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째 국적 없이 사는 탈북자들의 맏형
12년째 국적 없이 사는 탈북자들의 맏형
  • 미래한국
  • 승인 2014.12.2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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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가 뛴다] 김우 샬롬중국동포교회 목사
▲ 김우 샬롬중국동포교회 목사

“저는 인터뷰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보도가 나가봐야 개선되는 게 없고 오히려 피해만 오기 때문에 그동안 기자들을 피했습니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위치한 샬롬중국동포교회 김우 목사(56)는 4층까지 올라가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는 기자에게 난색을 표했다. 계단 옆 작은 공간까지 짐이 꽉 들어차 있는 4층의 목양실은 부뚜막을 딛고 올라가야 하는 방이었다. 주워왔다는 책상 2개와 책꽂이, 침대가 놓여 있는 좁은 목양실에서 그가 왜 인터뷰를 꺼려하는지 곧 알 수 있었다.

2003년 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한국에 온 그는 12년째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 오기 전 15년 동안 중국 연길에서 탈북자 돕기 사역을 펼친 그에게 수배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탈북자를 도운 그의 아내가 2년간 옥살이를 하는 동안 중국에 들어가려고 시도했으나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 와서 갈 수 없었다.

“한국 선교사님들은 물론 중국 사람들도 탈북자들을 도왔는데, 제가 들어가서 구속되면 여러 사람이 다치게 되니 다들 오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못 들어가게 되어 난민신청을 했습니다.”

김대중 정권에서 난민신청을 받아주지 않았고 당시 김상철 미래한국 회장이 동분서주해 6개월마다 비자 연장을 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줬다. ‘인도주의 차원’이라는 단서 아래.

“난민신청을 하자 법무부에서 외국인 등록을 하면 5년 만에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데 왜 그러냐고 했어요. 그래서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10년이 지나도 외국인 등록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에야 외국인 등록을 했고 5년이 지난 2013년 7월, 귀화허가서를 받았다. 1년 안에 수속을 마치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데 그 일이 무산되고 말았다.

중국 국적을 포기하러 중국대사관에 가는 순간 체포되기 때문에 그 과정 없이 국적을 취득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귀화 관련 서류에 보면 ‘본인이 원해서 국적을 포기하면 상실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제가 반드시 중국대사관에 가서 포기를 하고 와야 한다는 겁니다. 중국은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인데 당국에서는 문제없으니 갔다 오라고 합니다. 제가 가는 순간 잡히고, 제가 구속되면 저를 도와준 선교사님들이 다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과연 그가 중국에서 어떤 활동을 했기에 중국 국적 포기하는 일이 그렇게 위험하다는 걸까.

 

4대째 크리스천 집안에서 태어나

 

김우 목사는 4대째 크리스천 집안에서 태어난 중국이민 4세이다. 평안남도에 살던 선조들이 일제 강점기 때 모두 만주로 이주했다.

“증조할머니 때부터 믿음생활을 하셨어요.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할아버지 3형제 가족들이 중국으로 이주해 연길에 정착했는데 집안 남자 어른들이 일제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더군요. 연길에서 우리 집은 ‘예배당집’으로 불렸을 정도로 온 가족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1966년 문화대혁명 때부터 신앙의 자유가 없어졌지요.”

그때 유일하게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통로는 제주도에서 전파를 띄우는 아세아방송이었다.

“형이 어렵게 신약전서를 구해 와서 필사하고 나중에 구약도 구해 와서 필사했죠. 중국이 개방정책을 펼치면서 1983년부터 교회에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교회 가느라 주일에 직장에 안 나가면 바로 해고되었으니 교회 다니기가 쉽지 않았지요.”

교회가 멀어 1988년부터 집에서 구역예배를 드리게 됐다. 3명으로 시작해 50명으로 불어나기까지 여러 차례 성경책을 빼앗기고 공안에 끌려가서 구류를 살곤 했다. 그러다가 1993년에 교회설립 허가가 나왔다. 당시 그가 ‘연변기독교훈련중심’이라는 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교회 허가를 내주는 조건이 기독교가 인정하는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성도가 50명이 되고,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면 관리하기 편하니까 허가를 내주는 거죠.”

교회 이름은 연길민주교회로 지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1996년부터 탈북자들이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가 북한에서 50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탈북자들이 오기 쉬웠죠. 중국에 와 계신 우리나라 선교사님들, 그곳 학교에 계신 분들, 미국에서 오신 선교사님들과 연합해서 방을 얻어 탈북자를 숨겨주고, 일자리 만들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탈북자들의 명단과 사진을 정리해 파일로 만들어놨다가 공안에게 들켜 구속되기도 했다. 그 후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연길민주교회를 거쳐 간 탈북자가 수천명에서 1만명가량 될 거라고 짐작했다. 지금 한국에 와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탈북자 리더들 중에도 그의 도움을 받은 이가 적지 않다. 탈북자로 위장한 보위부원도 교회를 찾아왔기 때문에 항상 경계했다고 한다.

“탈북자들이 오면 우선 신명기 28장의 축복과 저주를 설명해줍니다. 그러면서 ‘나라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고 조국을 팔지 말라. 지도자를 비방하지 말고 마약과 인신매매를 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면 탈북자들은 왜 북한 욕을 하면 안 되냐고 대들면서 반발합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어요. 일단 신분을 모르니까 그렇게 하는 거죠. 우리 교회를 거쳐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다가 북한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찾아와 자기가 사실은 보위부 사람이라고 얘기해준 일도 있습니다. 그날 밥 먹을 때 그 사람이 기도를 했습니다.”

1997년부터 2000년대 초반에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사람이 50만명가량 됐다고 한다. 탈북자들이 돌아다녀도 중국 공안이 잡지 않았다는데 그 시절에 선교사들이 신실한 사람들을 훈련시켜 북한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1주일 중 3~4일은 노동자, 주일엔 목사로

“탈북자들이 문제가 된 건 2000년대 중반부터예요. 중국 사람들 사업체에서 일하는 북한 사람들이 임금을 못 받는 거예요. 체불임금을 받으려고 길게는 1년 정도 있다가 북한에 돌아가면 아픈 가족이 죽어 있고, 그러면 다시 나와서 중국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훔치고, 그런 일이 생기자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잡기 시작한 겁니다. 2007년경부터 중국 당국의 단속이 더 심해졌습니다.”

2003년 당시 중국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던 그를 포항의 이훈 목사가 초청했다. 탈북자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가지려면 더 공부해야 한다며 성서신학교에서 입학시켰다.

“제가 9월 4일 한국에 왔는데, 아내가 9월 26일에 잡혔어요. 탈북자들이 한국에 가는 걸 도왔는데 일행 중 한 명이 간첩이었던 겁니다. 출발할 때부터 사진을 다 찍어서 고발을 했고, 아내와 권사님이 2년 동안 꼬박 구속되어 있었어요. 한겨울에도 매일 찬물로 샤워를 했는데, 그때 몸이 쇠약해져서 지금도 안 좋습니다.”

교회까지 폐쇄됐다는 소식에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했건만 말리는 이들이 많았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탈북자들에게 중국 국적을 만들어준 일이었다.

“탈북여성들이 조선족과 결혼해서 살다보면 아이가 생기는데 엄마가 국적이 없으니 아이의 호적을 만들 수 없어요. 아이가 호적이 없으면 학교도 못가잖습니까. 그래서 100명 정도 되는 사람들 호적을 만들어줬는데 거기에 협조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니 다들 전화해서 저를 중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거죠.”

중국에 못 가게 되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인 영남신학교와 동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포항에 있는 교회의 복지재단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2010년 4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그해 5월 30일에 상가 건물을 세내어 샬롬중국동포교회를 개척했다.

“중국동포들이 50만 명 넘게 한국에 들어와 있는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이 분들이 한국 교회에 정착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중국동포를 위한 목회를 하게 되었지요.”

현재 교인은 40여명이고 4년 동안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국으로 돌아간 동포는 400여명에 이른다.

   
 

김 목사는 1주일에 3~4일은 인쇄소에 가서 일을 한다. 교회 운영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다. 지난 4년간 후원받은 1500만원을 이미 다 썼고, 약간의 사례비나마 받게 된 건 작년부터이다. 30평 남짓한 3층 예배실의 3분의 1은 방 2개, 부엌, 세탁실 등으로 꾸몄다. 평소 10여명이 거주하고 주말이나 명절 때면 더 많이 온다. 많은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예배실 바닥을 늘 따뜻하게 데워 놓는다.

“일자리 끊어지면 오시고, 회사나 가정집에서 일하는 분들은 주말에 오시고, 다쳐서 한동안 일을 못하게 된 분들도 머물고, 그렇게 지냅니다. 중국동포들을 무시하는 한국 분들이 많아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어요. 그러니 다들 주말이면 노래방이나 술집으로 갑니다. 교회이름을 ‘샬롬’으로 지은 건 우리 교회에 와서 평안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3층 예배실에 다쳐서 쉬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 “친척들이 다 한국에 와 있기 때문에 갈 데는 많다. 하지만 그리운 건 사랑이다. 우리 목사님은 ‘내 것’이 없는 분이고 진심으로 사랑을 베풀어주니 여기서 떠날 수가 없다. 여기 오면 너무 좋고 마음이 편하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올 여름 치매 걸린 노인의 대소변까지 받아내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옷을 벗어주고 여비를 챙겨줄 정도라며 “이 교회 저 교회 다 가봤지만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는 목사님이 우리 목사님”이라고 말했다.

김우 목사는 “이번 추수감사절에 150만원의 헌금을 모아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운 장한 성도들”이라고 교인들을 칭찬했다. 김 목사는 한국 국적이 없이 살다보니 무엇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교회도 총회에 등록이 안 될 뿐더러 12년 동안 건강검진 한 번 못 받았습니다. 자동차 면허도 못 따고, 하여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제가 중국에 못가고 두 자녀들도 비자가 안 나와 근 10년 만에 만났을 정도입니다.”


하나원에서 탈북자들 돕고 싶어

올해부터 아내와 아들이 한국에 와서 살고 있지만 집에 잠깐씩 다녀올 뿐 매일 좁은 목양실에서 지내며 교회당에 거주하는 이들을 돌본다.

“조선족들은 탈북자의 후손들입니다. 요즘 동포들에 대한 정책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처음에는 무조건 추방했습니다. 중국은 세계 어디에 살았건 화교들은 다 받아줍니다. 우리나라는 재미동포와 재일동포는 환대하면서 재중동포는 안 된다고 했어요. 자기 민족을 추방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오랜 기간 우리 민족을 도왔는데, 법치국가이며 인권을 얘기하는 대한민국은 왜 저의 인권을 12년간 방치합니까? 저는 일해도 안 되고 목회를 해도 안 됩니다. 지금 일하러 다니는 것도 교회를 운영하는 것도 다 불법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사람 있으니 데려가라는 전화가 여기저기서 걸려옵니다.”

그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갖게 되면 무얼 하고 싶은지 물었다.

“탈북자들이 입국해서 처음으로 교육받는 하나원에 가서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큰교회 목회자들이 그들의 신앙교육을 맡고 있는데 쫓겨 다녀보고 배고파본 사람이어야 탈북자들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처럼 탈북자들을 돕고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끝낼 때 김우 목사는 보도해 봐야 별반 달라질 게 없을 거라며 “대한민국은 선진국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작별인사를 할 때 선뜻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글 /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정연호 객원기자 mychuns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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