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와 북한의 <2015>
조지 오웰의 <1984>와 북한의 <2015>
  • 정용승
  • 승인 2015.01.30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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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조지 오웰 사망 65주기에 다시 생각한다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윈스턴. 윈스턴은 진리부에서 근무하는 외부당원이다. 그의 아침은, 아니 모든 생활은 감시 아래에 있다.

빅 브라더의 감시 아래에. 빈속을 달래기 위해 쓰디쓴 진을 한 잔 마시기 위해 냉장고에 다가설 때도 웃으며 다가가고, 정맥류성 궤양을 앓고 있음에도 텔레스크린를 통해 나오는 통제를 따라야 한다. 매일 24시간, 어쩌면 평생 끌 수 없는 텔레스크린의 통제에 이미 익숙해진 듯 윈스턴은 항상 웃는 얼굴이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불평을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모습이 텔레스크린을 통해 내부당원에게 보인다면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 된다.

단순히 어디론가 끌려가 숙청당하는 것이 아닌 ‘윈스턴’이라는 사람 자체가 ‘역사’에서 지워진다는 것이다. 물론 어제까지만 해도 인사를 했던 사람들은 마치 그가 원래 없던 것처럼 생활한다. 이것을 그들은 ‘이중사고’라고 부른다.

어쨌든 이런 윈스턴이 고함을 치고 인상을 쓰는 순간이 있다. 오세아니아의 적 ‘골드스타인’을 향해 욕지거리를 할 때, 그리고 적국에 대한 증오를 분출하는 ‘증오 주간’ 때다.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골드스타인을 향해 오세아니아의 모든 사람들은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다.

지금까지 묘사된 상황을 정리해보자. 위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오세아니아’다.

이곳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통제된 사회다. ‘개인’은 없다. 그러나 ‘당(黨)’은 영원한 곳이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에서는 이런 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라고 부른다.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는 사회다. 개인의 생각이란 없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런 사회가 아직 대한민국의 머리맡에 기생하고 있다.

북한이라는 이름을 걸고. <1984>에 나오는 오세아니아의 모습은 북한의 모습과 많은 부분 닮아 있다. 음식은 항상 모자라고 따뜻한 물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목숨은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그런 불안한 현실이 그렇다.

▲ 감정을 숨길 수 밖에 없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

조지 오웰은 이런 전체주의 사회를 1948년 11월 <1984>라는 제목으로 그려냈다. 그는 어떻게 이런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일각에서는 그의 청년 시절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전체주의를 경계하게 했다고 말한다. 에릭 블레어(조지 오웰은 필명이다)는 1903년 6월 25일 당시 영국령이던 인도의 벵갈에서 태어났다.

에릭 블레어는 중류층의 가정에서 자랐고 이튼스쿨을 다니던 어린 시절, 계급차별을 느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못생겼다는 열등감과 함께 섞인 이 차별감은, 그가 당시 버마(현 미얀마)에서 인도제국 경찰이 될 때까지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국 경찰로서 일하며 에릭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깊은 혐오를 느꼈다고 한다. 휴가차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 그는 경찰제복을 벗는다.

재미 있는 점은 보통 조지 오웰을 소개할 때 ‘반공’적인 성향을 가진 작가로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전체주의를 경계했을 뿐 공산주의를 배격하거나 혐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1937년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인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쓰기도 했다. 조지 오웰의 사망 65주년이 되는 1월 21일 그의 서적을 읽으며 북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정용승 기자 jeongys@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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