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서북청년단에 돌을 던지는가
누가 서북청년단에 돌을 던지는가
  • 미래한국
  • 승인 2014.10.2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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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우파 청년운동 빛과 그늘의 역사

때아닌 서북청년회(서청) 때리기가 무차별적으로 진행되는 요즘이지만, 원조(元祖)는 따로 있다. 문단의 원로라는 시인 고은이 주인공인데, 10년 전 출간했던 연작시집 ‘만인보 20’(창비)이 그 증거다. 시집에서 고은은 서청을 “(해방 직후) 백주에 호열자처럼 펴져나갔던 극우 테러” 집단이라고 대놓고 규정했다.

명색이 시어(詩語)인데도 대자보처럼 거칠고 공격적이다. 직전에 펴낸 ‘만인보 18’도 마찬가지였다. 서청 초대 위원장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 ‘선우기성’이란 시의 경우 숫제 ‘악의’로 채워졌다.

이 시에 따르면, 서청은 “(38선을) 넘어와 / 북의 공산당에 이를 갈았던” 집단에 불과하다. 원한에 찬 저들의 백색테러도 잔혹했다. “모든 도시들 / 모든 촌락들 / 선우기성의 밤뿐 아니라 뭇사람들 겁먹은 눈에 다 드러나는 선우기성의 대낮이 벌벌 떨어냈다.”

문학의 옷을 입고 있는 이런 악선전을 최근 서청 때리기에 합류한 서울대 교수 조국, 영화평론가 허지웅, 그리고 좌파매체가 다시 반복했다. 물론 그건 역사의 진실에서 멀다.

냉정하게 말해 그건 프로파간다일 뿐이고 서청에 혼쭐났던 남로당 그리고 북한 관변(官邊)의 시각에 불과하다. 즉 반(反) 대한민국적이다. 상황이 그러한데도 2014년 가을, 대한민국에서는 이게 대세다. 무섭고도 기이하다. 서청 죽이기가 전체주의적 광기로 연결되지만, 누구도 맞서려 하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 구축된 좌파의 지적(知的) 헤게모니-문화권력 앞에 우파는 잔뜩 주눅 든 상황이다. 때문에 지금 서청의 문제는 현대사의 진실에 마주서는 문제이자, 지적 게으름과 비겁함의 늪에서 벗어나는 사안이다.
 

▲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 간부들이 손진 선생을 찾아 상견례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손진 선생은 서청 재건을 승낙했고 11월 재건 발대식 참석을 약속했다.

선우기성을 다시 본다

그런 판단으로 나는 한 인터넷매체에 두 차례에 걸쳐 역사 속의 서청과 그 역할에 대한 포폄(褒貶)을 시도했다. 오늘 보다 너른 시야에서 서청을 다시 음미해볼 생각인데, 조금 전 언급됐던 선우기성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고은의 주장대로 형편없는 위인일까? 1909년 평북 정주 태생인 그를 둘러싼 진실은 이렇다.

선우기성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 여파로 일어난 오산학교 학생운동으로 일제 때 형을 받았다. 해방 이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서 활동했으니 민족주의자 청년 엘리트가 분명했다. 김일성의 북한에 절망해 월남한 그의 눈에 서울은 공산당 천국이었다.

좌우합작을 표방한 미군정의 갈팡질팡, 합법-비합법 투쟁을 병행하는 남로당의 적색테러…. 분노한 선우기성이 반(反)공산주의 운동의 앞줄에 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서청 결성(1946년 11월) 전부터 평안청년회(평청)의 리더였던 그가 공산당 기관지(인민일보) 편집국을 때려 부수고 노동단체 전평을 차례로 습격했다. 고은이 “그의 백색테러에 온 도시가 떨었다”는 말은 허구다. 실제론 서울 시민들이 선우기성과 우파 청년단체의 활동에 박수를 보냈다.

서청 소리에 울던 아이가 울음을 멈춘다는 소문과 함께 그는 대단한 무골 타입으로 소문이 났지만, 실제론 ‘온화한 선비형’이라는 게 손진(94, 전 서청 경남지부 선전부장) 옹의 증언이다. 그는 언론인이자 소설 ‘불꽃’의 저자 선우휘의 일가친척이기도 하다.

이런 진실이 유통되지 않은 건 해방 정국 당시 벌써 좌편향됐던 지식사회의 위선과 허위의식 탓이고, 훗날 박정희에 비판적이었던 재야지식인 그룹이 태동된 1970년대를 거쳐 지금도 마찬가지다.

서청만 그런 게 아니라 해방 이후 우파청년단체 모두가 지금껏 애물단지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왔다. 김두한이 감찰부장이었던 대한민청(1946년 봄 결성)부터 그랬다. 직후에 만들어진 이철승의 학생단체 전학련도 마찬가지다.

전학련 결성 때는 이승만, 조소앙, 김성수, 정인보 등 민족진영 인사들이 참석했고, 김구 역시 초기에 이 단체를 신뢰했다는 게 역사의 진실이지만, 사람들은 애써 눈을 감는다. 대표적인 우파 청년단체였던 이범석의 족청도 마찬가지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가장 전투적인 우파단체로 통하는 서청에 대한 무지와 폄하는 당연할까? 상식이지만 서청은 전투적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며, 좌파와의 싸움 속에서 “당하면 반드시 보복한다”는 신조를 키웠던 행동하는 우파의 상징이다.
 

남로당은 무죄, 서청은 유죄?

지금도 사람들이 서청하면 억센 주먹과, 의협(義俠)의 투쟁정신부터 떠올리는 건 남로당의 살인, 방화, 폭동 등 잇단 테러에 대응해 벌였던 반(反) 테러 활동 때문이다. 1947년 9월 부산에서 발생한 정수복 검사 암살사건이 유명하지만, 그 직

전인 7월 초 부산극장 사건도 유명하다. 모두 서청의 테러가 맞다. 올해 초여름에 나온 증언록 ‘서북청년회가 겪은 건국과 6·25’에 따르면, 정 검사는 좌익사범들에게 온정적이었던 공안검사로 악명이 높았다. 서청은 그가 남로당 비밀당원이란 확증을 잡은 뒤 테러를 결행했다.

실은 규모로 보면 부산극장 사건이 더 컸다. 당시 좌익은 ‘미소공위 축하 예술제’의 일환으로 황철 문예봉 등 좌익 예술인들이 총동원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연극작품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 무대를 향해 서청은 다이나마이트를 터트렸다.

시내를 발칵 뒤집어놓은 이 테러로 당시 좌익해방구였던 부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부산 서면 일대에서 견직공장, 목재공장을 하던 기업인들이 전전긍긍하다가 이런 활동에 힘입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억해둘 것은 따로 있다. 실은 이 사건 꼭 2개월 전 불과 1주일 간격으로 부산경찰서장이 백주에 좌익에게 암살당했고, 독립촉성국민회의 경남지부장 엄진영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당시 좌익으로 쏠리던 분위기에 브레이크를 걸어준 게 서청의 역할인데, 부산뿐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그러했다.

당시는 총체적 정치투쟁이 벌어지던 ‘특수 상황’이었다. 합법·비합법 투쟁을 병행했던 것도 남로당이 먼저였다. 저들의 적색테러에는 눈을 감아주면서 서청만 비난할 순 없다.
 

▲ 여운형 건국훈장

左右를 막론하고 팽배한 오해

경찰 수뇌부인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서청을 신임했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주 4·3사건에 서청대원이 투입된 것을 놓고 좌파들은 맹비난하지만 건국을 반대하는 남로당의 민중 봉기가 나쁘지 서청이 왜 비난을 받아야 할까?

서청을 두고 “손에 피를 묻혔던 백색 테러집단”이라고 하는 건 철부지 좌파들의 근거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새누리당 의원 하태경의 다음 발언도 실로 괘씸했다.

“좌우를 떠나서 (서청은) 파시즘이며, 민주주의자라면 반대할 수밖에 없다.”

이 말에 필자는 동의 못한다. 본디 짝퉁인 한국 좌파의 본질은 민족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 즉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전체주의 이념으로 봐야 옳다. 괴물 같은 이 민족사회주의가 파시즘에 가깝지 그걸 반대한 서청이 파시즘이라는 건 짧은 역사적 시야에 적반하장일 뿐이다.

▲ 서북청년회가 겪은 건국과 6.25

실은 서청은 해방 공간에서 건국에 일조한 것은 물론 6· 25전쟁 때도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런 서청에 대한 판단은 실은 아주 쉽다. 당시의 이념 대립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남북분단의 본질은 올바른 삶의 양식(樣式)을 놓고 다투는 타협 불가능한 권력투쟁이다.

서청의 활동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헌법가치를 지키고, 북한 전체주의 체제에 타격을 주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역사 속의 서청은 일부 명암이 엇갈릴 수는 있어도 전체로는 옳다고 봐야 한다.

그런 정답을 놔두고 수명이 다해가는 한국의 유사(類似) 좌파들은 헛소리를 한다. 성실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사람인 강준만의 경우 “공산주의를 악(惡)으로 보는 반공체제의 틀과 잣대를 버려야 해방 정국이 제대로 보인다”는 주장(‘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1권’ 서문)을 반복한다.

내 눈엔 정치적 바보인 강준만 류(類)보다는 요즘 서청 재건 운동에 나선 아스팔트 우파 청년그룹이 훨씬 건강하다.

물론 예전 서청의 반(反) 테러 활동을 포함한 폭력투쟁을 지금까지 되풀이하는 건 시대착오에 불과하다. 그렇게 할 사람도 없으니 그건 괜한 기우라고 나는 믿는다. 기대하는 건 이 변화된 시대에 보다 세련되고 우파 시민운동에 걸맞은 새로운 활동이 펼쳐지는 일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서청 정신을 ‘한반도 21세기 뉴프런티어 정신’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서청 정신은 기회주의적 웰빙에 빠진 우리가 잃어버렸던 큰 가치라는 걸 재확인한다.

그걸 되찾는 전제조건으로 나는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선우기성, 문봉제(서청 2대 위원장) 등 서청 관계자 중 단 한 명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지 못했다. 그들에 대한 건국훈장 추서 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건 역사에 대한 예의 문제다.

둘째 노무현 정부는 여운형과 주세죽(박헌영의 부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는 망발을 저질렀다. 다른 건 몰라도 건국훈장만은 절대로 안 된다. 이 서훈 취소운동이 동시에 벌어져야 한다.

 

▲ 정함철 대변인(2012년)

서청 재건에 나선 정함철은 누구?
- 아스팔트 우파 10여년의 베테랑 40대 우파

지난 9월 28일 광화문 주변 저주의 노란 리본을 정리하겠다며 나선 우파 단체가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를 표방한 것을 보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사회를 마비시켜온 세월호 난장판을 정리하겠다는 저들의 등장에 좌파는 기다렸다는 듯 역공을 개시했지만 “죽기를 각오했다”는 서청 재건팀의 의연함이 돋보였다.

그런 서청 재건준비위원회 대변인 정함철(41)의 발견은 필자에겐 신선했다. 그와 수차례 통화를 했다. 역사 속의 서청이 가졌던 일부 폭력성과는 “깔끔하게 선을 긋겠다”는 균형감각을 발견하곤 마음이 다시 놓였다.

그의 근거지가 지방(강원도 원주)이라는 점도 풀뿌리 우파 시민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인데, 여전히 궁금한 건 정함철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났으나 병(兵)과 부사관으로 9년 간 군에 복무하면서 원주와 인연을 맺었다.

2001년 전역 이후 세상이 전과 같지 않다는 걸 발견했는데, 효순-미선양 사건이 우선이었다. 그 직후 청년들이 “맥아더는 민족의 원수”라면서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는 광경을 인천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또 한 번 충격 받았다. 즐겁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동상 위에 올라가 난리 치던 젊은이들의 광기어린 눈빛을 관찰하면서 그는 우파운동에 헌신키로 결심했다.

“그때 나는 박사모 부회장 자격으로 회원 100명을 이끌고 현장에 가서 동상 철거 반대 활동을 하려 했다. 좌파 청년 3000명이 경찰의 보호 아래 움직였다. 까딱 잘못하면 린치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내 걱정은 이랬다. 이 청년들이 북한에서 왔겠느나? 우리 학생이고, 국민이 맞다면, 차분하게 우파운동을 하자는 결심을 그때 했다.”

좌파 정권에 질린 사람들이 아스팔트 우파로 변신한 게 10여 년 전인데, 정함철은 가장 일찍 우파운동에 뛰어든 케이스다. 광우병 소동이 지독했던 2008년 원주는 비교적 조용했는데, 그런 배경에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함철의 활동이 있었다.

그에게 “중앙에 아는 우파 인사가 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서경석 목사가 거의 유일했다. 지금은 박사모 활동을 접고 행실본(행동하는양심실천운동본부) 대표와 기독시민연대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는 그의 앞날을 지켜볼 만하다. 서청의 후광이 좋은 쪽으로 작용하길 빈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나는 보수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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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 2015-09-04 17:03:28
히틀러유겐트는 그래도 어리기라도 했지.. 말 그대로 인간이 할 수 없는 극악의 전쟁범죄를 민간인 대상으로 저지른 쓰레기들인데.. 진심 궁금하다..과연 저들의 자녀들은 제 부모가 어떤쓰레기들인지 알고나 있을까..

berlin 2014-10-26 23:28:12
나치 유겐트와 다를바 없는 단체인데, 이걸 옹호하겠다고? 제발 대한민국을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