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우리에게 ‘사이코패스’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이코패스’를 보여 주었다
  • 정용승
  • 승인 2014.09.2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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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오늘] 범죄조직 지존파, 9월 21일로 체포 20년

‘인두겁을 쓴 악마’ ‘쓰레기 같은 놈’ ‘잔인무도한 범죄자’ ‘엽기적인 범죄’….

사이코패스(psychopath, 일명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라는 단어가 한국에 상륙하기 전, 그리고 ‘반사회적 범죄’에 대한 학문적 정의조차 내려지기 전 한국 사회는 이 사건을 위와 같은 식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통일되지 않은 단어가 난무했던 까닭은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전에 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을 줄 정도로 상상을 벗어난 범죄였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4년 9월 21일 전원 체포된 이 범죄 집단의 이름은 ‘지존파’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지존파 사건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사회에 불만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 살인을 저지른 범죄’ 정도로 밖에는 요약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다 보니 지존파가 일반적인 살인 사건과 차별화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헤쳐보자.

지존파의 결성은 1992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라남도 출신인 김기환은 당시 간간이 막노동을 하거나 도박 등으로 생활하던 26살 청년이었다. 김기환은 이런 생활로는 많은 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사람을 납치해 돈을 벌 것을 결심하게 된다.

혼자는 무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를 만한 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신과 같이 할 자들을 고르는 기준은 단순했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할 것, 단순하고 무식해 자신을 맹종할 것. 그렇게 1993년 4월 경 자신의 학교 후배인 강동은, 강문섭, 문상록, 송봉우, 김현양 등과 함께 지존파를 결성하게 된다. 후에 강동은은 교도소에서 알게 된 백병옥을 조직원으로 포섭하게 된다.

 

‘나와 처지가 비슷할 것, 나를 맹종할 것’

결성은 의외로 쉬웠다. 조직원은 모두 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그들의 개인사를 살펴보자. 두목인 김기환은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성격이 온순하고 머리도 좋은 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중학교 졸업을 마지막으로 각 지방을 오가며 막노동과 범죄를 저질러 왔다고 한다.

강동은은 중학교 졸업 때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선배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한 후 학교를 중퇴했다. 그 후 가출해 서울 등지에서 막노동을 했다. 김현양도 별 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버지 사망 후 재혼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그는 중학교를 중퇴한 후 공장에서 잡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상록도 아버지 사망 후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인생을 비관해 왔으며 경기도 성남으로 주소를 옮긴 후 막노동과 강·절도 범행 경력이 있다. 그의 애인인 이경숙은 1992년 대전의 모 주점에서 영광읍 모 주점으로 옮겨와 접대부로 일하던 중 강동은을 만나 동거해 왔다. (국민일보, 1994. 9. 22)

이렇듯 개인 성장 배경이 불우하거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들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고 세상이 그들을 배척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1993년 4월에 불거진 대학입시 부정사건은 이들의 조직을 단단하게 결속시켰다. 이들은 사회에 대한 분노를 내뱉으며 “더러운 인간들을 청소하자” “잘 살고 잘 먹고 목에 힘주고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계획적인 범죄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이들이 결정한 ‘지존파’라는 조직명은 영화에서 가져왔다고 언론을 통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원래 그들은 헬라어로 ‘야망’이라는 의미를 가진 ‘마스칸’으로 활동했지만 당시 지존파를 검거했던 고병천 형사가 범죄를 저지른 조직에 ‘야망’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 ‘지존파’로 바꿨다고 고 형사는 자신의 회고록 ‘어느 난쟁이의 우측통행’에 밝히고 있다.

김기환을 두목으로 하는 조직인 지존파는 결성하며 몇 가지 행동강령을 정한다. △돈 많은 자들을 증오한다 △돈 많은 자를 납치해 금품을 갈취하며 납치한 자는 반드시 죽인다 △각자 10억 원을 모을 때까지 범행을 계속한다 △조직을 배반한 자는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죽인다 △여자는 어머니라도 믿지 마라 등이다. 행동강령에서도 알 수 있듯 돈에 대한 맹신과 돈 있는 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그들이었다.

이들은 결성 초기부터 철저히 계획적이었고 치밀했다. 범죄를 준비하기 위해 각종 책과 영상을 섭렵하며 일반인이 생각하기 어려운 범행수법을 연구할 정도였다. 그들은 관련 영화와 교도소의 생활을 담은 서적 등을 참고해 범행 방식을 구체화 했다.

책과 영상만 참고한 것이 아니다. 1994년 7월 지존파는 조직 결속을 위해 지리산에서 칼 한 자루만 가지고 1주일을 버티는 소위 ‘지옥훈련’을 하기도 했다. 같은 해 5월에는 김기환의 고향에 자신들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아지트 지하실에는 조그만 철창 감옥을 만들고 시체를 은닉하기 위한 소각로를 설치했다.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전력검침기까지 달기도 했다. 범죄를 위한 ‘철저한 준비’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지트를 만들 돈을 모으기 위해 막노동을 했다는 것이다. ‘범죄’를 위한 ‘정상적인 행위’였다.

“하루에 개 두 마리를 잡은 것에 불과하다”

이제 그들이 저질렀던 범행들을 되짚어보자. 1차 범행은 지존파 결성 후 바로 이뤄졌다. 1993년 7월 초 그들은 살인을 저지른다. 물론 계획된 살인이었다. 더욱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은 이 계획된 살인의 목적이 ‘실습’이었다는 것이다. 살인의 예행연습이었던 셈.

그들은 밤 11시 경 대전 유성구 송정동 근처 버스 정류장 앞길에서 혼자 걸어가는 피해자 최미자를 발견하고 죽인다는 협박을 하며 부근 다리 밑으로 끌고 갔다. 다리 밑에서 그들은 피해자를 집단강간하고 인근 야산으로 재차 끌고 가 다시 한 번 집단강간을 했다. 강간 후 그들은 피해자의 목을 졸라 살해해 암매장했다. 기존의 결성목적인 ‘부자 증오’와는 거리가 있는 참혹한 범죄였다.

1차 범행이 살인 예행연습이었다면 2차 범행은 배신자 처형이었다. 조직원이었던 송봉우는 1차 범행 가담에 대해 후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결국 조직에서 관리하던 2000만원 중 300만원을 인출해 부천으로 도망갔지만 이내 덜미가 잡혔다.

그 후 그에게 용서해주겠다고 거짓말을 한 지존파는 송봉우를 대전으로 데려가 “개를 잡아먹으러 간다”는 말로 속이고 산에서 살해한다. 당시 송봉우는 18살로 미성년자였다. 더욱 잔인한 것은 살해 당시 두목 김기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머지 조직원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송봉우를 경쟁적으로 더욱 잔인하게 죽였다는 것이다. 자세한 묘사는 생략한다. 김기환은 훗날 1심 법정에서 이에 대해 “하루에 개 두 마리를 잡은 것에 불과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3차 범행은 2차 범행과 시간차가 있다. 1,2차 범행이 1993년 7월과 8월에 이뤄진 반면 3차 범행은 1994년 아지트 완공 후 시행됐다. 본격적인 계획살인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두목 김기환은 3차 범행에 참여하지 못했다. 1994년 5월 김기환이 중학교 1학년 여자 아이를 강간해 징역 5년형을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됐기 때문이다. 그 중학생은 선배의 조카였다. 그렇다고 해서 3차 범행이 김기환과 관련 없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교도소에서 면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범행을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존파는 9월 8일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송촌리 부근 도로가를 지나가던 그랜저를 자신들의 차로 막아섰다. 운전자(피해자 이종완)가 내리자 그에게 가스총을 쏴 제압하고, 옆에 타고 있던 이순이를 칼로 위협해 아지트로 끌고 갔다.

 

목표는 ‘그랜저’

아지트에서 그들은 이순이를 윤간하고 이종완에게 돈을 요구했지만 돈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비밀유지 차원에서 그를 살해하기로 한다. 잔인한 모습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음주운전 중 교통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애인인 이순이에게 그를 살해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조직원들이 이종완의 팔과 다리를 누르고 이순이에게 비닐봉지로 애인의 코와 입을 막도록 강요했다. 결국 질식사한 그의 시체를 그랜저 운전석에 앉힌 후 계곡으로 밀어 떨어뜨려 시체를 유기했다. 이순이는 죽이지 않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는 조직원이었던 김현양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상록과 말다툼이 있었지만 그녀를 살려두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김현양의 연정만이 그녀를 살해하지 않은 이유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평소 김현양은 여성을 증오해 “어머니도 죽이고 싶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는 점이다. 지존파 조직원들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게 아닐까.

4차 범행은 3차 범행으로부터 얼마 안 된 13일에 감행됐다. 성남 남서울 공원묘지에 주차돼 있는 그랜저 차량을 발견한 뒤 벌초를 하고 있던 그랜저 주인들에게 다가가 “타이어에 바람이 빠졌다”는 말로 유인한 뒤 가스총을 쏴 항거불능상태로 만들고 아지트로 납치했다.
피해자 소윤오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사장이었는데 지존파는 그에게 8000만원을 요구한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지존파는 증거인멸을 위해 소윤오와 그의 처 박미주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지존파는 그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인질로 잡아두고 있던 이순이에게 공기총으로 살해할 것을 강요했다.

소윤오를 그렇게 살해한 뒤 박미주는 대검으로 목 뒷부분을 찔러 죽였다. 이들의 사이코패스 적인 모습은 이 때 절정에 달한다. 이들의 사체소각을 위해 사체를 절단한 뒤 소각로로 운반하는 과정에서 김현양이 박미주의 유방을 절단해 인육을 먹은 것이다. 검거 후 김현양은 인육을 혼자 먹었다고 진술했고, 왜 먹었냐는 질문에 “인간이기를 포기하려고”라는 짧은 대답을 했다. 이들은 사체소각 시 나오는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삼겹살을 함께 구워먹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 계획했던 3차, 4차 범행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나온다. ‘그랜저’다. 당시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자동차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랜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두목 김기환도 교도소에서 조직원들에게 “고급 승용차를 탄 사람을 대상으로 납치해 아지트에 감금한 뒤 고문하고 돈을 받아낸 후 죽여라”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살해한 사람들은 ‘있는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처지와 비슷했던 ‘없는 자’에 가까웠다. 처음 살해된 최미자는 23살의 여공이었다. 집도 가난했고 아버지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공장에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3차 범행에서 살해된 이종완은 야간업소에서 밴드마스터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4차 범행의 피해자 소윤오는 자수성가한 중소기업 사장이었고 빚을 내 새로 인수한 공장 문제 때문에 고군분투하고 있던 차에 살해를 당한 것이었다. 소윤오 부부 슬하에는 어린 자녀들도 있었다. ‘있는 자’를 증오해 죽이고자 했던 지존파의 마수는 오히려 자신들의 처지와 비슷했지만 열심히 세상을 살고 있던 사람들을 향했던 것이다.

4차 범행 후 지존파는 조직적인 범행을 위해 한 단계 더 앞으로 나간다. 백화점의 주요 고객 명단을 입수하고 체력단련을 계획했으며 망원렌즈가 부착된 공기총, 전자봉, 전기충격기, 칼 등을 구입했다. 또한 탄광에서 일할 때 훔친 다이너마이트 21개, 뇌관 14개 등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그랜저를 타고 있던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별해 범행을 저질렀다면 이제부터는 더욱 치밀하게 범죄를 기획한 것이다.

끝까지 분노했던 지존파

그러나 그들의 질주는 거기까지였다. 김현양이 다이너마이트 조작을 잘못해 머리와 손에 부상을 입어 근처 병원으로 가던 중 동행했던 이순이가 병원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경찰에 신고해 지존파의 전말은 사회에 공개됐다. 그리고 1994년 9월 18일 지존파 일당이 검거되기 시작했다.

검거 후에도 그들에게서 반성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조직원은 살해 현장을 재연하며 미소를 보였고 김기환은 “여자는 어머니라도 믿지 말라고 했는데, 바보 같은 것들”이라며 조직원을 질책하기도 했다. 김현양은 “어머니도 내 손으로 못 죽여 한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세상이 이렇게 만들었다”며 책임을 회피하기도 했다. “더 많이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한이 맺힌다”고 인터뷰를 하는 모습에서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그들이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김기환의 “전두환, 노태우는 무죄인데 나는 왜 유죄야”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지만 당시 자칭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던 자들과 좌익세력들은 은근히 그의 말에 동조하기도 했다.

1995년 5월 27일 법원은 지존파 6명 전원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고 같은 해 11월 2일 형은 집행됐다. 눈여겨볼 점은 그들이 처음에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격렬하게 표현했지만 갈수록 이런 모습이 잦아들어 사형이 가까워 올 즈음에는 종교에 귀의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형 한 달 전, 김기환은 “제가 저지른 사건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잘못됐음을 처음으로 고백한다”고 말했으며 김현양은 “지난 날 사탄의 굴레에서 사회를 어지럽히던 김현양이 하나님의 종이 됐다고 전해 달라”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지존파 사건은 희대의 살인마들이 모여 사회에 대한 분노를 무고한 일반인들에게 풀어버린 사이코패스 범죄의 시작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그 사건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사이코패스 범죄 소식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수법도 더욱 잔인해져 오원춘의 토막살인 사건, 포천 고무통 살인 사건, 존속살인 사건 등 지존파 사건에 버금가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존파가 던졌던 충격의 여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일까. 1997년 12월 이후 대한민국은 아무리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에 대해서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이 ‘적응’은 옳은 것일까? 지존파 사건은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용승 기자 jeongys@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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