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으로 할 수 없는 것들
'도덕'으로 할 수 없는 것들
  • 미래한국
  • 승인 2014.10.0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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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우리 사회는 또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전직 대통령의 투신자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발하자 추모라는 감정의 덩어리가 분노라는 불길에 활활 타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 2학년 2학기에 재학 중이었던 필자는 분명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교정 곳곳에는 추모의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넘실거렸고, 중간 중간에는 “이명박이 죽였다”는 살벌한 문구도 눈에 띄었다. 강의를 마치면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덕수궁 근처에 있는 분향소를 찾아가기도 했다(필자 역시 한 여학생의 권유에 이끌려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았다). 학내 동아리에서는 일정 금액을 갹출해 자체 분향소를 설치하기도 했고, 시국선언을 준비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들끓는 청춘들에게는, 아무래도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이슈였나 보다.

필자가 속해 있던 학과에서도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당시 1~2학년 학생들이 MT를 가기로 돼 있었는데, 그때 노무현 대통령 사망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러자 04학번의 모 선배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시기적으로 MT를 갈 만한 상황이 아니라며 어쨌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이 ‘시민적 책임성을 추구해야 하는 대학생’으로서의 자세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익명게시판은 ‘정치학도로서의 자세’라는 거창한 주제를 놓고 공방을 이어갔고 결과적으로는 MT가 연기됐다.

독단의 언어가 되기도 하는 말, 도덕

이제 막 군에서 전역한 어리바리 복학생인 필자에게는 딱히 논쟁에 참여할 기회나 권한이 없었으나 적어도 ‘불편함’이 느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과연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정말로 지성을 추구해야 할 대학생의 책무였을까. 물론 어떤 방식으로든 MT를 가지 않게 된 것 자체가 ‘잘못된’ 결과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 그 행사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 다수였다면 공식 행사를 미루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결론이 아닌 과정이었다. 과연 그 당시를 비롯해서 오늘날까지,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좀 더 냉정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논의를 이어갈 만한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지 필자는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왜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나요?” 라고 말할 수 없는, 대학생 사회를 위에서 무겁게 누르고 있는 무언가 앞에서 모두가 함구해야 했던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술 한잔 기울이며 취기가 올라오면 그제야 하나둘씩 토해내곤 했다. “난 솔직히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전혀 슬프지 않아”라고 말이다.

인간의 오만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또 누군가는 명석한 두뇌를, 아니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뽐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오만은 어쩌면 ‘도덕적 오만’이 아닐까. 물론 이 세상에는 분명 도덕과 비도덕이라는 것의 경계는 존재하고, 어쨌든 우리 사회가 보다 도덕적일 때 나은 사회가 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필자는 그 누구보다도 공직자와 사회 지도층의 엄숙한 도덕성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가끔은 도덕이라는 것이 각자의 생각과 의견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독단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도덕적 오만에 대한 철저한 경계가 필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하든 말든,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고 선택의 문제이다. 그 누구에게도 슬픔이란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슬퍼하지 않는 자는 악한 존재’라는 프레임이 형성되고, 그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는 겉으로나마 슬픔을 ‘연기’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빚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2014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내 편은 善이요, 저들은 惡’

혹자는 교통사고일 뿐이라고도 했고, 또 누군가는 ‘현 정부에 의한 살인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세월호 사고가 불행한 참사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정말 본인의 일인 것처럼 슬퍼했고 마음을 함께 했다. 그리고 이제 5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슬픔보다는 진상규명과 배상, 안전대책 수립과 같은 미래적 문제를 논의할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도덕 감정을 내세우며 ‘내 편은 선이요, 저들은 악’이라는 이분법의 프레임으로 세월호 사고를 끌고 가는 이들이 보인다. “어떻게 아이들이 죽었는데 이럴 수 있느냐” “당신들 아이들이 죽어도 이럴 것이냐” 등 감정에 호소하는 말들이 난무하면서, 국가 공동체 운영질서에 대한 보다 깊은 고민들은 증발돼 버렸다.

미국 사회는 현재 IS에 대한 공격 문제로 논쟁이 치열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끝내 전쟁을 선언한 것으로 읽히고, 정치권 역시 IS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에 대해 큰 이견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론의 태도는 다소 날카롭다. IS가 극악무도한 자들이고 이들의 만행을 저지해야 한다는 대의에는 찬성할 수 있겠으나, 과연 ‘무엇을 위해서’ 미국이 전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IS는 미국에 위협적인가? 위협적이라면 전쟁을 감내해야 할 만큼 급박한가? 혹시 그렇지 않다면 미국은 도덕적 당위성에 사로잡혀 경찰의 기능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전쟁에 투입될 천문학적인 숫자의 국가재정 앞에서 언론은 냉정한 눈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도덕보다는 실리가 더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미국 사회의 진정한 힘이다.

‘아이들 밥 먹는 것 갖고 왜 그러느냐’라는 말 한마디에 무상복지에 대한 진지한 담론이 묻혀버렸고 ‘농민들은 전부 죽으라는 이야기냐’는 말 한마디에 무역으로 예상되는 손익계산이 가려졌다. ‘돈이 없으면 공부도 하지 말라는 거냐’는 말 한마디에 등록금 토론은 막혀 버렸고, ‘골목상권은 망해도 된다는 것이냐’라는 말 한마디에 대형마트 규제에 대한 반론은 설 자리를 잃었다.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간다면 대한민국에서는 보다 치열한 토론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이제는 우리 모두 도덕이라는 마법의 단어에서 정치를 꺼낼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윤주진 자유공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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