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가로운 사내’를 위해
어느 ‘한가로운 사내’를 위해
  • 이원우
  • 승인 2014.04.22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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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인물 이약관이 가상인물 현이립에게
 

(※ 이 글은 현실을 토대로 재구성된 소설입니다. 이탤릭체로 표기된 부분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주 진지하게 말씀을 하시더라고.”

이약관의 귀에 황 편집위원의 목소리가 감긴다. 황은 현이립을 인터뷰하고 돌아온 길이다. 이약관과 그는 2주에 한 번씩 발간되는 보수주의 시사매체 ‘미래세계’를 만든다. 매년 초 명사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올해의 명사로 꼽힌 것이 현이립이다. 그가 무슨 얘기를 그리도 진지하게 했다는 걸까.

“종교 말이야. 신의 존재가 믿어지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부럽다는 얘길 하시더군. 인터뷰 마치고 밤늦게까지 그 문제로 토론을 했어.”
“그냥 오시면 어떡합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황 위원님이 전도를 하고 오셨어야죠.”

“글쎄. 차라리 탈레반을 전도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는데.”

태연하게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남자

현이립이 간암 말기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건 인터뷰로부터 3개월쯤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의 신작소설 ‘한가로운 걱정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가 계기였다.

현이립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사시킨 작품이다. 암에 걸린 주인공은 집 주변을 ‘풀코스 산책’하며 마지막일지도 모를 봄을 만끽한다는 내용이다. 200페이지 남짓한 책에 그의 철학과 사상, 문학성과 예술성이 서정적 풍경 속에서 만개하고 있다.

신작이 나오면 으레 진행되는 일간지 인터뷰에서 작가 현이립이 실제로 간암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슬픈 특종.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항암치료를 거부한 이유였다. 작품을 쓰기 위해서 병원 치료를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많은 글쟁이들이 가슴 아파하면서도 경외감을 느꼈다. 내 몸 앞의 삶 하나를 가누기 힘든 우리 중에서 누가 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올해 서른둘인 이약관의 글쓰기에도 현이립은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학교 1학년, 자유주의(Libertarian) 사상에 호기심을 느낀 이약관은 학교에 개설된 시장경제 특강에 수강신청을 했다. 현이립은 이 특강의 강사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김종석, 박광량 등 내로라하는 자유주의의 실력자들이 기꺼이 학생들 옆에 앉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강연장의 전기가 끊기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몇 분간의 정전 이후 현이립은 태연하게 말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한 번 정전이 되면 언제 다시 불이 들어올지 기약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다르죠. 금세 회복되지 않습니까?”

당시 이약관은 이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더러운 말’이라 생각했던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저렇게 태연하게 변호하는 태도가 놀라웠던 것이다.

이후 이약관은 자유기업원에서 주최한 ‘시장경제 공모전’에서 입상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글쟁이의 글에 들어섰다. 현이립은 그 대회의 심사위원이었다. 도화동의 한 호텔에서 가진 시상식에서 현이립은 이약관에게 신간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선물해줬다.

몇 십 년째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를 구독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권했던 것도 기억에 남았다. 이약관은 참으로 멋진 세계 안쪽으로 자유롭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느꼈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

이후에도 그를 만날 기회는 꽤 있었다. 특강이 있으면 되도록 쫓아다니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지금도 특강에서 만난 한 여학생과 연애 중이니 현 선생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주선을 해준 셈이다.

현이립이 뜻하지 않게 어느 여대생들에게 모함을 당했을 때에는 ‘현이립을 위한 변호’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 한국도 기축통화인 달러를 사용하자는 주장을 포함해 생물학적 관점으로 시장의 진화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언제나 흥미로웠지만 다수의 동의를 얻진 못했다.

비난을 넘어선 욕설과 매도의 십자포화가 그를 때렸을 때도 별다른 동요 없이 묵묵하게 다음 작품을 준비해왔던 현이립이었다. 이약관 역시 여러 차례의 악플공세에 시달렸지만 그럴 때마다 현이립의 말없는 뒷모습은 커다란 힘이 됐다. 언제나 지금처럼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을 살아주시길 바랐다. 모든 사람들이 이념을 도외시할 때에도 마지막까지 이념의 힘을 설파해 주시길 바랐다. 그런 그가 올해 봄을 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한가로운… 사내의 하루’는 한 호흡에 읽어야 할 책 같았다. 다음 날이 여유로운 어느 밤, 이약관은 현이립에게 말을 거는 기분으로 이 책을 잡고 읽어 내려갔다.

내년 봄을 기약할 수 없는 어느 사내가 이 우주의 나이인 137억 년의 10억 곱절의 10억 곱절이 되는 세월 뒤에 나올 일을 걱정하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를 부르며 남겨진 사람들의 고독을 걱정하는 이야기.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벌써부터 그를 고인(故人) 취급하고 싶지는 않다. 작가는 생전에 유산(遺産)을 남길 수 있는 드문 행운의 직업이 아닌가. 그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고, 참신한 생각의 조각(meme)들을 세상에 날려 보내고 있다. 조심스러운 낙관의 태도를 유지하며 경제적 자유의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의 생각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이어받아 글을 쓸 수 있다.

그에 대한 최고의 경의는 그의 글을 읽음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파란 달 아래서, 이약관은 현이립이 믿지 못하는 신에게 조용히 그를 위한 기도를 올려 보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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