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에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민노총 간부 A씨는 작년 12월 철도파업 결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A씨는 80년대 말 함께 노동운동했던 사람인데, 공통된 지인인 B씨의 부친상에서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철도파업이 실패로 끝난 것은 박근혜 정부의 의지를 만만하게 봤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철도산업을 개혁하겠다고 나섰지만, ‘막강한 우리 철도노조’의 힘 앞에는 모두 무력했다. 그렇기에 쉽게 생각하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결과는 일단 참혹했다.
특히 일반 국민들이 등을 돌린 모습이 역력했다. 우리는 그동안 ‘약자’로서 국민들에게 동정심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제 국민들은 더 이상 우리 철도노조를 약자로 보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약탈자’로 보는 분위기마저 형성됐었다.
‘보수’의 화력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귀족노조 프레임’ 십자포화망에 갇혀 전멸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도(?) 김무성-박기춘 합의 덕분에, ‘전술적 후퇴’를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에는 지지 않았다. 아니 이겼다고 생각한다. ‘민영화’는 나쁜 것이란 프레임을 전 국민적으로 형성해 냈기 때문이다.”
‘민영화=악’ 프레임에 걸리다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제 역풍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이미 공기업 노조들이 단결하고 있다. 한국노총과 공동으로 ‘공공부분 노조 공동대책위’가 구성될 것이며, 이를 중심으로 투쟁의 불길을 다시 일으킬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확보해 놓은 ‘고지’(철밥통 구조-저자)을 뺏으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참호와 토치카는 하루아침에 구축된 것이 아니다. 조금만 버티고 있으면 춘투(春鬪)시기가 되며 6월 지방 선거도 기다리고 있다. 선거판이 벌어지면 박근혜 정부의 공세는 주춤할 수밖에 없다.”
이 옛 동지는 북한문제와 통합진보당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단지 “난 정의당 지지자야”라고 말할 뿐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이쯤에서 중단됐다. 정치 이야기 그만하자는 다른 친구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대화는 아이들의 대학입시와 어학연수, 그리고 아파트 가격 이야기로 옮겨갔다. A는 이러한 우리의 ‘속물적 대화’에 화가 났을 것이다.
옛날식으로 말해 “쁘띠부르주아 근성을 버리진 못한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우리는 한때 우리 내면으로부터 ‘쁘띠부르주아’를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하는 ‘쁘띠부르주아’야말로 인간의 힘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던 것이다.(그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란 실존하지 않는 그들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그리고 ‘쁘띠부르조아성(性)’을 넘어선 ‘새로운 유형의 인간’은 결국 인간이 아닌 ‘악마’ 혹은 ‘기계’가 돼 버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옛 동지와의 대화,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비정상의 정상화’란 화두를 생각하며 로버트 콜린스(Robert Collins)의 <미국 변모시키기>(Transforming America)를 읽었다. 이 책은 1980년대 레이건 개혁에 관한 책이다. 콜린스는 레이건이 4개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서술한다.
첫째는 국가재정 개혁(세금완화), 탈규제 및 노조개혁을 통해 추락하고 있던 미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1990년대 미국 경제부흥의 초석을 깔았다. 레이건의 개혁은 쉽지 않았다. 철밥통 구조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으며 이에 대한 개혁은 단기적으로 볼 때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둘째, 소련을 붕괴시키고 냉전에서 승리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레이건의 대소전략은 단순한 봉쇄전략이 아니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봉쇄틀을 유지하면서 CIA 등을 통해 소련붕괴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셋째, 붕괴되고 있던 미국인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레이건의 가장 위대한 측면은 바로 이 점이다. 단순히 경제력과 군사력을 강화시킨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고 있던 지난 시기의 미국인들의 “낙관주의 정서”를 재구축해낸 것이다.
넷째, 미국 연방 정부의 성장을 완화시켰다. 교조적 시장주의자 입장에서 볼 때 레이건의 정부개혁은 부족했다. 미국 복지국가 시스템 자체에는 손도 제대로 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정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레이건은 분명 무조건 확장되는 ‘복지국가 리바이던’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레이건과 박근혜 대통령의 개혁 방향은 일치하는(혹은 일치해야만 하는) 점이 매우 많다. 레이건 개혁 방향은 소련붕괴에 의한 냉전체제 해소와 미국시장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이는 북한 김정은 체제 붕괴를 통한 남북통일과 공공노조의 기득권 해체를 통한 경제사회개혁이라는 박근혜 정부의 개혁과제와 유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정치·경제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
레이건 개혁, 특히 경제개혁에서의 가장 큰 난점은 장기적 경제개혁과 단기적 정치 손실과의 관계였다. 기득권 개혁에는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이라는 얼핏 보면 형용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개혁이기에 더 그러했다.
콜린스는 레이건도 미국의 정치·경제를 우경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문화의 좌경화는 막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1980년 레이건 혁명은 미국의 정치·경제 및 그 진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러나 레이건도 리버럴과의 문화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 바로 클린턴의 ‘뉴민주당’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치·경제는 보수주의 프레임을 도용하나 문화는 리버럴 코드를 사용, 집권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해 보인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박근혜의 정치·경제 개혁은 어느 정도 탄력을 받을 것 같다. 그러나 문화는 여전히 저들의 손아귀에 있다.
문제는 문화전쟁은 우리 보수시민사회의 몫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문화전쟁의 성과는 단기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날 저들의 문화권력도 결코 하루아침의 성과가 아니다. 박근혜의 개혁을 지지하고 강화시키는 한편, 끈질기고 완강한 문화전쟁을 장기전적 관점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다. ‘변호인’이란 영화를 통해 정치·경제 개혁의 성과가 하나의 영화에 의해 어떻게 유린될 수 있는지를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황성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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