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하는 영혼의 생기를 포착하다
증발하는 영혼의 생기를 포착하다
  • 이원우
  • 승인 2014.01.2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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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국민화가 뭉크 사망 70주년
병든 아이 (1886)

“뭉크는 전시 기간 내내 공포에 떨며 현기증에 시달렸다. 당시의 많은 기록을 보면, 그 전시회는 웃음의 연속이었다고, 즉 그 그림 앞에는 항상 배를 잡고 웃는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추계전 기간 내내 뭉크의 미친 그림을 가서 보고 웃는 일은 도시의 오락거리가 됐다.

이제 뭉크가 거리에서 욕을 들어먹을 차례였다. 언론은 무능력과 태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광기라는 비난을 반복했다. ‘병든 아이’는 희생양이 됐다. 노르웨이의 그 어떤 그림도 그처럼 극렬하게 도덕적 분노를 폭발시킨 적이 없었다.”

1886년, 23세의 화가 뭉크가 ‘병든 아이’를 발표했을 당시의 일을 전기작가 수 프리도가 기술한 부분이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봐도 음울한 이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었다.

인물과 배경의 경계가 흐릿하고 캔버스 어디선가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이 그림은 19세기 미술의 기준, 즉 사실주의의 상식을 깡그리 무시하고 전대미문의 발상을 시각화했던 것이다.

당대에는 비웃음을, 후대에는 경탄을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것은 뭉크의 그림 앞에 선 사람들의 표정이다. 뭉크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63년 오슬로시에서 개관한 뭉크 미술관에 들어가면 일단 ‘그림 앞에 서기’부터가 쉽지 않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인파들이 그림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기 때문이다.

원작 앞에 선 사람들에게서 19세기 말의 비웃음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뿐인가. 후대의 노르웨이인들은 자국의 1000크로네 지폐에 뭉크의 초상을 그려 넣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120년의 시간은 미학의 기준을 뒤틀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뭉크는 어떻게 시간을 거슬러 그토록 독특한 작품세계를 갖게 됐던 것일까.

뭉크미술관에 전시된 절규(1893)

삶 속에 편입된 영원한 테마, 죽음

에드바르트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 남부의 작은 마을 뢰텐에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12월 12일 태어났다. 군의관 출신으로 아들의 삶에 프로이트적인 그림자를 드리운 아버지 크리스티안 뭉크와 자애로운 어머니 레우라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하지만 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뭉크는 가혹한 시련을 맞게 된다. 어머니 레우라가 결핵으로 사망한 것이다. 뭉크가 어머니와 했던 마지막 산책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나이 서른에 그린 그림 ‘문 밖에서’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뭉크를 포함한 5남매는 이모인 카렌의 손에 의해 길러지지만 뭉크의 누나이자 어머니의 역할까지 감당했던 소피에 역시 1877년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어린 뭉크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어머니와 누나가 하늘나라에서 널 보고 있다”고 말하며 사춘기 아들의 비행을 막고자 했지만 뭉크는 조심스럽게 아버지와 신에 대한 원망을 마음속에 쌓아갔다.

소피에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뭉크였지만, 그 자신도 상습적인 열병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병약하고 가난한 영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뭉크의 여동생 중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정신병 진단을 받았고 유일한 남동생 안드레아 역시 결혼식을 올리고 몇 달 만에 사망했다. 죽음은 뭉크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일부였다. 그는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을 뿐이었다.

논란과 혹평 속에서 피어난 ‘절규’

허약한 몸과 마음을 가진 것과는 별개로 여성들에게는 꽤 인기가 좋았던 뭉크는, 그러나 기괴한 화풍 때문에 평단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혹평을 받았다. 1892년에 베를린 미술협회의 초청으로 열린 개인전 역시 비난 일색이었다. 심지어 전시회의 지속 여부를 놓고 회원 총회의 찬반 표결까지 벌어졌다. 결국 8일 만에 전시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병실에서의 죽음 (1895)

새옹지마였던 것은 이른바 ‘뭉크 스캔들’로 불린 이 사건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세간에 점점 알려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3년 뭉크는 세기의 걸작 ‘절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중심 인물의 실루엣을 곡선으로 처리하면서 경악스럽고 혼란스러운 심리를 매우 직관적으로 표현해낸 이 그림을 위해 뭉크는 50여 종의 작품을 습작할 정도로 큰 애착을 보였다.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점점 획득하고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뭉크의 삶은 계속 우울했다. 과도한 음주로 인해 환각 증세까지 경험한 뭉크는 8개월 동안 요양치료를 받기도 했다. 말년에는 평온한 풍경화와 자화상을 그려냈지만 결국 뭉크는 생의 고독을 끝내 밀어내지 못한 채 80세의 나이로 1944년 1월 23일 눈을 감았다. 세상을 떠나던 날 그가 읽고 있던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이었다.

유언에 따라 모든 작품들이 시에 기증됨으로써 뭉크는 온전히 ‘노르웨이의 작가’로 남았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가 느꼈던 괴로움의 정수를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로 사망 70주년을 맞는 그의 삶을 조명한 책으로는 수 프리도의 책 ‘에드바르 뭉크-세기말 영혼의 초상’과 이리스 뮐러베스테르만의 책 ‘뭉크-추방된 영혼의 기록’ 등이 있다. 영국의 피터 왓킨스 감독이 1976년 제작한 영화 ‘에드바르트 뭉크’ 역시 뭉크의 삶을 실감나고 밀도 있게 복원한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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