까? 2014년 새해를 맞이해 가슴 속에 안고 가는 최대의 화두이다. 한국 현대 보수주의도 ‘경제적 자유주의’와 ‘철학적 보수주의’의 ‘퓨전’ 형태가 될 것으로(혹은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 내용은 현실과의 싸움 속에서 채워질 것이다.

메이어는 말한다. “역사에서 결정된 것은 없다”고. 분명한 것은 이제 한국 보수주의도 태도나 습성으로서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아닌 “지적”(intellectual) 보수주의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점이다.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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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RumerTest 2014-05-29 14:45:49
Hello. And Bye.

lovecall 2014-01-08 10:38:48
수구꼴통의 비아냥에서 벗어나가 위하여, 대한민국의 보수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