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제도는 식민지 시대의 유물인가?
한의사 제도는 식민지 시대의 유물인가?
  • 미래한국
  • 승인 2015.01.20 11: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환규의 청진기]
 

최근 정부는 규제개혁을 위해 총리실 산하 규제개혁 민관합동회의를 열고 한의사들에게 현대의료기기의 사용을 허용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의사들은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의사와 한의사 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상호간에 고발을 하는 등 갈등은 더 심화되고 있다. 사실 의사-한의사간 갈등의 근본적 원인은 이원화된 의사면허다. 대다수 다른 나라는 의사면허가 하나뿐인데 반해 우리나라에는 의사와 한의사 두 가지 면허가 있어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의료법에 의해 의사, 치과의사, 조산사, 간호사, 그리고 한의사를 의료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현대의학이 아닌 전통의학을 공부한 이들에게 한의사(韓醫師)라는 자격을 부여하고 이들을 의료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의사들은 의사처럼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으며 한의원을 개원할 수 있다.

즉 의사면허가 이원화돼 있는 셈이다. 그런데 한의사들은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지만 의료법에 의해 전통적인 방법만 사용할 수 있고 현대 의료기기와 의약품을 사용할 수 없다.

현대 의료기기와 의약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진단의 정확성과 치료의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한의사들은 지속적으로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요구해왔다.

반면 의사들은 한의학의 비과학성을 문제 삼으며 한의사들을 의사로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현대 의료기기의 사용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해왔다.

이처럼 의사-한의사간 갈등의 이유는 명확하지만 해법은 간단하지 않다. 해법을 찾기 전, 이원화된 의사면허제도가 생기게 된 역사적 배경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전 세계에서 현대의학이 아닌 ‘전통의술’을 공부한 이들에게 의사와 유사한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이원화된 의사면허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들은 얼마나 될까? 정답은 중국, 대만, 북한, 그리고 대한민국 네 나라다.

그 외 세계의 그 어떤 다른 나라들도 전통의술사들에게 의사 면허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들 4개국에서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의술을 공부한 이들에게 의사면허를 부여하게 된 것일까?

흥미롭게도 전통의술사들에게 의사면허를 부여한 4개 나라 중 중국을 제외한 3개 국가는 모두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나라들이다. 과연 전통의술사에게 의사면허를 부여하는 제도는 식민지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전통의학자 의사면허는 세계 4개국뿐

 

조선시대 의료 인력은 의원(醫員), 침의(針醫), 의녀(醫女), 무격(巫覡), 다모(茶母)등 다양한 직역으로 구성됐다. 이 중 의원(醫員)은 과거와 취재(실기)로, 침의(針醫)는 취재로 선발했으나 의사에 해당하는 의원의 신분이 중인이었고 의학은 잡학의 일부로 여겨졌기 때문에 별도의 교육제도가 마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의학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지 않았다. 전통의학은 그냥 의학으로 불렸고 19세기 말 서구문물과 함께 서구의학이 들어오자 이는 ‘태서의학’ 혹은 ‘서의(西醫)’로 불렸다. 그런데 1879년부터 종두(천연두 백신)가 도입되자 서구의학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

1899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최초의 국립의학교를 세우면서 이를 서양의학 전문교육기관으로 정하면서 전통의술을 배제했는데 그 때 이미 당시 일본에는 자동적으로 의사면허가 부여되던 의과대학 졸업자와 전문학교 졸업자, 그리고 의사면허시험 합격자를 포함해서 1만5000명이 넘는 서양의사들이 있었다.

조선에 단 한 명도 없는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들이 일본에 이미 1만5000명이나 있었다니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일본이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해서 개혁을 꾀한 메이지유신 시대에 전통의학을 없애고 서양에서 들어온 의학만을 유일한 의학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즉 구한말 시대에 일본은 이미 서구의료제도로 일원화된 상태였고 전통의술을 사용하던 우리나라는 이제 막 서구의학을 도입하려던 참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시작했고 이어 1910년 일본은 조선을 강제 합병했다. 그런데 의사면허제도를 두고 일본은 고민에 부딪혔다. 자국에서는 전통의술을 없애고 서양의학교육을 받은 의사들만 의사로 인정했는데 당시 조선에는 의사면허증을 가진 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은 자국의 의사들을 들여와 식민지 통치를 받는 조선인들에게 서구의학의 혜택을 줄 의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결국 일본은 조선 땅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치료를 해오던 이들에게 의생(醫生)이라는 신분을 부여하고 이들로 하여금 조선민들을 예전처럼 전통적인 방법으로 치료하도록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이들에게 의사의 하위 개념인 의생(醫生)이라는 신분은 부여했지만 정식 교육기관은 만들지 않았다. 즉 조선총독부는 전통의술을 식민지 원주민인 조선인들을 위한 하위의학으로 재편한 것이다.

당시 일본이 본토에서는 보건행정전담기구인 후생성을 뒀으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질병에 관한 행정사무를 경찰에 맡겼다는 사실이 당시 조선의 보건의료에 대한 일본의 시각을 말해준다.

일본에서는 전통의술에 대해 중국에서 전래됐다는 뜻을 담은 한방(漢方:Kampo)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었는데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이 한방이라는 단어가 조선의 전통의학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됐다.

일본은 조선의사들을 양성할 의지도 없었다. 중일전쟁 전까지는 1926년 세워진 경성제대 의학부가 유일한 의학교육기관이었고 일본인의 학생 비중이 높았다.

요약하면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일본은 식민지 통치를 위해 교육도 받지 않은 이들에게 의사유사면허를 부여하는 전통의사 제도를 유지시킨 것이다. 정작 일본 자국에서는 없애버린 제도였음에도 말이다.


한의사 제도, 전쟁 중 국회 통과

1945년 갑자기 해방이 되고 1948년 군정이 끝날 때까지 의사면허를 인정하는 문제에 대해 혼란이 거듭됐다. 그러나 일본이 ‘의생’이라는 신분으로 지정해놓은 전통의사들의 면허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7월 취임한 보건부 장관은 “한방의사는 그 방법이 모두 비과학적인 것으로 앞으로 이것이 과학화되지 않는 한 우리가 구태여 없애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 소멸될 것이며 과학화된다면 자연 발달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한의학의 공인을 반대했다.

그러나 한창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9월 피난처인 부산에서 열린 국회에서 한의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당시는 몇 안 되는 조선인 의사들의 대다수가 전쟁터에 나가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5.16 혁명 직후 열린 1961년 6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에서 한의사제도 삭제 및 한의과대학 폐지가 통과됐다. 전통의사제도가 폐지되고 의사면허가 일원화될 기회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한의사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1963년 12월 13일에 한의사제도가 다시 복원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전통의학에 대해 일제시대의 영향이 남아 공식적·법률적 용어로 여전히 한의학(漢醫學)이 쓰였는데 1986년 의료법 개정을 통해 한의학의 한자 표현이 ‘漢醫學’에서 ‘韓醫學’으로 바뀌게 됐다. 이에 따라 한의원, 한의사, 한약, 한의원 등의 ‘한(漢)’자가 모두 ‘한(韓)’자로 바뀌게 됐다.

한편 1945년 해방 이후 군정시대에 반쪽으로 나뉜 한반도의 북쪽에서도 일제 치하에서 ‘의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소위 전통의사들이 남아 있었다. 북한에서도 전통의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북한정권은 이들에게 동의사(東醫師)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1992년 이후 고려의사(高麗醫師)라는 이름으로 바꿔 사용해 오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는 의과대학교육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예과교육과정을 동일하게 이수한 이후 본과에서 양의학과 고려의학을 분리해 교육을 받게 되는데 양쪽의 교육과정에 중복되는 과목이 많다. 즉 고려의사도 교육과정에서 양의학을 배우고 양의사도 교육과정에서 고려의학의 기초이론과 일반 치료법을 배운다.

흥미롭게도 남북한과 함께 중국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통의사면허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대만 역시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북한이 양의사-고려의사로 호칭하는 것을 대만에서는 서의사-중의사로 호칭하는 것만 다를 뿐 교육제도가 매우 유사하다. 북한에서 전통의학교육을 전담하는 이들에게 고려의사면허를 부여하는 것처럼 대만에서도 전통의학 전공자들에게 중의사라는 의사면허를 부여하고 있다.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의료계 혼란 불러

전 세계 200여 개 가까운 나라들 중 유독 전통의학 전공자들에게 의사면허를 부여하는 남북한과 대만은 모두 장기간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과거 의료의 많은 부분이 신앙과 주술과 엮여 있었지만 과학화에 힘입어 18~19세기 서구의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따라서 19세기 말 서구의학이 도입된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전통의술이 사라지고 현대의학을 도입했으나 장기간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남북한과 대만에서만 전통의술이 제도권 내로 진입됐다는 사실은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결코 아픈 식민지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북한과 대만에서는 의사면허가 이원화돼 있지만 전통의학과 서구의학이 일찌감치 교육과정을 부분적으로 통합함으로써 교육의 통합을 이뤄냈다. 그러나 북한과 대만에서 의학과 전통의학의 결합을 통해 의료신기술의 발전이나 의료수준의 발전을 이뤘다는 소식은 들은 바 없다.

이원화된 의사면허제도는 많은 사회적 갈등을 낳고 있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의사들은 그들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전통의학 위에 현대의학이 더해질 때 획기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에서도 그런 기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의사들의 눈에는 음양오행의 기초 아래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한의사들의 행위가 주술사들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인다. 과학적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급속히 발전하는 의학의 빠른 속도로 인해 5년이 지난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도 있는 의학 분야에서 500년이 넘은 서적인 동의보감을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는 한의학이 의사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다. (동의보감에 귀신을 보는 법, 투명인간이 되는 탕제법 등이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렇게 갈등이 첨예한 가운데 정부는 한의사들에게 현대의료기기의 사용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의료계의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100여 년 전 일본의 한일병합과 36년간의 치욕스러운 식민지 시대의 유물이 이원화된 의사면허라는 이름으로 남아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의료계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아 등골이 시리다.

피아노 연주를 듣거나 가야금 연주를 듣는 것은 개인적 취향에 달린 문제다. 그러나 의학은 둘이 될 수 없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최선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환규 편집위원·전 대한의사협회 회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