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책으로 세상 바꾸기
새해, 책으로 세상 바꾸기
  • 미래한국
  • 승인 2014.01.1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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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著)
사사키 아타루 著, 자음과 모음 刊, 2012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내게 무척 큰 지적(知的) 자극을 준 책’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나의 무지를 통감하게 만든 책’이다.

저자는 마르틴 루터나 무함마드(그래도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조금은 안다), 로크, 흄, 애덤 스미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니체, 사무엘 바케트, 버지니아 울프, 조이스, 프로이트, 라캉(그래도 이름은 들어봤다), 르장드르, 아감벤(이게 누구야?)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독서와 혁명’에 대해 얘기한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이 책은 한 마디로 책읽기(독서)란 무엇인지, 책읽기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관한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책읽기’는 ‘힐링’을 구하는 달착지근한 책읽기가 아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이나 생각을 보강해주는 책읽기도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자기가 옳다고 믿어왔던, 그리고 지금도 다른 이들은 옳다고 믿고 있는 세계관이 통째로 박살나는, 그래서 미칠 것만 같은 충격을 맛보는 치열한, 아니 처절한 책읽기다.

저자는 말한다. “이런 준거의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그래도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추궁해야 합니다. 반복하겠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하고 말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

역사를 바꾼 텍스트혁명들

이런 처절한 책읽기는 결국 자기 자신의 의식의 혁명으로, 더 나아가 세계를 변혁시키는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를 보자.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중세의 가톨릭 질서(추기경-대주교-주교-신부로 이어지는 질서)와 면죄부(免罪符)를 비롯한 가톨릭교회의 부조리(不條理)들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가 읽은 텍스트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그 질서에 도전하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에서부터 근대 독일어와 독일문학, 법학이 출현했다. 종교개혁에 이어 벌어진 30년 전쟁을 마무리 짓는 베스트팔렌조약의 결과 근대 국가체제와 국제질서가 수립됐다. 루터의 성경 읽기에서 비롯된 종교개혁은 독일과 유럽, 더 나아가 세계의 종교와 문화, 국가체제와 국제질서를 바꾼 총체적인 ‘대혁명’이었던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앞서 있었던 12세기 ‘중세해석자혁명’은 그 이후의 모든 ‘혁명의 어머니’가 되는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대전>이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그것은 600년간 잊혀졌던 이 텍스트를 읽고,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이 텍스트에 맞게 기존의 질서를 다시 해석하는 작업이었다. 덕분에 게르만민족의 대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유럽세계에 드리워졌던 ‘중세의 암흑’이 걷히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교회법 질서, 그리스도교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교황권이 확립됐다. 주권국가, 법질서, 관료제, 의회제도 등이 여기서 비롯됐다. 법인(法人)과 상법 등 후일 자본주의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들도 ‘중세해석자혁명’과 그로 인한 법학의 발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과학적 사고와 방법론 역시 마찬가지다.

혁명의 본질은 텍스트의 변환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혁명’이라고 하면 폭력과 유혈을 연상하는 사고방식을 배격한다. “폭력은 없느니만 못한 이차적인 파생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혁명의 본질은 읽고 쓰고 번역하는 텍스트의 변환입니다.” 얼마 전 읽었던 귀스타브 르 봉의 <혁명의 심리학>에 나오는 말이 생각난다. “혁명을 일으키기는 쉽다. 그러나 한 국민의 영혼을 바꿔놓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프랑스대혁명이나 러시아혁명 같은 혁명들이 엄청난 폭력과 유혈로 점철됐으면서도 인간의 영혼은 바꾸어놓지 못했다면, 사사키 아타루가 주목하는 ‘텍스트혁명’들이야말로 인간의 영혼,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질서를 바꾸는 진정한 혁명이 아니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념 대립도 ‘읽기의 혁명’ ‘텍스트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처절한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거친 후 지하로 들어간 좌파들, 그들에게 공감하는 먹물들은, 그들에게는 금단(禁斷)의 선악과(善惡果)와 같은 마르크스, 모택동, 김일성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책들을 읽었을 때, 그들은 그때까지 몰랐던, 혹은 남들은 모르고 있는, 절대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 비춰 현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했으리라. ‘내가 미친 것인가, 세상이 미친 것인가.’ 그리고 자기들이 보기에 미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다시 읽고, 또 읽고, 자기들이 읽은 것을 책으로 펴냈다.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이나 <8억인과의 대화> 혹은 1970년대 후반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들은 그런 투쟁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책들을 읽고 의식화된 젊은이들이 30여년 후 세상을 바꿨다. 하지만 역사는 미친 것은 그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물론 국내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전개됐던 이러한 책읽기와 ‘텍스트의 변환’은, 루터의 종교개혁이나 중세해석자혁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일 것이다. 그것이 종교개혁이나 중세해석자혁명처럼 지속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다만 책읽기와 ‘텍스트의 변환’이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사회 변혁으로 이어지는 측면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지금 이 나라 우파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여러 전선(戰線), 특히 문화와 역사 해석 분야에서 밀리고 있는 것은 책읽기와 다시 쓰기, 그리고 ‘텍스트의 변환’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노력이 있다 해도 좌파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 그 치열함이 부족하다. 우파의 지적 헤게모니 상실은 그 당연한 결과라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그러고 보니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에 나오는 이영훈 서울대 교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은 마르크시즘 관련 저작들을 읽으면서부터였고, 거기서 빠져 나온 것은 그렇게 형성된 지식들과 다른 사실을 보여주는 텍스트들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걸 다시 해석하고, 그 결과를 쓰는 과정에서, 그리고 애덤 스미스와 하이에크를 읽으면서 그는 온전한 자유주의자로 거듭 났다. 최근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하이에크나 미제스 읽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치열하게 책을 읽는 것은, 그리고 그 결과를 재해석하고, 쓰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새해에는 더 많은 책을, 더 어려운 책을, 더 치열하게 읽어야겠다. 그리고 그 독서가 내게 준 영향을 글로 열심히 써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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