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적 변화, 재스민 혁명은 계속된다
평화적 변화, 재스민 혁명은 계속된다
  • 김범수 편집인
  • 승인 2014.11.21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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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의 세계여행 34] 모하메드 나프티 튀니지 대사
   
모하메드 나프티 튀니지 대사

‘재스민 혁명’. 2010년 말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의 발원지였던 튀니지(Tunisia)의 나라꽃이 재스민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 10월 28일 용산구 주한 튀니지 대사관에서 모하메드 알리 나프티(Mohamed Ali Nafti) 대사를 만난 바로 그날은 튀니지 사상 처음으로 재스민 혁명 이후 자유선거가 치러지고 본국에서 개표가 진행되던 역사적인 날이었다.

3,000년 역사의 고대 도시 카타지와 로마를 떨게 한 명장 한니발의 나라. 그리고 이제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의 민주화 혁명 근원지로 주목을 받게 된 나라 튀니지로의 지면여행을 떠나보자.

- 튀니지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선거가 치러지는 시기에 튀니지 대사관을 찾게 돼서 영광입니다. 4년전 튀니지에서 발생한 재스민 혁명은 어떤 성격이었고 어떤 배경에서 시작됐습니까.

2010년 12월 17일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전에 발령받았던 스페인에서 돌아와 귀국해 있던 상태였습니다.

외교관이었기에 조심스럽긴 했지만 튀니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관점들을 들어봤는데 다수의 국민들이 튀니지의 인권 침해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튀니지에서 일어난 사회운동의 성격은 첫째가 가난과의 싸움이었고, 둘째가 국가가 소외계층에 대해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반정부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정권이 교체되기 전까지 계속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폭력적인 운동으로 변질될까봐 모두가 우려하긴 했지만 다행히 별 탈 없이 평화적 시위가 계속 되었습니다.


청년들과 SNS가 이뤄낸 평화 혁명

- 튀니지 혁명의 주체는 누구였나요?

튀니지의 사회운동이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청년들이 그 주체였다는 점입니다. 보통 이러한 사회적 운동은 대중에게 사상과 이상을 펼치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리더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튀니지 혁명에서는 그러한 리더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혁명의 주를 이룬 젊은이들은 페이스북 등의 SNS로 수많은 시위들을 대체하였는데 이는 이 혁명을 평화롭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 혁명에 희생자는 없었습니까. 이번에 자유선거를 치르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요.

이듬해인 2011년 1월 15일까지 약 한달간의 기간에 300명 정도의 희생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혁명들과 비교하자면 매우 평화로운 혁명이었죠.

혁명 이후 우리는 즉시 총선과 대선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한 헌법제정 국민의회를 선출하기 위한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새로운 헌법은 혁명 3년만인 2014년 1월 14일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고 3권 분립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10월 26일 새 민주주의 정부를 선출하고 세계 어느 민주주의 국가와도 다름없이 국민들의 자유를 보장하여 튀니지의 역사에 남을 일을 해냈습니다. 혁명 이후 4년간의 고생 끝에 튀니지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 겁니다.

- 재스민 혁명때 추방된 장기 독재자 벤알리 전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망명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확인된 건 아닙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죄질에 따라 자유롭게 된 사람도 있고 구금된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정의와 질서를 다시 잡기 위한 일들입니다.

- 대사님도 이번에 투표를 하셨나요.

2일 전 튀니지와 전 세계 공관에서 투표를 하였습니다. 지금 저와 서기관의 손가락을 보면 잉크가 묻어 있는 것이 보이지요. 우리는 투표를 할 때 재투표를 방지하기 위해 잉크에 손가락을 찍어서 합니다.

현재 한국에는 60여명의 튀니지 교민들이 있는데 매우 작은 공동체지만 모두가 이 역사적인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이번 선거에는 여러 정당들이 참여했고 투표 결과에 따라 그들이 국회의 의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투표의 승리자는 튀니지 국민들이 될 것이고 저는 이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튀니지 공화국의 건국에 힘을 쓸 수 있게 된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튀니지의 첫 공정 선거입니다.

   
 

역사적인 첫 번째 자유 공정 선거

- 튀니지는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 국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재스민 혁명 이전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튀니지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국가 중 하나입니다. 약 3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카타지(Carthage) 도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도 잘 알고 있을 한니발(Hannibal)의 역사가 있습니다. 한국이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지요.

튀니지 사람들은 많은 문명들을 경험했습니다. 카타지, 로마, 비잔틴 등의 문명을 거쳐 근대 들어 아랍,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가기도 하였고 그 이후에는 프랑스 치하에 놓였으며 1956년 3월 20일에 독립을 하여 튀니지 공화국으로서 출발을 하였습니다.

또한 튀니지는 이슬람 국가 중에서는 물론 세계에서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한 국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로 향해 열려 있으며 지리적으로도 위에는 바다가 있고 아래로는 아프리카 대륙과 연결되어 있어 아프리카로 향하는 관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질 때문에 우리는 아랍, 아프리카, 지중해 등의 문화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 독립이후 튀니지에는 어떤 변화들이 있었습니까.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교육의 보편화와 여성의 해방이었습니다. 전통 튀니지 공동체에 속한 여성들은 사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사회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것도 큰 변화입니다.

또한 튀니지는 천연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우리의 지도부는 지적 자원이 중요하게 될 것이라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점은 인적 자원을 중요시 하는 한국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교육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교육 분야의 성공은 지난 20년간의 민감했던 자유의 부재와 모든 종류의 억압 그리고 한 정당이 독점하는 등의 문제들을 덮어둘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재스민 혁명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교육 혁신은 사람들이 그들의 의견을 조직적이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의 이유로 교육은 경제와 재정적인 부분 외의 영역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보였습니다.

   
 

- 외부의 침입과 다양한 문명의 유입을 겪었는데 이에 대한 저항은 없었습니까?

우리는 다른 문명들과 공존하여 왔습니다. 저항이 있었다면 튀니지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노력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튀니지인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 의해 1881년부터 1956년까지 75년간의 지배를 받아오면서도 우리는 무슬림과 아랍인으로서의 삶의 기본적인 요소를 지켜냈습니다. 우리를 정복하고 지켜주었던 문명들과 공존하면서도 그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냈던 겁니다.

- 여러 문명을 거치면서 튀니지가 주변 국가들과 다르게 지켜온 정체성, 특성은 무엇입니까.

지리적으로도 주변 국가들과 다른 독특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립 후 지난 58년 동안 튀니지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고 경제적으로 보면 약 3000개의 해외 기업들이 상주하고 있는 것에서 드러나듯 오픈된 마켓이 되었습니다.

기업들과 관광객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국가의 보안과 안정성입니다. 정치적, 사회적 환경이 이번 혁명 이후에는 더욱 안정화되어 새로운 모습을 관광객들과 기업인들에게 선보이고 싶습니다.

- 한국과 튀니지 양국의 관계에 대해 설명바랍니다.

튀니지와 한국은 1969년 공식 외교 관계를 시작해 올해로 수교 45주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에 감사하고 싶은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양국간의 좋은 파트너로서 기술적 분야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의 기적과 성공적인 발전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발전에 대해 연구하고 민주주의 사회로의 변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한국을 모델로서 생각하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수한 인적 자원을 가진 한국이 근대화의 결과를 누리고 있듯 우리도 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 분야의 교류에 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최근에는 환경 및 농업 분야에서 교류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ICT 분야에서 양해각서를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 문화적으로는 양국간 어떤 교류가 있나요.

단순한 정보와 기술의 교류만이 아니라 양국 관계를 더욱 유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교류도 중요합니다. 우선 우리는 다양한 한국 단체와 협회들을 초청하여 튀니지 사회에 한국의 문화를 알릴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3년부터 2015년 까지 3년간 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과정으로 튀니지는 음악과 춤을 통하여 튀니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튀니지 학생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중인 左 김범수 편집인, 右 모하메드 나프티 튀니지 대사

한-튀니지 수교 45주년

- 대사님 본인에 대한 소개를 바랍니다.

튀니지 외교부에 1982년에 들어왔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그리스, 스페인에서 근무했고 그 외 여러 국제기구에서도 일했습니다. 한국에는 2012년 12월에 임명돼 왔습니다.

재스민 혁명 이후 과도기에 한국 정부와 신뢰를 계속 쌓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한국에 있었던 짧은 기간 동안 만났던 고위 관계자들과 나눈 긍정의 메시지는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많은 한국인들은 근대화된 사회 가운데서 살면서도 그들의 전통과 강한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인들은 유머감각이 없을 줄 알고 좀 우려를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인터뷰/김범수 편집위원 www.kimbumsoo.net
정리/박종하 인턴기자 saintjoepark@gmail.com
사진/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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