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백범 김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4.11.1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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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c) 미래한국 고재영 

“김구 선생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데 반대하셨기에 건국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것은 맞지 않다.”

지난 10월 22일 이인호 KBS 이사장은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그렇게 말했다. 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언론에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에 반대했다고 밝혔는데, 이게 사실이냐”고 이인호 이사장의 역사관을 문제 삼자 나온 대답이었다.

김구는 건국유공자가 아니라는 이인호 이사장은 “저의 역사관은 편협하지 않다”고 말했다. 질문은 정치적이었고 답변은 역사적이었다. 이 이사장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러시아 혁명사로 서양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때문에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러시아 대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인호 이사장의 발언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온갖 비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정작 국감 현장에서 이인호 이사장의 ‘김구 건국공로자 불인정론’에 논리적으로 반론을 편 의원은 없었다. 이후에 나온 반응은 ‘친일파 후손’이라는 낡은 레코드의 반복과 ‘KBS 이사장에서 사퇴하라’는 주장뿐이었다.

인터넷과 SNS에서는 논쟁이 치열했다. ‘김구는 분단을 원치 않았을 뿐’이라는 주장이 대부분이었으나 김구가 왜 건국유공자가 돼야 하는가에 대한 논리는 빈약했다. 김구는 왜 대한민국 건국에 그토록 반대했던 것일까. 김구는 진정 남북통일을 원했기에 단정 수립을 반대했던 것일까. 하지만 역사의 기록과 증언들은 우리의 그런 믿음을 의심케 한다. 1947년으로 돌아가 보자.


1947년의 수수께끼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발표는 그보다 1년 앞서서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정부 설립 후 북한 접수’를 주장한 단정론에 반대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구가 성명을 발표한 지 1주일 후인 11월 30일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을 방문해 한 시간여 면담을 하고나서 발표한 성명은 잘 언급되지 않는다.

그 성명의 핵심은 ‘이승만과 자신의 의견에는 근본적 차이가 없다’는 요지였다. 그 후 12월 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라고 단정 수립 반대의 의견을 180도 전환했다.

이 점은 수수께끼였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몰라도 김구는 적어도 1947년 11월 30일에서 12월 1일 사이에 자신의 ‘단정불가론’을 사실상 철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이승만의 ‘단정 수립 후 북한 접수론’과 정확히 궤를 일치하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구의 그러한 태도는 이튿날부터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한민당 창당의 주역이자 정치부장인 거물 장덕수가 김구의 추종자들로부터 암살됐던 것이다. 한민당 초대 당수였던 송진우를 암살했던 배후에 김구가 있었던 터라 이 사건은 당시에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장덕수는 미소공동동위원회 문제로 김구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김구는 미소공위에 한국측이 참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장덕수는 미소공위에 참가해 떳떳하게 한국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김구가 지도하는 한독당과 한민당 간의 연대를 놓고 장덕수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장덕수는 김구에 반대해 이승만의 단정 수립 노선에 무게를 실었고 그와 연대하려 했다. 김구 추종자들에 의한 장덕수 암살의 배후에 김구가 있다는 의혹은 그러한 갈등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체포한 장덕수 암살 공모범으로부터 김구의 배후 혐의를 잡았던 미군정 경무부장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김구는 이전에도 여운형을 비롯 송진우를 암살한 이력으로 하지 사령관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던 터였다.

하지만 하지 중장은 이 문제를 미군정 검찰로 넘겼다. 김구는 살인교사로 미군정 법정에 서야하는 운명이었다. 이 문제를 연구했던 강준만 교수는 그의 책 ‘인물과 사상’에서 김구가 이승만에게 여러 차례 구명운동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승만은 김구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승만이 위기에 처한 김구의 ‘국민회의’ 대신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게 된다. 강준만 교수에 의하면 이때까지 김구는 이승만에 대해 ‘우남 형님’이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덕수 암살로 이승만과 틈이 벌어지면서 김구는 1947년 12월 22일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했다.


  (c) 미래한국 고재영

김구는 왜 美군정을 두려워했을까

상황은 김구에게 점점 불리해져 갔다. 김구는 이듬해인 1948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간 법원 ‘소환장’을 받아야 했다. 비록 장덕수 살해의 증인자격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될 수도 있었다.

1948년 3월 장덕수 암살범 공모자 신일준에 대한 미군정 검사 라만의 신문조서 내용이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이 조서에서 신일준은 김구가 ‘장덕수를 처단해야 한다’는 말을 했으며 이를 장덕수에 대한 제거 지시로 받아들여 동료들과 모의한 후 다시 김구를 찾아가 장덕수 제거에 대한 승낙을 받았음을 자백하는 내용이 있었다.

김구는 그러한 내용으로 인해 라만 검사로부터 모진 추궁을 받았지만 결국 신일준이 자신의 자백이 검찰 고문과 혼미한 정신으로 인한 허위자백이었다고 번복하는 바람에 김구는 아슬아슬하게 법정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군정 검찰이 김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라만 검사는 김구를 살해 배후범인으로 기소를 준비하고 있었고 다음 달이었던 1948년 4월 김구는 드디어 ‘남북협상을 위한 방북’을 결심하게 된다. 김구의 이러한 태도는 다분히 미군정 검찰기소를 면하려는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의심을 살 만했다.

김구가 미군정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는 증거가 있다. 김구는 한민당 당수 송진우를 암살했던 배후로서 하지 미군정 사령관에 불려가 경고를 받았으며 이후에는 신탁에 반대해 미군정을 접수하자는 파업을 일으켰다가 하지로부터 추방 압력을 받고 파업을 중지했다. 김구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김구는 미군정이 자신과 협상을 하리라 여겼지만 매번 돌아오는 것은 단호한 배격이었다. 김구는 그러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컸다.

김구가 장덕수 암살 배후로서 피소를 면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암살범 재판이 끝나고 미군정 검찰의 칼날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가 김구는 그해 4월 북한행을 결심하게 된다.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1948년 4월 19일 김구가 김규식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자 이철승을 비롯한 전국학련 학생들이 김구의 경교장 앞에 드러누웠다. 이때 김구는 ‘자신이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도와주지 않고 이제 와서 북행길은 반대하느냐’며 학생들을 향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 경교장에서 사람이 나와 김구는 북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 설명하자 이철승 등 청년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김구 일행은 이들을 피해 담벼락을 넘어 경교장을 나가 북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북한에서 김구는 기이한 태도를 보였다.

김구는 김일성의 손을 잡고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통일을 이루시거든 그저 황해도에 과수원이나 하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읍소했다. 김구가 김일성에게 죄를 지었다고 한 것은 과거 평양에서 김일성과 공산주의 세력에게 수류탄 투척 테러를 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김구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통일적으로 하면 내가 대통령이 된다”

이철승 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구는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는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됐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 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내가 대통령이 된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김구는 북행을 다녀온 후 ‘남북한에서 외군철수 후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일성으로부터 ‘외군이 철수해도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 받은 것을 내세웠다. 그것이 김일성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간 어리석은 판단이었음은 1950년 6·25로 증명됐다.

이와 관련해 중요한 증언이 나와 있다.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 대표인 유어만(劉馭萬) 공사의 1948년 7월 11일 김구 면담 기록에 의하면 김구는 북한 김일성이 소련의 지시에 의해 남침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군철수를 해도 전쟁은 없다’는 김일성의 말을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남한에 그대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록은 유 공사가 대화의 내용을 영문으로 요약해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전달했고 그 문서는 이화장에 보존돼 있다.

 

독립운동가와 건국공로자, 그 사이 김구

▲ 이승만과 김구

김구의 무리한 남북협상과 북행은 그의 지지자들을 이탈하게 만들었다. 조선일보를 창간한 방응모는 한때 김구의 지지자로서 그를 도왔으나 김구의 남북협상론 이후로 돌아섰다.

남북협상과 북행으로 정치적 쇠락의 길을 갔던 백범 김구는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에서 실시한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197명의 투표 가운데 13표인 6.6%를 득하는 데 그쳤다. 이승만의 득표율 92.3%였다. 이후 김구는 칩거에 들어갔다.

백범 김구에 대한 항일독립 운동은 그 역사적 의미가 결코 퇴색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가 보여준 건국과정에서의 행동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백범은 용기 있고 유능한 항일투사였을 지는 모르나 외교와 치세에 밝은 현명한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러한 백범 김구에 대해 이승만은 “곡괭이를 들려주면 어디든 가서 때려 부수겠지만 사람들을 달래는 정치는 못한다”고 평했다. 그런 평가는 이승만과 백범이 한창 갈등을 빚던 때 나온 것도 아니었다.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으로 살해됐다. 안두희는 백범을 지지하고 존경하던 한독당의 비밀요원이었다. 그런 안두희는 왜 김구를 살해했던 것일까.

많은 이들이 김구 살해를 이승만의 사주로 몰아가지만 이승만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당시 안두희는 검찰에서 ‘김구가 군대를 자신을 위해 자의적으로 사용하려 하기에 응징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를 계기로 김구의 쿠데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이승만은 김구 암살의 배경으로 한독당의 내분을 지목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좌우합작과 북한협상을 주장했던 한독당의 입장으로서는 김구의 단독정부 대통령 선거 출마와 여순반란 사건 등으로 인한 여론 악화를 내부적으로 소화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김구가 사라져야 그들도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었고 더 이상 악화되는 사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판단이 한독당내 반 김구 세력들 사이에 팽배했을 거라는 관측이다.

백범 김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여전히 민족주의 우파 보수진영에게 백범 김구는 추앙의 대상이다. 동시에 민족주의 좌파에게도 백범 김구는 통일의 아이콘이다.

하지만 백범은 이제 역사가 평가하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더 이상 백범과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북한 김씨 세습정권으로부터 ‘쓸모 있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은 건국됐고 다가올 통일은 민족통일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 통일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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