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름
박수근,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름
  • 이원우
  • 승인 2014.02.2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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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한다. 골목 하나 잘못 들어서면 80년대, 70년대가 된다. 전통찻집과 한글로 표기된 ‘스타벅스’가 바로 옆에서 경쟁한다. 대륙을 뛰어넘어, 해양을 가로질러 한국으로 건너온 형형색색의 눈동자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관찰하는 중이다.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인사동 개최

쌈지길은 그 모든 인사동의 에너지들이 응집되는 명소(名所)다.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은 들러보는 이곳은 ‘가장 한국적인 장소’ 인사동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세계적인 에너지를 뿜어낸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손꼽히는 박수근(朴壽根)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바로 이 쌈지길 맞은편에 위치한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되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의 작품들은 단숨에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은 뒤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우리를 그가 살아냈던 50년대로, 60년대로 인도해간다.

아비의 ‘목숨’으로 태어난 아이

박수근은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나라 밖에서는 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때였고 한반도 역시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나마 박수근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했던 모양이지만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서 갈파한 대로 한 집안의 불행에는 종류가 많은 법.

박수근의 아버지 박형지는 3대 독자였다. 그 시대의 관점에서는 아들이 급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부인 윤복주는 딸만 셋을 내리 낳았다. 며느리 하나를 더 얻어서라도 대를 잇자는 아버지의 요구를 박형지가 거절했던 것은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기도가 하늘에 전해졌던 것일까. 넷째 아이의 울음소리는 우렁찼다. 너무나도 귀중한 목숨이었기에 박형지는 아들의 이름에 목숨 수(壽) 자를 붙였다.

빨래터 (1950s)

소년 수근의 축복은 강원도 양구였다. 고립된 산골마을 같으면서도 북한강 물길은 산 사이 이곳저곳에 길을 뚫어놓았다. 고대에는 군사 요충지였던 이곳은 박수근에게 아름다운 돌멩이들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구멍이 뚫린 채 숱하게 널려 있는 화강암들은 수근의 놀이터이자 원점이 된다. 성인이 된 그가 자신의 아호를 미석(美石)으로 지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거라고 박수근 평전 ‘시대공감’의 저자 최열은 분석한다.

“분명히 이런저런 끝도 없을 바위 전설을 저 어린 소년 박수근이 듣지 않았을 리 없다. 고향을 떠나고서 몇 해가 흘러 문득 별 헤는 밤이면 끝없는 향수에 젖었을 1940년 어느 날 아름다운 바위란 뜻의 미석(美石)을 이름 앞에 붙이는 아호로 지은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향은 그에게 단단하기 그지없을 화강암이었던 게다.”

노상 (1957)

밀레처럼 되고 싶었던 소년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진학한 소년 수근은 일찍부터 그림의 소질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마을은 그의 피사체가 된다. 산으로 들로 뛰어나가 스케치를 해대는 소년 수근의 재능은 도화와 공작 시간에서 언제나 최고 점수를 받았던 그의 성적으로 증명된다.

교실 뒤에 붙어 있던 그의 그림은 늘 교장선생님의 칭찬거리였다. 박수근의 부모 역시 어린 아들의 재능을 높이 샀다. 이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받았던 온전한 형태의 지지야말로 박수근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독창적인 그림 세계를 추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13세의 나이에 롤 모델(role model)을 발견한 것도 그에게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소년 수근의 가슴에 창조적인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프랑스 화가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였다. 마침 나이도 딱 100년 차이가 나는 밀레가 그린 명작 ‘만종(晩鐘)’을 보며 박수근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저는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이 얘기를 듣고 나면 박수근의 그림이 다시 보인다. 두 손을 모으고 숙연하게 고개를 숙인 밀레의 그림 속 여인은 박수근의 그림에 수없이 등장하는 고단한 여인들의 모습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고단함은 세상을 투쟁적으로 바라보며 불만으로 가득 찬 인간의 계급적 고단함이 아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숭고하게 현재를 감당하는 평범한 한국인들의 일상 풍경이다. 박수근은 그 일상을 비범하게 담아낸 화폭의 선구자였다.

앉아있는 여인 (1963)

더 넓은 세상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박수근의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이 찾아온다. 부유했던 집안이 사업 실패로 급격히 몰락해버린 것이다. 더 이상 아버지는 화가를 꿈꾸던 박수근의 희망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수근은 계속 그렸다. 밀레처럼 되고 싶다는 기도를 연신 하늘에 올리면서.

한편 1922년 조선총독부는 조선미술전람회를 창설했다. 화가의 꿈을 가진 신진 예술가들이 전국에서 작품을 보내오면 그 중에서 전람회에 걸 그림을 심사하고 선정하는 등용문이었다. 꿈 하나를 믿고 팍팍한 생활을 감내하던 열아홉 박수근에게 조선미술전람회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박수근은 입선에 선정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된다. 작품 제목은 ‘봄이 오다.’ 나이답지 않게 어둡고 쓸쓸한 톤의 그림이지만 입선의 결과는 그의 인생에 다가올 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1935년 청년이 된 박수근은 생애 첫 개인전을 개최하지만 어머니를 잃는다.

1940년에는 처가의 반대를 뚫고 첫눈에 반한 양가 규수 김복순과 결혼식을 올린다. 김복순은 그의 미래를 위해 기도해준 동반자였을 뿐더러 기꺼이 그림의 모델이 돼주기도 했다. 반복된 입상은 젊은 박수근을 조금씩 조금씩 중앙 무대로 이행시켜갔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됐을 무렵 박수근은 이미 조선미술전람회 9회 입상 경력의 유망주였다.

6·25전쟁이 잠시 혼란을 야기했을 뿐 그의 붓은 멈추지 않고 이른바 ‘미석 화풍’이라 명명된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다. 화강암의 결처럼 얼룩덜룩한 평면 위에 유채로 담아낸 초기 대한민국의 일상적인 풍경들. 그는 인물들의 자세한 표정 하나하나를 묘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관람객은 그의 그림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아기보는 소녀 (1953)

평범 속에 깃든 비범

3월 16일까지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되는 ‘박수근 :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박수근이 남긴 유화 작품 90여점과 수채화와 드로잉 30여점 등 총 120여점을 선보이는 역대 최대 규모의 기획전이다.

김달진 미술연구소에서 소장 중인 다양한 자료와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에서 제공하는 다큐멘터리 영상도 함께 볼 수 있다. 1층부터 4층에 걸쳐 주제별로 작품들이 나뉘어 있지만 관람객들은 초입에 기록된 박수근의 말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를 한 번에 관통할 기회를 얻게 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그 말 그대로 박수근의 그림들은 일상의 풍경을 과장 없이 담아낸다. 감정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판자촌이나 골목길, 청소부 같은 풍경을 마주할 때 종종 극단적인 감정과 계급의식을 표출하는 장면을 보게 되지만 박수근의 그림엔 그런 게 없다. 따지고 보면 그 시절엔 모든 사람들이 다 가난하고 힘들었을 테니 굳이 과장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선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소금을 팔다 졸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우리네 어머니의, 누나와 언니들의 모습이었다. 그 밖에 과일행상, 소금장수, 절구질하는 여인, 아기 업은 소녀, 빨래터 풍경 등이 그가 즐겨 그렸던 소재들이다. 어딜 가든 항상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던 그의 작품들은 시대의 기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시장사람들 (1950s)

“한국 사람들이 박수근의 그림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를 제가 알아요. 그때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거예요. (…) 박수근은 매우 말이 없는 젠틀맨이었고 그림을 팔기 위해 반도호텔 안을 바쁘게 돌아다녔던 것이 기억납니다. (…) 초라한 양복을 입고 두꺼운 안경을 낀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늘 슬퍼 보이는 표정도 기억이 나요.”
- 미국의 소장가 존 릭스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그였지만 가난의 질곡은 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와선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풍경을 그가 봤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1965년 봄 간경화 응혈증을 앓았던 그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그가 기도하던 신의 곁으로 갔다.

사실은 박수근마저도 그 시절을 눈물겹게 살다간 시대의 일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박수근의 눈물겨운 일생까지를 포함한다. 일련의 그림들은 기록사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 무렵의 한국에 대해 눈물겹게 말을 걸어온다. 한참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 시대가 보이는 듯하고 냄새 맡아지는 듯하다. 이 전시회에는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슬픈 따뜻함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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