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색다른 역사학자를 만나다
조금 색다른 역사학자를 만나다
  • 이원우
  • 승인 2014.08.0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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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KJ&M 인문경영연구소 임용한 소장이 말하는 조선, 그리고 중국
 

한국사를 전공한 학자들의 좌편향은 차라리 하나의 패턴이고 숙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간혹 속마음으로는 ‘전향’을 했다는 학자들의 후일담도 들려오지만, 그런 학자조차도 여전히 공개석상에서는 민족주의적 논변으로 일관한다. 역사학자들의 좌편향은 이제 하나의 생활 기반이자 공동체의 규칙이 돼버린 걸까. 상황이 이러한 까닭에 도도한 ‘왼쪽 퍼레이드’에서 벗어나 색다른 주장을 개진하는 학자를 보면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KJ&M 인문경영연구소 임용한 소장을 그중 한 사람으로 분류하면 어떨까.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경희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임 소장의 글에는 그 흔한 반미(反美)도 민족주의도 없다. 역사의 교훈을 더 나은 현재를 만드는 데 활용한다는, 우리가 흔히 역사학자들에게 기대하는 기본 덕목을 묵묵하게 실현하고 있을 뿐이다. 아담한 사무실에서 조용하게 새 책을 준비하고 있는 그를 붙잡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 한국사뿐 아니라 서양전쟁사까지 다루고 계신데요. 전공은 조선 전기라고 들었습니다. 곧바로 여쭤보자면, 조선은 어떤 나라였습니까?

한 마디로 하면 농업사회였죠.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농본사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와는 완전히 달라요. 조선에 대해 얘기할 때는 바로 그 차이점에 유념하면서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도 굉장히 서비스업 위주로 가 있잖아요? 물론 그 안에 여러 문제는 있겠지만 구조는 최첨단에 가깝죠. 산업사회에서만 살아온 입장에서 조선시대를 똑 같은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 조선만 그랬나요? 중국 따라하다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물론 농본주의(農本主義)가 중국의 고전을 모델로 하고 있는 면은 있죠. 하지만 중국은 세계 최대의 무역국가였고 상업국가였다는 점을 짚어야 돼요. 반면 조선은 철저한 농업국가였죠. 그렇다 보니 조선시대의 많은 사상이나 제도, 풍속 안에 농본사회의 것들이 남았어요. 가만히 한국인의 심성을 보면 아직도 농본적인 구조가 남아 있잖아요?

“조선은 상상을 초월하는 폐쇄적 농본사회였다”

- 특정 정치인을 언급하고 싶진 않지만 서울 같은 메가시티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누군가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군요.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조선)의 것들을 지향하는 면이 있죠. 완전히 3차 산업 위주로 가고 있는 국가에 살면서도요. 좋은 걸 계승 발전하겠다는 취지는 훌륭하지만 지금에 와서까지 농민적인 사고를 이어가선 안 돼요. 산업사회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단순히 과거의 것을 부활시키고 비슷하게 하는 게 계승과 발전이 아니거든요. 그런 건 오히려 우리 발목을 잡아요.

- 농업을 부각하고 상업을 낮게 보는 분위기는 ‘돈’에 대한 편향적 사고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집 사는 걸 ‘투기’로 보는 관점 같은 거죠. 기본적으로 자기 집을 갖고 싶은 욕망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물론 한참 경제가 성장할 때 집주인들이 세입자에게 못되게 구는 경우들이 있었고, 급속하게 성장하다 보니 고칠 부분이 많은 것도 맞죠. 하지만 원론적인 부분에서 상업사회 그 자체를 비리의 온상으로 몰아가는 건 문제가 있어요.

- 이것도 조선시대 유산일까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네 글자가 한 마디로 정리하고 있듯이 조선시대 사람들의 상업에 대한 폄하도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실학자라는 성호 이익조차 상업을 싫어하고 농본사회를 추구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조선시대 상업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는 하나 짚어야 할 점이 있어요. 조선에 존재했던 상업이라는 것의 실체 자체가 매우 유약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에 상업이 좀 있었던 줄 알아요. 성호 이익의 주장을 확대 해석하는 분들은 ‘금융자본의 폐단과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그때 이미 지적했다’고 말하는 걸 보는데 실상 조선은 자본주의 근처도 못 갔거든요.

상인도 없고, 상업이란 걸 말하기 이전에 일단 돈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다가 처음 생긴 거였어요. 중국에선 춘추전국시대 때 겪은 문제점을 뒤늦게 경험하면서 느끼는 원시적 반감을 ‘고귀한 사상’처럼 포장해선 안 된다는 거죠.

- 결국 기존 농본체제를 감싸고도는 배타주의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선생님은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에서 묘사한 장면을 떠올려보면 조선의 신분제는 정말 심각했던 것 같은데요.

사실 신분제는 우리 역사에서 많이 창피한 부분이죠. 왜냐하면 너무 오래 갔거든요. 제도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고 해도 관습적으로는 더 오래 갔어요. 근데 이것도 결국은 농업사회라서 그런 거예요.

- 신분제 고착화가 농본주의 때문이라고요?

생각해보세요. 상업이 발달하면 돈이 신분을 이기거든요. 근데 우린 그런 걸 경험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신분제가 와해되면서 양반이 늘었죠. 평민이 돈을 벌어서 양반계급을 우습게 만든 게 아니라 정부에서 세금 걷느라고 양반 신분을 팔면서 양반이 늘어난 거예요. 신분제가 깨진 게 아니라 관습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겁니다. 평민과 부르주아의 이분법을 비웃었던 게 유럽 사회인데 우리는 그런 거 없이 모두 존경하고 ‘전통’이라고 미화를 했거든요.

임용한 소장 저서들

중세-근대가 뒤엉키며 불만만 커지는 한국

- 하긴 지금도 족보를 산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보면 화폐의 물신화에 대한 비판이 나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 과거 가치들이 사라지고 돈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된다는 거죠. 한국인들도 감정적으로 이 부분에 굉장히 동조를 하는데, 감정적으로 욕만 하지 그게 신분제를 깨고 사회를 하나의 가치로 재정립하는 데 공헌했다는 사실은 빼먹어요.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돈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요. 중세적인 관점과 근대적인 관점이 필요에 따라 뒤섞이면서 불만만 커져 가는 거죠.

- 화제를 중국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조선이 극소수의 양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지만, 그 양반 사대부들은 중국 앞에서 맥을 못 췄는데요. 그 친중적 태도가 아직까지 이어진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그 얘긴 이 자리에서 다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닌데요. 일단 사대주의라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서적인 사고방식’이 아니에요. 현실적인 거죠.

조선이 살던 세계는 동북아시아가 다였어요. 당연히 최강자는 중국이고, 제 책에도 썼지만 한반도에 가장 위험한 건 중국이 아니라 만주에 있던 민족들이거든요. 침공의 주체도 자세히 보면 다 그쪽이고요. 나당 전쟁 이후 중국은 직접 침공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전략적 외교구도 때문이기도 했어요. 일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중국과 한반도가 한 편이 되고 만주세력과 몽고를 견제하는 게 동북아 국제정치의 틀이었거든요.

- 그래도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은 대중(對中) 사대주의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이는데요. 병자호란 이후 삼전도의 굴욕 같은 케이스가 대표적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또 다른 사연이 있게 마련이에요.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유는 있다는 거죠. 자세히 보면 자존감 한 번 살려보겠다고 시도했다가 그렇게 된 경우가 많아요. 그런 전반적인 사항들을 ‘너희는 원래 이런 애들이었다’고 비하하는 게 바로 일본에서 유포한 역사관인데, 우린 식민사회를 극복하자고 하면서 이런 극복에는 좀 무디죠.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그런 식의 동맹이 만들어진 상황이 있다고 봅니다.

- 현재의 국제외교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뭘까요.

대한민국이 미국하고 가까워졌던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잖아요? 지금도 우리는 초강대국들 사이에서 살고 있어요. 이 맥락에서 자주(自主)를 한다는 건 자존심 부리고 행패를 부리자는 건 사실 아니거든요. 그건 그냥 깡패지 자주가 아니에요.

진짜 자주는 ‘이익’을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려면 냉철하게 판단해서 상대방이 더 강하다는 걸 인정하는 절차가 필요하죠. 그렇다고 중국이나 미국 같은 큰 나라들이 다른 나라한테 깡패 짓을 하지도 않거든요? 오히려 큰 나라는 주고받는 거래관계를 유지하면서 관계를 끌고 갑니다.

한미 FTA 같은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미국 같은 초강대국하고 무역을 하는데 100% 우리 이익만 추구한다는 게 가능한가요? 그럼 우리가 약소국하고 FTA 맺을 때는 100% 그들의 이익을 보장해주고 있나요? 그런 가계부 같은 논리에서는 이제 벗어날 때도 됐다는 거죠.

“자존심 내세우는 게 自主는 아냐”

- 말씀하시는 것 들어보면 왠지 주변에 동료 사학자들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공격당하는 경우는 없으신가요?

공격당할 만한 행동을 안 해요. 사무실에 뜻 맞는 사람 셋이 딱 모여서 있거든요. (웃음) 책도 뭐 그렇게 폭발적으로 팔리는 게 아니어서 이슈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소수의 팬들만 읽는 거죠.

- 도대체 한국 사학계는 왜 이렇게 폐쇄적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가끔 보면 무슨 종교단체 같기도 합니다.

‘절대 넘으면 안 되는 선’이 몇 개 존재하거든요. 거기에 맞춰서 돌아가니까 (색다른 의견이) 잘 안 보이는 거죠. 사실 세상은 엄청나게 빨리 변하고 있는데…. 저는 80학번이라 그런지 감정적으로는 80년대하고 지금하고 다른 걸 모르겠거든요. 근데 실제로 보면 엄청나게 바뀌었잖아요. 80년대엔 백화점 매장에 물건도 못 내놓던 삼성이 세계 1등을 하는 세상이 됐어요.

KBS 드라마 '정도전'

- 세상이 바귀어도 사람들은 계속 ‘사극’을 보는데요. 최근 KBS 드라마 ‘정도전’ 덕분에 그에 대한 관심이 늘기도 했는습니다만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일단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도전이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모든 일을 혼자 다 한 건 아니었어요. 여러 인재들의 노력이 제도 개혁을 가능케 한 거고, 다만 정도전은 그 안에서 자기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으로까지 나섰던 거죠. 세상은 누가 혼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중에 가면 천하의 정도전도 실수를 해요. 혈혈단신으로 성공한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만이 갖고 있는 약점이 존재하는데, 정적들이 바로 그 부분을 파고들거든요. 정도전은 결국 그걸 이겨내지 못하죠. 요즘 생각해 보면 동료들이 없어서 그래요. 그런 면에서 좀 안 된 사람이고 외로웠던 사람이죠.

- 만약 정도전에 대해 쓰신다면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싶으신가요?

독자나 시청자들의 삶에 교훈을 주고 싶다면 다른 부분에 주목해도 좋을 것 같아요. 불공평함 속에서 살아온 사람은 결국 그 속에서 약점이 나오거든요. 자기가 억울하게 살았다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결국 나중에 독약이 되고 말아요. 요즘의 정치인들 중에도 그렇게 되는 사람이 많은데 자기가 권력을 잡으면 그 마음에서 벗어나야 하거든요. 가장 객관적인 존재가 되는 걸 지향해야 하는데 보통은 자기 합리화를 하죠. 그러면서 실패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생각할 때 드라마도 그 부분을 강조하면 어땠나 생각이 들어요. 물론 이건 제 생각이고, 실제로는 그 심리를 반대로 부추기는 경우가 더 많지만요.


인터뷰/사진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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