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이 위험하다
우리 아이들이 위험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4.05.0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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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1일 대구지방법원은 ‘경북 칠곡 아동학대 사망’ 사건의 계모 임모 씨와 친부 김모 씨에게 각각 징역 10년과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같은 날 울산지방법원은 8살짜리 의붓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계모 박모 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친구들과 소풍가고 싶다”는 딸 이모 양의 머리와 가슴을 주먹과 발로 때려 갈비뼈 16개를 부러뜨리고 부러진 뼈가 폐를 찔러 숨지게 했다고 한다. 같은 날 오전 10시경 경북 구미시의 정모 씨는 26개월 된 친아들의 사체를 100ℓ 쓰레기 봉투에 넣어 자신의 집에서 약 1.5km 떨어진 빌라 앞 쓰레기장에 유기했다가 긴급 체포됐다.

경찰에 따르면 정 씨는 지난 2월 24일부터 열흘 간 집을 비운 뒤 지난 3월 7일 오후 집에 돌아갔을 때 아들이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온라인 게임중독자인 정 씨가 PC방과 찜질방을 전전하는 동안 아이를 먹을 것도 없는 집 안에 방치해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후에도 정 씨는 아들의 사체를 그대로 집 안에 방치한 채 약 보름 동안 PC방과 찜질방을 전전한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뿐만 아니다. 지난 4월 16일에는 여객선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를 향하던 안산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참변을 당했다. 선박이 좌초되자 선장은 방송을 통해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 지시대로 가만히 대기하던 학생들은 결국 참변을 당했고 정작 선장은 가장 먼저 배를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경제위기 안보위기 아닌 가정의 위기

참으로 잔인한 사(死)월이다. 봄노래를 흥얼거려도 모자랄 이 좋은 사(四)월에 여기저기서 곡(哭)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4월의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의 죽음이기에 더 가슴이 아프고, 어른들의 잘못으로 그들을 잃었기에 더 화가 치민다.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고, 가만히 있으라면 물이 턱밑까지 올라와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아이들이다. 그만큼 그들은 연약하고 순진하다. 그래서 어른들이 잘못하면 아이들이 잘못된다. 그리고 아이들이 잘못되면 이 나라 이 민족이 잘못된다. 아이들은 이 나라의 희망이요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 같은 책임의 기본은 바로 부모에게 있다. 부모가 지키지 않는 아이들을 누가 지키고 부모가 가르치지 않는 자녀를 누가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을 책임져주지 않으면 책임져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가정이 중요한 것이다. 가정이 살아야 아이들이 살고 아이들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경제 위기도 아니고 안보 위기도 아니다.

바로 가정의 위기다. 가정이 위기 가운데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위기 가운데 있는 것이고, 자녀들이 위기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위기 가운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아이들이 처한 위기의 첫째는 다름 아닌 가정의 위기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를 토대로 발전한 서구사회는 결혼과 가정을 모든 사회질서의 기본 단위라고 생각했다. 부부간의 성(性)을 서로 보호하고 평생 신의를 지키는 것은 건강한 결혼과 가정, 그리고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조건으로 여겨졌으며 혼전성관계나 혼외정사 그리고 동성애와 같이 결혼 테두리 밖에서 이뤄지는 성적 관계는 건강한 가정과 결혼을 해치는 사회악으로 간주됐다.

이처럼 전통적인 서구사회는 사랑과 성(性)에 대한 인간의 위험한 욕망을 결혼과 가정이라는 제도 안에 묶어둠으로 직업과 공동체 생활에 건설적 참여를 유도하는 한편 혼란과 폭력으로부터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은 이 같은 서구사회의 질서를 180도 뒤바꿔 놓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감정과 개인의 자기표현을 강조했다. 그들은 결혼을 실용적인 동반자 관계에서 낭만적이고 정서적인 관계로 변화시켰다. 그들은 자녀나 결혼의 서약보다 두 연인의 낭만적 사랑을 더 중요시했다. 특히 20세기초부터 시작된 서구사회의 성혁명은 그와 같은 변화의 결정체였다. 그 결과 지난 50년간 서구사회의 결혼과 가정은 거의 다 무너졌다. 이혼율과 혼외출산 비율은 급증했고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친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게 됐다.

여러 사회학적 연구를 살펴보면 이혼과 한부모 가정은 아이들에게 끔찍할 정도로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 미국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부모가정 자녀들이 가난하게 살 가능성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5배나 높았다. 그 아이들은 학교 성적 문제와 학업 중단, 10대 임신, 마약 복용, 범죄 행각과 정신질환 및 법적인 문제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아버지가 없는 자녀들이 감옥에 갈 가능성은 그렇지 않은 자녀들보다 2배나 더 높았다.

사실상 아버지 없이 지내는 소년들의 수감 비율은 매년 5%씩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서구 국가들의 국력 쇠퇴는 이 같은 서구사회의 가족해체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안타깝지만 한국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2011년 OECD가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이혼율은 47.4%로 미국(51%)과 스웨덴(48%)에 이어 세계 3위다. 혼외 출생아 비율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의 혼외 출생자 비율은 2.1% 정도로(1만144명) OECD 국가의 평균 비율인 36.3%(2009년 기준)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해당 통계를 낸 1981년 이후로는 가장 높은 수치다.

이 같이 높은 이혼율과 혼외출산 비율의 급증은 가족해체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그 결과 아이들은 친부모의 가르침과 보호권 밖에 방치되는 위험에 처하게 됐다. 일명 ‘계모사건’이 바로 이 같은 현실을 방증한다. 결혼의 신성성과 영원성에 대한 헌신이 쇠퇴하면서 사회적 책임의식 없이 낭만만을 쫓아가는 어른들의 무책임한 행태가 결국 우리의 자녀들을 위기 가운데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교육위기의 본질은 인성교육 안 되는 것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은 로마제국의 해체는 곧 ‘가족의 해체’에서 비롯됐다고 말한 바 있다. 가족을 지켜야 아이들을 지킬 수 있고 아이들을 지켜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간의 사랑’ 그리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모든 애국의 시작이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처한 두 번째 위기는 바로 ‘교육의 위기’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교육 강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은 곧 대학입시를 의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대학, 원하는 대학에 보내는 것, 그래서 더 좋은 직장,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한 것이 우리나라 교육열의 실체 아닌가? 교육열은 대단하지만 막상 교육의 본질은 잃어버린 것이 현재 교육 강국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할 교육의 본질, 교육의 원천은 무엇일까? 교육의 본질은 한마디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파이데이아’(paideia)라고 불렀던 것으로, 어린 아이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인 것 즉 지(知), 덕(德), 체(體)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꿈을 펼치고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혜와 지식을 가르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의 함양, 그리고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처럼 체력 연마하는 법을 가르쳐 아이들이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해 공동체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인성능력보다는 학습능력을, 책임과 의무보다는 인권을 더 강조하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다.

이 같은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학생인권조례다.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임신을 해도 징계할 수 없고 교사의 권위에 도전해도 체벌할 수 없다면 우리의 교육 현장이 어떻게 되겠는가? 무질서한 난장판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학생들의 인권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권교육 이전에 인성교육이 먼저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가?’보다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먼저 배워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기 이전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법을 훈련받아야 한다. 옳고 그름도 구분하지 못하고 책임의식 없이 자신의 권리만을 내세우는 아이들로 성장한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괴물’로 변하고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그들이 속한 공동체 전체는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풍요는 부(富) 아닌 도덕 속에 존재한다”

18세기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샤를 몽테스키외는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풍요는 부에 있지 않고 도덕 속에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도덕은 풍요를 담는 그릇이다. 우리의 교육이 더 좋은 대학,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리를 누리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나머지 옳고 그름, 책임과 의무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 사회는 반드시 심각한 위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교육을 의미하는 ‘파이데이아’(paideia)의 어원은 ‘paidos’와 ‘agein’의 합성어로서 ‘아이를 인도한다’라는 뜻이다. 교육의 어원적 의미에 맞게 우리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인도자는 올바른 권위를, 그리고 학생들은 그 권위에 대한 순종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부모들은 바람났고, 선장들은 도망갔다. 믿고 따를 만한 권위를 찾아보기 힘들다. 권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불순종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구호까지 등장할 판이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사회의 모습은 약하고 순진한 아이들을 가득 태운 채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와 그 처지가 비슷하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다. 아이들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한 선장이나, 국민적 슬픔의 틈을 타고 들어가 선동질하고 있는 선동꾼들이나 도저히 혼탁해서 봐 줄 수 없다. 가정의 달, 스승의 달 5월을 맞이하며 다시 한번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태희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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