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 지수의 허와 실
한국 민주주의 지수의 허와 실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1.15 09: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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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진단]

2014년 6월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의 경쟁력 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닛(EIU)이 발표한 ‘2013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10점 만점에 8.06점을 기록했다.

순위는 167개국 가운데 21위였고 그 위의 20위는 일본이었다. 영국과 독일은 각각 14, 15위, 미국은 19위를 기록했다. 25위 이상이면 ‘완전한 민주국가’에 속한다. 그러니 한국은 ‘완전한 민주국가’에 속한다. 실제로 그런가.

EIU 민주주의 지수는 선거절차, 정부기능, 정치참여, 정치문화, 시민자유 등 5가지 부문의 평가에 의해 산출된다. 한국은 ‘선거절차’에서 9.58점의 높은 점수로 공동 6위를 기록했고 ‘시민자유’ 부문도 9.41점으로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정치참여(6.67점), 정부기능(7.14점), 정치문화(7.50점)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한마디로 절차적으로는 완전 민주국가에 속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천민민주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질적으로 타락한 민주주의, 다시 말해 2500년 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하던 중우(衆愚)민주주의(ochlocracy)를 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중우민주주의를 뜻하는 라틴어 오클로크라시(ochlocracy)는 ‘ochlo’(떼거리)+‘cracy’(통치)의 합성어이며 다른 말로는 ‘mob rule’(떼법)이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촛불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은 민주주의다>라는 책도 나왔다.

▲ 지난 12월 27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규탄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정부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

‘떼법’, ‘떼거리정치’는 민주주의 아니다

‘촛불 민주주의’는 광우병대책위원회 캐치프레이즈이기도 했다. ‘뇌송송 구멍탁’이라던 미국소 광우병을 지금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천민성, 곧 떼거리 민주주의 ‘오클로크라시’를 잘 말해준다.

합리적 공론의 장을 벗어나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사실을 미신과 허구로 감싸는 ‘우리식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광우병 미국 쇠고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0.0001%라도 위험하면 안 된다던 사람들은 왜 지금이라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와 미국산 쇠고기를 파는 식당, 정육점, 마트에 판매금지 팻말 하나도 설치하지 못하는가. 촛불민주주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06년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탄핵을 기각했을 때 이를 ‘민주주의의 심판’이라며 반겼던 이들이, 이번에는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에는 ‘민주주의의 파괴’라며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있다. 이런 행위는 데모크라시가 아니라 ‘떼법’, 즉 ‘mob rule’이자 오클로크라시다.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타락은 ‘우리식 민주주의’에서 비롯되는 점이 크다. 민주주의의 전제인 ‘책임적 자유’를 ‘계급적 자유’로 보고 자유민주적 질서를 부자들과 기득권 보수층의 전유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民主’란 ‘국민이 주인’이기에 국민들이 다수결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잘못된 민주주의 이해에 바탕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원리로 인해 민주주의에 한계가 있다는 개념이다.

이때 자유주의의 원리는 방어적 개념이다.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를 허락할 수 없다’는 독일 법학자 뢰벤슈타인의 법철학에 의해 1956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프롤레타리아 혁명노선을 강령으로 활동하던 독일공산당을 해산·심판했다.

사상과 양심은 자유이지만 행동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사회질서란 바로 사람들이 행동한 결과로 만들어지며 타인의 자유와 정당한 소유를 제약하려는 행동은 질서 방어 차원에서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법이 지배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법의 최고 규범인 헌법을 수호하려는 민주주의이고 헌법의 목적은 모든 폭력과 강제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소유를 보호하자는 시민들의 규약인 것이다.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떼법(mob rule)과 떼거리정치(ochlocracy)는 인정할 수 없게 된다.

‘democracy’는 백성(民)이 주인(主)이라는 개념으로 볼 수 없다. 자유권과 소유권을 가진 시민이 평등하게 참정권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는 제도가 바로 ‘democracy’의 참 의미다.

고대 그리스의 초기 민주정에는 20만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 세금을 내는 약 3000여 명의 아테네 시민들만이 민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여자와 노예, 그리고 외국인들은 배제됐다.

중세를 거쳐 절대왕정을 타도하며 재등장한 근대 서구 민주주의 개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때에도 민주주의는 시민의 자유권과 소유권에 대한 각성이 본질이었다.

왕이라도 함부로 세금을 걷어서는 안 된다는 사유재산권 인식, 그리고 귀족들의 자의적인 인권탄압이 부르주아라고 불리던 시민들로부터 저항을 받아 성립된 것이 바로 근대 민주주의였다. 하지만 이때에도 민주주의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 지난 12월 27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규탄집회에서 김미희(왼쪽부터), 오병윤,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참가자의 발언에 박수 치고 있다 /연합


2만 달러 시대에 걸맞은 민주주의는?

1832년 영국 최초의 선거법에서는 세금을 납부하는 중산계급에까지만 선거권이 인정됐다. 총인구의 3%인 65만 명 정도가 선거권을 가졌다. 노동자에게 선거권이 확대됐던 것은 이로부터 35년이 지난 1867년이었으며 농부와 광부는 이보다도 늦은 1884년에 선거권이 부여됐다.

이때까지도 영국 인구의 약 12%만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18년부터는 여성은 30세가 넘어야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고, 이로부터 10년이 흐른 1928년에 이르러서야 모든 성인 남녀가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다.

프랑스는 1848년에 남자들이 선거권을 가졌고 이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1946년에서야 여성들의 선거권이 허락됐다. 미국은 1890년에 남자들이 선거권을 가졌고 여성들은 30년이 지난 1920년에 선거권이 부여됐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1869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의 틀을 마련한 일본에서는 1889년 ‘중의원의원선거법’을 제정해 만 25세 이상이면서 세금을 15엔 이상 납부하는 이들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세금 조항이 폐지돼 1925년에는 25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됐으며 총인구의 20.12%가 투표권을 행사했다. 이로부터 20년이 흐른 1945년 일본은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게 된다. 한국은 1948년에 남녀 모두 선거권을 동시에 가졌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른 선진국들이 단계별로 어렵게 남녀 모두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것과 달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 시간 내에 도입됐다. 당시 국민소득 80달러 수준에 지금과 별 차이 없는 2만 달러짜리 민주주의 선거권이 모든 국민에게 부여된 것이다.

서구 유럽과 일본에서 민주주의 선거권이 처음부터 모든 국민들에게 부여되지 않았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배타적 사유재산권을 가진 시민들이 참여하는 정치제도이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에 ‘시민적 성숙’이 보장되지 못한 국민이나 세금을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까지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다시 말해 19~20세기 초만 하더라도 가난한 노동자들과 여성들의 문맹률은 높았고 지켜야 할 만한 재산이나 교육의 기회가 없었기에, 이들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가난한 노동자들이 중산층이 되고 여성들에 대한 교육과 사회 참여가 확대되면서 민주주의도 그 만큼 대중적 지평을 넓혀갈 수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경제적 자유도가 높고 국민 소득이 높을수록 민주주의 지수도 높다는 점이 증명한다. 그런 점에서 선진국들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진화적 단계를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발전은 일찍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했던 민주정의 중우(衆愚)적 타락을 막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우리 한국은 과연 2만 달러 국민소득에 걸맞은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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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에 2017-12-19 10:41:25
꼴에 너도 기자라고 먹고사냐?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