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의 聖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가다
분쟁의 聖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가다
  • 김범수 발행인
  • 승인 2014.06.1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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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산에서 내려다 본 예루살렘성 전경. 고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곳으로 알려진 모리아 산과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황금색 지붕의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 있다.

퀴즈 하나. 이스라엘의 수도는 어디일까?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국제사회는 텔아비브를 사실상 이스라엘의 수도로 보고 있으며 이에 텔아비브에 각국 대사관 등 대부분 국제기관들을 두고 있고 오히려 세계인의 성지 예루살렘성이 위치한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도로 인정하고 있다.

서울 인천공항에서 직항 비행기로 약 11시간. 지난 5월 24일 밤 텔아비브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같은 날 같은 공항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지순례를 위해 입국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난 이스라엘 입국 보안은 생각보다 그리 까다로워 보이지 않았다. 단 기자의 여권에 찍힌 파키스탄 비자 스탬프 때문에 입국이 지연되고 특별 입국심사실까지 거치게 되면서 ‘아 드디어 분쟁지역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도착했구나’라고 실감했다.

기자 일행은 김일수 주 이스라엘 대사님의 배려로 텔아비브 인근 리쉬본에 위치한 한국 대사관저에 행랑을 풀고 1주일 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취재 및 성지순례 일정을 시작했다.

안보문제에 관한 전현직 이스라엘 관료와 전문가, 텔아비브 외교가의 각국 대사, 특수교육 관련 사회활동가 등을 만났고, 북부 국경 골란고원의 벤탈 등 분쟁지역과 예루살렘 갈릴리 가이사랴 욥바 베들레헴 여리고 사해 쿰란 마사다 등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자치구역내 성지와 역사유적들을 방문했다. 동행한 선배가 히브리어와 영어 외에 현지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아랍어와 러시아에 능통하고 중동문제 전문가로서 일정 내내 그곳 현안과 역사에 대한 열띤 토론과 해설이 끊이지 않았다. 여행은 지역문제에 관한 일종의 집중 연수과정 같기도 했다.

 

예루살렘이 성지(聖地)인 이유

텔아비브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남짓, 차를 타고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을 거쳐 모래빛 도시 예루살렘에 도달하자 가슴속 설렘이 일었다. 성경 속에서 수없이 보고 떠올렸던 곳, 22억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16억 무슬림들의 마음의 고향이 있는 곳 예루살렘은 과연 인류의 성지(聖地)였다.

예루살렘성(Old City)은 북동쪽의 무슬림 지역, 북서쪽의 기독교인 지역, 남서쪽의 알메니안 지역, 남동쪽의 유대인 지역 등으로 4등분돼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과 부활 전 묻혔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묘교회,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비아돌로로사 길,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 바위와 예루살렘 성전 터 위에 세워진 이슬람 황금돔. 그리고 무함마드가 꿈 속에서 여행했다고 믿는 곳 위에 세워진 알 아크사 사원, 그리고 고대 예루살렘 성전의 남겨진 서쪽벽인 유태인 통곡의 벽 등.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장소들이 가로세로 약 1km 길이의 동예루살렘 올드시티 안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성지’인 이유는 예수님의 향기가 아직 실제 남아 있다거나 역사적 장소들이 그 자체로 거룩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현지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 결국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삶의 고민들과 욕심,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2000년 전의 성경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 인류 최대의 발견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다른 점이라면 그곳 종교인 혹은 순례자들의 거룩하고자 하는 열망, 그 치열함의 정도였다. 지금도 구약의 명령을 따라 머리와 팔다리에 성경 말씀을 붙이고 다니며 하루종일 평생 성경 구절을 외우는 정통파 유대인인 하레딤들과 오랜 기간 기도로 준비하며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전세계 순례자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의 자취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믿음에 따라 내 마음속에도 동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침 현지 한인교회에서 드린 안식일 샤밧(Shabbat) 예배에서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이 선포됐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니...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

이스라엘 인구 800만명 중 약 600만명이 유대인으로 분류된다. 이중 6% 정도가 검은색 옷을 입고 다니고 수염을 깎지 않는 정통파 하레딤, 30%가 머리에 키파라는 조그만 빵모자를 쓰는 종교적 유대인, 그리고 나머지 64%가 세속적 유대인이다. 매주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다. 금요일 해가 지면서 시작돼 토요일 해가 지면 끝나는 안식일에는 나라 전체의 대부분 상점이 문을 닫고 극장, 커피숍, 대중교통 등도 올스톱 한다.

팔복교회.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8가지 복에 대해 설교(산상수훈)한 곳에 세워진 기념교회. 아래 갈릴리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안식일, 시오니즘, 그리고 불신앙

안식일을 엄격히 지키는 정통파 유대인들과 종교적 유대인들은 이날 일을 하지 않는 데 ‘일’의 범위에는 음식하기, 물건 들기, 전기 스위치 켜기, 알람 맞추기 등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이 때문에 온갖 논란이 생기고 세부 규칙이 만들어지는데 우리가 아는 탈무드의 내용 상당 부분이 바로 안식일의 취지와 적용 범주를 논하며 이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2천여년간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며 디아스포라 생활을 하면서도 안식일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철저히 지켜왔고 이것이 유대인 박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는 한 유대인 시인의 말이 와 닿았다.

유대 종교인들이 예루살렘성내 통곡의 벽 앞에서 토라를 읽고 있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초정통파 유대인 하레딤들은 군대도 안가고 세금도 내지 않아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텔아비브와 인접한 도시 헤르츨리아를 가다보면 도시의 이름을 딴 헤르츨(Herzl)의 얼굴과 몸통이 종이 패널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우상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경 말씀 때문이라고 한다.

헤르츨은 시온주의의 창시자이며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아버지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는 1895년 저술한 ‘유대국가(The Jewish State)’를 통해 유대인들이 유럽을 떠나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이상을 처음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헤르즐이 ‘유대국가’ 초고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 처음 보여줬을 때 그 친구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눈물은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새 꿈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 아니라 ‘내 친구가 드디어 미쳤구나’라고 생각해서 흘린 동정의 눈물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불과 반세기 전만해도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꿈’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50년만에 실제 그 꿈, 기적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치의 강제수용소 가스실에서 죽어간 600만명의 유대인 희생자들이 그 꿈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토록 처참한 박해와 탄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유대인 스스로의 나라를 갖는 길이라는 것을 국제사회에 확실히 인식시켰기 때문이다. 상당수 유대인 신앙인들은 죽음의 가스실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언급된 대로 오늘날 60%가 넘는 대다수 이스라엘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 홍해를 가르고 사막에서 ‘만나’로 먹게 하신 모세를 통한 기적과 2천년만의 이스라엘 국가 재건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고대와 현대의 유대인들의 동일한 불신앙, 그것은 우리,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북부 시리아 국경에 위치한 골란고원 베탈고지에 시워져 있는 푯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창업국가

현대 이스라엘은 하이테크의 나라, 창업국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가정 90%가 사용할 정도로 태양광 에너지기술이 발전돼 있고 미국 다음으로 창업과 신생기업, 나스닥 등록 기업 숫자가 많다. 준전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100대 첨단 기술 기업 중 75개가 이스라엘에 연구소 또는 생산 기지를 두고 있을 정도다. 또한 대표적으로 세계적인 농업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 강수량이 적은 사막지대에서 파이프를 통한 용수를 통해 가로수와 잔디를 키우고 각종 식물 과일 채소 등을 재배해 수출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서부 지중해연안 지역은 청량한 날씨와 맑고 깨끗한 바다와 해변이 있는 평화와 번영의 땅으로 느껴졌다. 총기를 들고 ‘설렁설렁’ 다니는 주변의 군인들만 없었다면 지속되고 있는 아랍 국가들과의 분쟁은 떠올릴 수 없고 마치 캘리포니아 태평양 해변이나 유럽 남부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한편 이스라엘 군인들의 자유분방함은 군기가 빠진 것이 아니었고 장교와 사병의 구분이 없고 모두가 평등하며 격식을 따지지 않고 당당하고 도전적인 이스라엘 특유의 ‘후츠파(chutzpah)’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기원전 1세기 헤롯왕이 건설한 북부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가이사랴와 예루살렘과 유럽의 관문이었던 남부의 항구도시 욥바는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고도(古都)로 고대의 영광과 번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성경속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인 사마리아 유다 땅은 현재 팔레스타인 치하에 있고 블레셋 민족 등이 있던 서부 지중해 연안이 이스라엘 땅으로 돼 있다는 사실이다.

가이샤라. 이스라엘 서북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항구도시로 로마 통치시기 헤롯왕이 건설했고 이후 십자군 원정군의 진지로도 사용됐다.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에게 세례를 베풀고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전 갇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원형극장과 마차경기 스타디움, 목욕시설 등 유적이 남아 있다. 

갈라진 땅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아기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로 알려진 여리고, 인류 최대 발견 중 하나로 손꼽히는 2000년전 성경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 등도 모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치하의 웨스트뱅크(요르단강 서안) 내에 위치해 있었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 이후 동부 웨스트뱅크와 서부 가자지구, 북부 골란고원을 차지했지만 이 지역을 영토로 완전히 편입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자치를 일부 인정하고 있는 애매한 상황인 것이다. 웨스트뱅크내 팔레스타인 자치구는 한눈에 보기에도 서부 이스라엘 지역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9m 높이의 벽과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는 등 군사적 긴장이 감돌고 있었던 것뿐 아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크게 낙후돼 있었고 사실상 국제지원을 통해 연명하고 있었다.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 해발 -418m에 위치한 사해의 염도는 일반 바다물보다 5배나 높은 30% 정도여서 드러누워 책을 읽을 수 있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불행을 이스라엘 탓으로 돌리며 싸우고 있었지만 문제 해결의 본질은 정치적인 협상이나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경제적 발전이라고 생각됐다. 우리나라는 코이카(KOICA)를 통해 팔레스타인에 연 200만달러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기금이 단순한 경제적 지원보다 소기업 창업지원 등 팔레스타인들의 경제자립을 위한 데 집중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봤다.

모든 것을 잊고 ‘노는’ 시간도 있었다.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 해발 -418m에 위치한 사해에서는 염도 30% 물에 몸을 담그고 둥둥 떠 미래한국을 읽어보기도 했다. 1주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대한항공 비행기 안에서는 출국 직전 마감했던 미래한국 최신호를 만나 볼 수 있어 또한 반가웠다.


글·사진/김범수 발행인 www.kimbumso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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