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대한민국 건국
김구와 대한민국 건국
  • 미래한국
  • 승인 2014.11.20 09: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칼럼]
▲ 양동안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는지 여부를 놓고 상당한 논란이 전개되고 있다.

발단은 이인호 KBS 이사장이 어느 교양 강연에서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말한 것을 야당과 KBS노조가 규탄한 데서 비롯됐다. 이 논란을 잠재우려면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김구 선생이 어떤 일들을 했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김구 선생은 1947년 12월초까지는 이승만 박사가 선도하는 대한민국 건국 노력을 지지했다. 그러한 사실은 1947년 12월 1일에 발표한 다음과 같은 성명 내용에서 확인된다.

“우리는 유엔결의안(남북한에서 유엔 감시 하에 자유총선을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구성하라는 결의)을 지지하는 바이다. (…) 일보를 퇴하여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하시에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의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 더 명백히 규정하자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오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이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상술한 제2의 경우에 치중할 뿐이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인데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이 성명이 발표되고 며칠 뒤 김구 선생의 한독당은 자기 당의 간부들 가운데 이승만 박사의 건국 노선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제명했다.


갑작스러운 입장 돌변 … 왜?

김구 선생의 이 같은 입장 돌변은 한민당의 핵심 간부 장덕수가 암살당한 사건을 둘러싼 한민당과 김구 선생 간의 감정적 갈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김구 선생의 그러한 입장 돌변은 한독당의 공식 논의를 거친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점은 김구 선생이 그런 성명을 발표한 뒤 1개월여 후인 1948년 1월 25일 한독당이 “소련 측이 (유엔위원단의) 북조선 입경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부득이 유엔 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김구 선생은 자기가 이끄는 정당인 한독당이 남한 선거에 참여할 것임을 천명한 바로 다음날인 1월 26일 “미·소 양군이 철퇴한 후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선거 준비를 한 후에 총선거를 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김구 선생이 이날 말한 것은 1947년 9월부터 한국문제의 유엔총회 상정을 저저하기 위해, 그리고 남북한 자유총선을 실시하라고 한 유엔 결의 실행을 저지하기 위해 소련이 되풀이 해온 제안인 동시에, 김구 선생 자신이 그 동안 반복해 비판해왔던 제안이다.

남북협상(남북요인회담)은 소련의 그러한 제안이 있은 직후인 1947년 10월부터 남북한의 좌익세력과 일부 중도 좌경세력이 제의해놓고 김구 선생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작하고 있던 정치적 프로젝트였는데, 마침내 김구 선생이 그에 걸려든 것이다.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건국노선에서 이탈해 남북협상 쪽으로 돌아서자 이승만 박사는 김구 선생을 붙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박사는 김구 선생과 거듭 회담을 가지면서 심지어는 자기도 남북협상에 참여할 터이니 남북협상이 실패하면 같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까지 호소했다.

김구 선생은 이 박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것은 북한공산세력이 반대할 것이라면서 이 박사의 호소를 외면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1948년 2월 10일에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제목의 감상적인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해 이 박사 등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무지몰각한 도배’ ‘태양을 싫어하는 박테리아’라고 비난했다.

김구 선생의 이러한 성명서는 내용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발표 시기도 부적절했다. 그 성명서는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남한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좌익세력의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성원하는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2·7 구국투쟁은 좌익들의 무장 빨치산 투쟁으로 연결됐고 그런 현상이 가장 큰 규모로 나타난 것이 제주도에서 발생한 4·3폭동이다.

▲ 연설을 하고 있는 김구


건국 후에도 ‘대한민국 부정’ 활동 전개

1948년 3월에 접어들면서 김구 선생은 좌익과 공동보조를 취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선거를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한 남북협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을 거쳐 김구 선생은 마침내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했다. 물론 평양의 남북협상회의는 김일성이 일방적으로 제안한 것이었으며 김구 선생은 김일성과 아무런 사전협의도 하지 못한 채 그 회의에 참여했다.

김구 선생이 참여한 남북협상회의는 남북한의 유력한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들이 모두 참여한 회의가 아니라 남한선거에 반대하는 남북한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만이 참여한 회의였다. 그 회의는 북한 공산세력이 사전에 만들어 놓은 각본대로 진행됐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각종 문서들을 채택했다.

그 회의에서 채택된 문서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실시될 5·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남북한의 공산세력과 남한의 친공 중도파 및 김구 선생 추종세력들이 공동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북한에서 실행되고 있는 체제로 남북이 통일(공산화 통일)되는 것을 사실상 용인했다.

김구 선생은 그런 결의에 대한 입장을 묻는 신문기자에게 그 결의에 찬동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남북협상회의의 결과를 보면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 참여는 김일성의 남북통일노선을 지원해주는 꼴이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도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과 관련하여 그에 대한 감회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구 선생은 ‘오직 비통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뒤이어 김구 선생은 김규식 박사를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구성해 1948년 가을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 파견해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봉쇄하려고 했다.

그러한 김구 선생의 시도는 김규식 박사가 파리 여행을 회피함으로써 실패했다. 이상의 역사적 사실들은 김구 선생이 생애에 걸쳐 이룩한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했으며 건국된 대한민국에 해로운 활동을 전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