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가면을 벗긴다
체 게바라의 가면을 벗긴다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4.02.19 09:3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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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폰토바의 <체 게바라의 민낯 드러내기>를 읽고
1967. 10. 9.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체포된 게바라. 그는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다.

좌익 운동권 학생이었던 1985년 가을 CT(Central Tower)라 불리던 학생운동 지도부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가을축제 투쟁’을 전개하는데 음대와 미대 쪽 역량이 부족하니 지원하라는 지시였다.

처음에는 항의했다. 담당하고 있는 선전활동 임무를 감당하기도 바쁜데 음·미대 축제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것은 권고가 아니라 지시”라는 회답을 들었다. “음·미대 축제를 지원하라니? 조직에서 물먹은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불만이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참으며 음·미대 조직 책임자를 만나러 갔다. 예쁘장한 여학생이 한 명 나왔다. 이 여학생은 필자를 보자마자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음·미대는 그 특수성으로 인해 운동 역량이 열악할 수밖에 없는데, 중앙에서는 이런 사정을 무시한 채 무리한 지시를 내리기 일쑤”라는 것이었다.

부르주아 출신이란 사실에 죄의식

음·미대 상황을 파악한 뒤 다시 중앙에 보고했다. “이곳은 독자적 ‘RP시스템’(Reproduction System, 재생산 구조)도 갖추지 못한 곳이다. 몇 명 안 되는 ‘인자’(운동권)들도 단대 내부에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본부 서클 혹은 타 단대 인자들의 개인적 인간관계로 만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내부 자체 재생산 구조 확보가 가장 시급한 과제다”라는 것이 그 요지였다.

중앙은 이 보고를 승인했고 그 방침에 따라 독자적 학습 스터디 구조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가을 축제를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학생들 대부분이 자신들이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사실에 강한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축제일이 다가왔다. 약 한 달 동안 공산주의 혁명가 루카치와 브레히트의 문예운동 이론을 함께 학습하며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확실히 전문성이 달랐다. 걸개그림과 포스터, 그리고 무대시설은 당시만 하더라도 어설프던 기존 운동권의 솜씨가 아니었다.

이들이 만든 마당극은 약간 조야했지만 중창단의 노래는 정말 멋있었다. 이 날 축제의 마지막 순서는 합창 ‘그날이 오면’이었다. 이른바 ‘민중운동 열사’들의 걸개그림이 펼쳐지며 아름다운 화음의 선율이 울려 퍼지자 몇몇 학생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한 남학생이 무대 위로 뛰어 올랐다. “야! 개XX들아! 그날이 오면, 너희들이 좋을 것 같아? 그날이 오면, 너희들은 다 처형되거나, 잘 해야 아오지야!” 그 남학생을 무대에서 끌어내리고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 남학생은 음대 ROTC 학생이었다. 당시만 해도 “ROTC 반동XX가 잘 된 행사에 코 빠트렸다”고 생각했었다.

이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2월 13일 아내와 함께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맺혔다. 함께 본 아내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미대 85학번인 아내가 음·미대 축제 사건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말을 꺼냈다. “‘그날’이 왔다면, 저런 세상이 됐겠지…” 필자는 “‘그날’은 오지 않아. 아니 절대로 오면 안돼”라고 대답했다.

요즘 필자가 누리는 호사 중의 하나가 강남의 고급 커피숍에서 향기로운 커피 냄새를 즐기면서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일이다. 단골집도 생겨 무료로 리필도 해 주곤 한다.

그런데 간혹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힙합 바지에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게바라의 휴머니즘”이 어쩌고 저쩌고 떠드는 20대 젊은이들을 목도했을 때이다. 또 30대 회사원으로 보이는 젊고 늘씬한 멋쟁이 아가씨들이 들어와 카푸치노를 입에 머금고 “체 게바라 같은 애인” 운운하는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들은 적도 있다.

어느 틈엔가 체 게바라는 한국 사회에서 “자유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른 투사이자 리얼리스트이면서 동시에 로맨티스트인 휴머니즘의 화신”이 돼 있었다.

체 게바라는 누구인가? 체 게바라가 만든 ‘그날’은 어떤 것이었을까? 서구 좌익들의 의해 가공된 체 게바라의 신화를 벗겨내고 진짜 게바라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실증적 연구에 매달렸던 움베르토 폰토바(Humberto Fontova)의 <체 게바라 민낯 드러내기>(Exposing The Real Che Guevara)를 읽었다.

체 게바라 신화의 사기성에 대해서는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실증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은 본 적이 없었다. 폰토바에 의하면 체 게바라는 “냉혈적 살인자”이자 “사디스트 고문자”였으며 “권력에 굶주린 물질주의자”였다. 아니 무엇보다 체 게바라에게 치명적인 이야기는 “무능한 게릴라였으며 겁쟁이 기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서구 게바라 숭배자들이 쿠바 방문시 반드시 들르는 명소. 이곳은 게바라가 조직한 쿠바 비밀경찰 건물이다.

의사 면허도 없었던 게바라

체 게바라는 의사로 알려져 있다. “의사로서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는데 이를 포기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총을 잡고 싸우다 산화한 인도주의적 영웅”이란 것이 서구와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게바라 신화의 요체이다.

그런데 게바라는 의사 면허를 받은 적이 없다. 게바라가 졸업했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의대 졸업생 명단에는 게바라가 없다. 심지어 게바라 자신도 자신이 의사였다는 사실을 부인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의학 공부를 한 적이 있고 따라서 의학지식이 있기는 하지만 의사 면허를 가진 적은 없다는 것이 볼리비아에서 체포됐을 당시 게바라 자신의 증언이다.

게바라는 레닌이나 스탈린 혹은 카스트로와 같은 냉혹한 혁명가가 아니라 리얼리스트이면서도 휴머니즘적 품성을 잃지 않은 낭만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묘사는 주로 게바라 사망 이후 쿠바공산당 선전국에서 발행한 ‘게바라 일기’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선전물에는 1959년 쿠바혁명 직후에 게바라가 쿠바의 반혁명 처벌기관인 ‘라 카바나’(La Cabana)의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서술하지 않거나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라 카바나’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의 ‘체카’(소련 KGB의 전신) 혹은 히틀러의 ‘SS나치친위대’와 유사한 조직으로 반정부 인사들을 강제투옥, 재판 없이 처형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냈던 곳이다. 1970년까지 ‘라 카바나’에서 처형된 쿠바인의 숫자만 하더라도 1만4천명에 달한다. 쿠바 인구가 640만이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숫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일부에서는 “혁명을 위해서는 일부(?!) 악질 반동분자의 처형이 불가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기야 남민전 혁명가 김남주 시인은 남한혁명이 완수되면 300만 명쯤은 처단해야 된다고 말했다고 하니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 안 되는 숫자일지도 모르겠다.

게바라는 ‘라 카바나’의 도살자

단순히 숫자만이 문제가 아니다. 게바라는 처형을 즐기는 자였음이 여러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심지어 한 어머니가 반혁명죄로 체포된 10대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 게바라를 찾아가자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그 소년의 즉결처분을 명령하는 ‘사디스트적 행위’를 보이기도 했다.

게바라의 즉결처분은 게릴라 운동 당시에도 만연했다. 쿠바에서는 현재 우리나라 기준으로 볼 때 빈농에 해당될 수준의 농민들을 악질 대지주라면서 즉결처분했으며 이러한 행위를 “농민들에게 공포심을 주지 않으면 게릴라는 생존할 수 없다”는 속류 마키아벨리 논리로 정당화하곤 했다. 볼리비아에서는 조우한 농민 일가족을 '정부군에게 게릴라의 위치를 알릴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몰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게바라가 휴머니스트라면 히틀러나 스탈린도 휴머니스트가 아닐 이유가 전혀 없다.

흔히 게바라는 청년 저항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록 음악 가수들과 히피그룹이 게바라에게 열광하기도 한다. 심지어 동성연애운동가들이 게바라를 성인(聖人)시 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게바라야말로 록 음악과 히피, 그리고 동성연애자의 적이었다.

게바라는 록 음악과 히피 등을 “미제국주의의 썩은 문화”로 간주, 이에 대한 “말살”을 지시하고 실행에 옮긴 자이다. 달리 말해, 반문화(counter culture) 운동이 게바라를 추앙한다는 것은 유대인이나 집시가 히틀러를 추앙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이다.

게바라의 친손자인 카네크 산체스 게바라도 쿠바를 버리고 멕시코로 망명했는데 이는 카네크가 록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1974년생인 카네크는 현재 카스트로만 비난하고 있는데 록 음악을 정작 탄압한 장본인은 자신의 할아버지 게바라였다.

 

초호화판 생활 즐겨

또 다른 신화는 게바라가 민중적이고 검소했다는 것이다. 게바라는 쿠바혁명이 성공하자마자 요트 선착장과 폭포가 딸린 거대 수영장, 사우나와 마사지 룸이 있으며 욕실만 7개인 거대 저택을 자신의 거주지로 삼아 초호화판 생활을 누린 사람이다. 게릴라전을 할 때도 롤렉스시계를 고집하던 인물이다.

게바라를 우상시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치명적 이야기는 “게릴라전의 천재”로 알려진 것과는 정반대로 “형편없이 무능한 게릴라”였다는 사실이다. 게바라 게릴라전의 신화가 만들어진 전투는 쿠바정부군의 군용열차를 습격한 ‘산타클라라’(Santa Clara) 전투이다. 게바라를 찬양하는 서적들은 이 전투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엄청난 격전이 벌어진 것처럼 묘사되곤 한다. 그런데 막상 이 전투에서 몇 명을 사살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이 전투에서의 사망자는 민간인 2명과 게바라 측 게릴라 2명 혹은 3명 등 모두 최고 5명에 불과하며 정부군 전사자는 단 1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는 전투라기보다는 군용열차 매수사건이다. 전투의지가 없는 정부군은 카스트로에게 돈 35만 달러(50만 달러라는 설도 있음)을 받고 군용열차를 내준 것이다.

그리고 이 군용열차를 불 지르고 사진을 찍어 서방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이 ‘산타클라라’ 전투이다. 사상자가 나온 것은 게바라 게릴라들의 약탈에 분노하고 있던 농민들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투 이외에 게바라가 지휘해서 쿠바 정부군과 싸워 제대로 이긴 전투는 단 한 건도 없다.

이러한 사실은 아프리카 콩고 내전에서도 잘 드러난다. 게바라는 매복에 걸려 계속 패전했으며 콩고 공산주의자들의 무능을 탓할 뿐 직접 교전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이런 무능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볼리비아 게릴라전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게바라는 볼리비아로 가기 전에 현지 언어를 알아야 게릴라전을 할 수 있다며 안데스 인디언들이 주로 사용하는 쿠에추아어(語)을 익히라고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그가 게릴라전 지역의 원주민어는 쿠아라니어(語)였다. 볼리비아에서 게바라는 단 한 명의 볼리비아 농민도 게릴라로 획득하지 못했다. 그의 활동은 볼리비아 산 속에서 정부군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신고 위험을 핑계로 조우한 볼리비아 농민들을 학살하는 것뿐이었다.

게바라 신화의 마지막 장면은 게바라가 용감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적탄에 의해 게바라의 카빈 소총이 고장 나고 권총 탄알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로로 잡혔다가 처형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상은 다르다. 그의 카빈 소총은 멀쩡했으며 권총 탄창에도 총알이 가득했다. 게바라를 포위(?)한 볼리비아 병력은 불과 2명이었다. 그러나 게바라는 손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쏘지 마라. 내가 체(Che)다. 내가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편이 당신들에게 유리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게바라는 소련 공산주의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었던 인물인양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이미 1956년 멕시코시티에서 소련 KGB 요원 니콜라이 레오노프와 접촉한 적이 있다. 또 게바라는 여성 편력이 심한 인물이었다. 물론 이 점을 매력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앞서 언급한 한 30대 여성은 “게바라 같은 인물이면 단 하룻밤이라도 영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제는 게바라의 애인으로서 볼리비아 산속에서 함께 게릴라전을 전개하다가 사살당한 일명 ‘타냐’로 불린 독일 여성이다. 그녀는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소속으로서 게바라와 처음 만난 것은 게바라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였다.

통역관의 자격으로 만난 타냐는 게바라와 같은 침대에서 지냈으며 이 모든 장면은 슈타지에 의해 촬영됐다. 이 정보는 소련 KGB와 공유됐으며 그 후 분케는 KGB와 게바라를 연결시키는 연락원 노릇을 하게 된다.

리버럴 좌익들이 만든 신화

그럼 어떻게 게바라 신화는 만들어지게 됐는가? 게바라는 미국 리버럴 좌익의 언론 플레이 작품이다. 게바라의 게릴라전은 군사적 입장에서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아니 카스트로 게릴라전 전체가 그러했다. 엄청나게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연상하기 쉬운데 2년간의 게릴라전으로 인한 전사자는 양측 모두 합쳐 182명에 불과하다. 카스트로와 게바라를 영웅으로 만든 첫 번째 인물은 당시 뉴욕타임스 기자 허버트 매튜스(Herbert Mattews)였다.

매튜스는 1957년 최고 50명 정도의 카스트로 게릴라군이 위치한 쿠바의 시에라마에스트라를 방문, 카스트로와 게바라를 직접 만나 취재하게 되다. 매튜스는 카스트로를 ‘쿠바의 로빈 후드’로 묘사,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한 달 뒤 CBS 촬영팀이 들어와 이를 영상에 담았다. 이들에 의해 과장된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곧 미국 좌익 리버럴의 영웅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 언론 보도는 쿠바 국내로 역수입돼 카스트로를 쿠바 반정부 운동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쿠바혁명은 카스트로의 농촌 게릴라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도시 봉기 형태로 이뤄졌다. 단지 정부 붕괴 후 정권 및 무력 진공상태를 보일 때 카스트로 게릴라군이 명성을 바탕으로 수도 아바나에 입성, 권력을 장악해 버린 것이다. 당시 쿠바의 농촌 인구 비율은 35%로 쿠바는 이미 상당히 도시화된 국가였다.

슈퍼모델 지젤 번천이 패션쇼에서 게바라 얼굴이 새겨진 속옷을 입고 있다. 자본주의 상업화의 아이콘이 된 게바라.

게바라가 서구 좌익 리버럴의 아이콘이 된 것은 볼리비아 산악에서의 극적인 죽음 덕택이었다. 또 패션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Alberto Korda)의 공로도 크다. 게바라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 즉 검은 베레모를 쓴 게바라의 모습은 코르다의 작품이다. 게바라는 평상시 검은 베레모를 쓰지 않았다. 카키색 군모를 즐겼다. 그러나 코르다에 의해 “젊은 청춘의 상징”이 재탄생된 것이다.

이같이 ‘게바라 신화’를 만들기 위해 무대 뒤에서 활약한 인물로는 알바르토 바요(Alberto Bayo)도 있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 참전자인 바요는 ‘모든 게릴라가 알아야만 하는 150가지 원칙’이란 저서를 쓴 게릴라전 전문가이다.

쿠바혁명 이후 쿠바에 만들어진 게릴라 학교의 실질적 교장은 바요였으며 교관들은 소련과 체코로부터 왔다. 단지 게바라는 이름을 빌려 썼을 뿐이다. 아프리카와 볼리비아에서 보여준 게바라의 모습은 기본적인 게릴라전 전술은 물론 독도법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게바라의 신화가 벗겨지고 그의 민낯이 드러났다. 물론 모든 영웅들의 신화는 다소(?) 과장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게바라를 본받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쿠바는 1959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 오스트리아 보다 높던 나라였다.

게바라를 본받지 말아야 할 이유

탄압받았다는 쿠바 농장 노동자의 당시 임금은 프랑스나 벨기에 농장 노동자보다 높았다. 임금, 가전제품 보급률, 교육수준, 평균 수명 등 모든 사회 지표에서 당시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1위 혹은 2∼3위였다.

그런데 현재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뒤로부터 1위 혹은 2∼3위를 달리고 있다. 흔히 “카스트로와 게바라를 제3세계 영웅”이라고 한다. 이 말만은 맞는 소리일지 모르겠다. 제1세계로 육박해 들어가고 있던 쿠바를 영원한 제3세계 국가로 전락시켜 버린 “제3세계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지금 쿠바 휴양지는 미국과 캐나다인들의 섹스 관광지로 전락되어 있다. 좋은 해변은 대부분은 외국인 전용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다. 쿠바 현지인은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과 허가받은 창녀들 이외에는 접근 자체가 금지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자주’와 ‘반미’를 외치고 있다.

더 한심한 일은 이러한 쿠바를 본받자고 하는 자들이다. 처절하게 가난했던 제3세계 국가를 제1세계 국가로 만들어 놓았더니, 제1세계 문턱에서 영원한 제3세계 국가로 전락해 버린 쿠바를 본받자고?! 그리고 이러한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게바라를 따르자고?!

게바라가 쿠바 공산청년대회에서 한 말이 있다. “청년 시기에 가장 행복했던 일은 내가 쏜 총알이 적의 심장을 뚫었을 때이다”라고. 여기서 말하는 적은 정부군이 아니라 쿠바 산악지대에 거주하던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황성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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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ㄹ 2018-06-24 17:56:51
문재앙 모가지 댕강댕강 오케이?

네리마 2016-09-01 18:44:44
너무 거짓말이 드러나있는데?
커피숍에서 20대 학생이..게바라가 휴머니스트...30대 회사원이 체랑 자고 싶다..
이런말을 한다고????

하하하하.

신상털이 이어서 2015-05-13 02:46:00
근데 이건 성준이 네 독후감이냐 아님 니 논문이냐. 왜 90%를 폰토바가 열심히 쓴 책 그대로 옮기면서도 왜 본인의 저작처럼 쓰는건가? 저자가 ' ~라고 말한다'라는 인용으로 표현을 해야지 않냐. 이런건 남의 자료 뽑고 추려서 졸업논문 짜깁기하는 학생애들이 하는 짓이랑 뭐가 다르냐. 요즘 30대 여성들이 커피숍에 모여 체게바라랑 하룻밤 자고 싶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고?? 우하하하

신상털이 2015-05-13 02:37:04
게베라 벗겼으니 자 그 다음, 이승만이 들어올 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