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오타쿠는 가라
유토피아 오타쿠는 가라
  • 미래한국
  • 승인 2014.02.1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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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황성훈 (건국대 철학과 4학년)
 

몇 달 전, 안녕들 하시냐고 묻는 대자보들이 전국 대학가 곳곳에 퍼졌다. 절규와 협박을 약간 섞은 듯한 대자보의 메시지 속에서 그들이 어떤 안녕한 세상을 구체적으로 원했는지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대자보들에서 보이는 계급투쟁관과 유토피아 증후군, 동정심을 통한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안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칼 마르크스도 위 대자보들의 내용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일명 ‘유토피아 오타쿠들’은 유토피아 병을 심각하게 앓은 나머지, 자신들을 비롯한 살아 숨 쉬는 실제 인간의 모습과 실제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보는 눈을 잃고야 말았다.

칼 마르크스가 살 당시 근로자들은 열악한 근무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다. 치열한 경쟁과 연구, 자유롭고 활발한 자본의 이동이 이뤄진 자본주의경제체제는 생산성과 부, 선택의 폭을 증대시켰고 인간의 물질적·정신적 성장은 물론 도덕성도 높여줬다.

하지만 구원과 유토피아를 설계한다고 외친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대하고 야심찬 명분을 폭력과 권력이라는 형태로 발산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악마성을 고삐 풀린 채로 드러냈다.

그 결과 선택과 책임이 아닌 억압과 속박, 근면이 아닌 나태와 집단이기주의, 풍요가 아닌 빈곤, 땀과 생명 대신 피와 죽음을 남겨 놓았다. 거시경제를 인위적으로 조종해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외쳤던 케인즈와 그의 추종자들의 방법조차 구축 효과와 거짓된 경제성장, 경제 주체들의 회피 반응, 위정자들의 금권 행사의 증가만을 초래하며 스태그플레이션과 함께 그 실패가 드러났다.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동정심은 책임을 수반하지 않고 그래서 흔해 빠진 감정이라고 지적했다. 동정심에는 책임 있는 실행이 배제돼 있기 때문에 감성을 자극하고, 실상을 간과하게 하고, 어떠한 상황도 개선시킬 수 없으며 공상과 레토릭만을 불러 일으킨다.

유토피아는 없다. 대신 인간에겐 늘 개선해야 할 현실만이 존재한다. 불완전한 인간은 기껏해야 그저 ‘견딜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현실 개선은 축적된 지식과 지혜를 존중하고, 인간과 세계의 모습을 직시하며, 각자가 책임 있는 태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행동으로 나아갈 때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무역 규모 세계 8위인 대한민국에서 자신에게 더 낫고 행복한 삶을 위해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찾아 하나씩 실행하고 이로부터 느끼고 배우는 것이 대자보를 붙이는 것보다 자신의 삶을 더 안녕하게 하는 더 좋은 방법이 아닐지? 하긴, 해고와 직위해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과연 진실을 받아들여 안녕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황성훈
건국대 철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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