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만든다. 혼자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때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 더 좋다. 지난 2월 파키스탄 여행이 그러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묘한 노스탤지어도 느꼈다.
파키스탄을 첫 방문한 것은 20년 전인 1994년.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다가 피난 차원에서 잠시 들렸다. 당시만 하더라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념에 금이 가고 있긴 했지만….
1994년 2월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5주년을 맞이해 러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 특집이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보도된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은 지옥 그 자체였다. 1989년 2월 소련군이 철수하자 1992년 친소 나지불라(Najibullah)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삼국지에서 반(反)동탁 연합군이 장안성을 점령하고 동탁을 처단했다고 해서 평화가 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전은 오히려 심화됐다. 반소 항전을 위해 연합전선을 펼치던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사이에서의 악무한적 내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20년전 아프가니스탄의 군웅할거 시대
이는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장안성에 몰려들었던 유비, 조조, 손책, 원소 등과 같은 영웅호걸(?)들 사이에서의 천하패권 쟁탈전이 본격화된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마수드(Ahmad Shah Massoud), 도스툼(Abdul Rashid Dostum), 헥마티아르(Gulbuddin Hekmatyar), 이스마일 칸(Ismail Khan) 등과 같은 일일이 수많은 반소항전 영웅 군벌(war lord)들 사이에서의 군웅할거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이해하게 됐다면 과장일까? 군벌끼리의, 부족끼리의, 아니 마을끼리의 원한과 이권에 얽힌 피의 투쟁, 여자는 물론 남자들도 집단강간을 당하고 온 마을이 몰살당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40피트 컨테이너에 2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우즈벡계(係) 군벌 도스툼은 파슈툰족(族) 200명을 뙤약볕에 놓여 있는 컨테이너에 넣었다가 1주일 뒤에 꺼내보니 다 죽어 있더라는 이야기를 자랑하기도 했다.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다. 인간의 본성, 그리고 국제질서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함께 했던 외신기자들과 미국을 맹비판했다. 미국은 1980년대 반소 아프가니스탄 무장집단을 지원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철수하고 친소정권이 무너지자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신경을 꺼버렸다.
석유가 나는 것도 아니고 소련군도 없는 아프가니스탄. 더 이상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와 상관이 없어 보였다.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 미몽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이었기에 미국의 ‘제국주의적’(혹은 개입주의적) 태도에 대해 비난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반대 입장에서 미국의 비(非)개입주의적 태도를 비판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질서를 세울 힘을 지닌 세력은 미국 밖에 없는데 지켜만 보고 있는 미국의 ‘이기주의’를 비난했던 것이다. 한 외신기자가 수통에 들어 있는 보드카를 들이키면서 말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방치한 죄과를 치룰 것이다”라는 예언자(?)적 발언이 생각난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진공상태는 계속될 수 없으며 반드시 그 무엇인가(something)에 의해 채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는 이슬람주의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이슬람주의는 반드시 미국의 거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다른 외신기자들이 “저 친구 유대인이고, 네오콘이야”라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네오콘?!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을 떠남과 더불어 이 단어는 머릿속에서 일단 사라졌다.
네오콘을 다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사건은 2001년 9·11테러였다. 아프가니스탄을 방치한 죄과(?)를 미국이 치른 것이었다. 9·11 이후 한동안 네오콘 전성시대가 열렸다.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네오콘에 의해 상당 부분 좌지우지되기 시작했으며 그 절정은 2003년 이라크 침공이었다. 네오콘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됐다. 네오콘에 대한 공격도 거칠어졌다 네오콘하면, ‘초강력 보수주의’(ultra-conservatism)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유대인 음모론도 항상 붙어 다녔다. 그러나 2008년 오바마 정권이 들어서면서 네오콘에 대한 관심은 급락했다.
1960년대 네오콘의 태동
네오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파키스탄 여행 때문만은 아니다. 네오콘하면 대외정책만을 연상하기 쉬운데 네오콘은 국제문제보다는 1960년대 말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와 ‘카운터컬처’(Counterculture) 등장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지적·이념적 흐름이다. 특히 네오콘의 ‘보수주의 복지국가론’담론은 재평가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복지국가’는 진보진영의 전유물인가? 아니 현실정치에서 ‘복지’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 것일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윈 스텔저(Irwin Stelzer)가 편집한 <네오콘 읽기>(The Neocon Reader)를 읽었다.
네오콘의 사상적 대부는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이다. 대학 시절 트로츠키주의자였던 크리스톨은 현실(reality)과의 충돌 속에서 “회의적(skeptical)이고 자기비판적(self-critical) 리버럴”로 전환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 과정에서 겪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고뇌도 한 몫 했다. 네오콘의 첫 등장은 1965년 계간지 <퍼블릭인터레스트> (Public Interest)를 발간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에도 네오콘적 경향성의 지식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코멘터리>지(誌)를 중심으로 ‘비판적 자유주의’ 성향의 유대인 지식인들이 훗날 네오콘의 모태가 되는 문화적 담론을 나누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도시 중하층 출신으로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에 환호했으나 1960년대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론에는 실망했다. 이들은 존슨 행정부의 사회공학적 정부 프로그램에 회의를 품기 시작, 이를 사회과학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퍼블릭인터레스트>를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이들은 민주당 혹은 리버럴 진영의 한 일원이었다.
이들이 리버럴 진영과 선을 긋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급진 좌익계열의 학생운동과 결합한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이 1972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부터였다. 민주당이 급진 좌익계열에 의해 장악되고 ‘카운터컬처’(Counterculture) 운동이 번져나가자 이에 맞서면서 리버럴에서 보수진영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잡지 Public Interest와 National Interest
초기 이들은 네오콘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을 ‘네오리버럴’(Neo-liberal)로 불리기를 선호했다. 그러나 모든 용어는 역사성과 사회성을 지니고 있는 법. 비판적 의미로 시작된 네오콘이란 용어가 더 보편성을 띠어 나갔다. 단지 용어상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 네오콘들은 <월스트리트저널>과 미국기업연구소(AEI)와의 결합을 통해 더 이상 리버럴이라 불리기 힘든 존재로 전화(혹은 진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레이건 집권과 더불어 네오콘 지식인들이 레이건 행정부에 가담하면서 그 존재감을 분명히 하게 된다. 그리고 1985년 <내셔널인터레스트>란 잡지를 창간, 담론의 영역을 문화와 사회정책에서 국제문제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아버지 부시와 클린턴 시절 잠시 2선으로 후퇴했다가 아들 부시가 집권하면서 특히 2001년 9·11 이후 정치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클린턴 집권기였던 1995년 <위클리스탠다드>(Weekly Standard)란 ‘네오콘 2세대 잡지’를 창간하고 1997년에는 ‘새로운 미국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the 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 PNAC)란 싱크탱크를 조직했다. PNAC는 훗날 네오콘 음모론의 중심지가 되곤 했는데 실상을 살펴보면 상근 연구원이 불과 5명밖에 되지 않는 소박한(?) 연구기관이었다.
그럼 네오콘이란 무엇인가? 다른 보수주의 흐름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네오콘이 ‘전통적 보수주의’(Traditional Conservatism) 그리고 리버테리아니즘(Libertarianism)과 구별되는 첫 번째 영역은 ‘국가론’이다. ‘전통적 보수주의’도 ‘리버테리아니즘’도 국가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국가의 역할은 가능한 제한돼야 하며 국가의 역할이 비대해지면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다. 그러나 네오콘은 다르게 생각한다. 국가의 성장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natural) 것이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하이에크의 <노예로의 길>에 서술된 국가 개념과 충돌한다.
둘째 이러한 네오콘의 국가론은 곧바로 네오콘의 ‘보수주의 복지론’과 연결된다. 리버테리안은 물론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조차도 ‘복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기존 보수진영의 복지 부정에 대해 네오콘은 “민주국가에서 복지를 부정할 수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이러한 반문은 우선 현실적·실용적 접근에서 시작한다. “복지를 부정하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오콘의 ‘복지국가론’이 단순 선거용인 것은 아니다.
복지를 현대민주국가의 필수요건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좌익이나 리버럴의 복지와는 다르다. 복지는 결코 ‘권리’가 돼서는 안 되며 ‘일시적 피난처’ 역할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네오콘은 ‘자활의지가 있는 가난한 자’(deserving poor)에 대한 ‘선별적 복지’를 강조한다.
셋째, 네오콘은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통주의자들이 ‘문화와 역사’를 강조하고 리버테리안들이 ‘경제’를 강조하는 것과 비교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민주주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democracy)의 불가피성과 중요성에 네오콘의 강조이다. 현대 대중정치에 대해 불신감을 지닌 ‘전통주의자’, 그리고 정치 일반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 리버테리안과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넷째, 네오콘은 현재를 긍정하면서도 현재의 ‘민주적 문화의 쇠락’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 ‘전통주의자’들은 공업화 이전 사회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 소규모 농촌도시 출신이 주축인 ‘전통주의자’들은 현대 대중사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반면 리버테리안은 현대적 자유와 기술적 진보에 대해 환호한다. 네오콘은 도덕과 문화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통주의자들과 연합해 ‘사회적 리버테리아니즘’에 대해 반대한다.
다섯째, 네오콘이 중요시하는 대표적 사상가는 토크빌(Tocqueville)이다. 이는 전통주의자들이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혹은 버크의 미국 버전인 러셀 커크(Russel Kirk)를, 리버테리안들이 아담 스미스(Adam Smith)와 하이에크(Hayek)를 각각 자신들의 사상적 지주로 삼는 것과 비교된다. 즉 현대 미국에 대해 비판적이며 노스탤지어를 보이는 전통주의자들과도 현대(modern)에 대해 상대적으로 낙관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이와 관련 네오콘은 미국 현대사를 긍정적으로 조명하며 미국의 보수주의를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에서 찾으려 노력한다. 그 결과 미국 건국의 3대 문건인 ‘미국 독립선언’, ‘페더랄리스트 페이퍼’(Federalist Paper), 그리고 미국헌법(Constitution)으로부터 미국 보수주의를 도출해내는 작업을 전개했다.
여섯째, 네오콘은 대외정책과 관련, 강한 국가(strong state)를 추구한다. 이 점에서도 고립주의적 성향의 전통주의 진영이나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려는 리버테리안과 구별된다. 네오콘은 힘(power)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자이다. 그리고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국제정치 최고의 교본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확산과 인권 보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윌슨주의적 이상주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 점과 관련, 네오콘 스스로는 자신들은 ‘강성 윌슨주의자’(Hard Wilsonian)라고 규정한다. 목적에서는 윌슨주의자이지만 수단에서는 반(反)윌슨주의자라는 것이다.
거칠게 네오콘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빠진 부분이 많다. 특히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와의 철학적 관계에 대한 부분이 빠졌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하겠다.
황성준 편집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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