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치 혀끝이 갈라놓은 분단 70년
세 치 혀끝이 갈라놓은 분단 70년
  • 이성은 기자
  • 승인 2015.02.0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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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얄타회담 70주년에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됐다. 영국과 프랑스가 대독 선전포고를 날리면서 유럽 전역은 전쟁에 휩싸였고 전쟁의 불씨는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로 번졌다. 전체주의를 내세운 독일·이탈리아·일본은 동맹국을 조직했고 영국·프랑스·미국·소련 등은 연합국을 결성해 동맹국에 맞섰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집계된 전사자 수는 1294만8300명, 민간인 사망자를 포함하면 무려 5000만 명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7년간 전쟁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다. 일본 항복은 일찌감치 예견된 것이었다. 이탈리아는 1943년 9월 이미 백기를 들었고 연합국의 파상공세에 독일도 사실상 패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따라서 연합국의 주축 세력인 미국·영국·소련 수뇌부들은 독일의 패전과 최종 승리를 기정사실화한 채 종전 이후를 계획하는 회담을 개최했다. 이것이 바로 1945년 2월 4일~11일까지 개최된 얄타회담이다.

   
▲ 얄타회담에 모인 주요 연합군 수뇌부들의 모습. 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이 회담의 주요 목적은 독일의 패전 이후 관리, 해방을 맞이하게 될 국가들의 처리에 대한 논의였다.

독일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합의됐다. 패전 후의 독일은 주요 연합국인 소련·미국·프랑스·영국이 분할 점령하기로 동의했다. 독일의 군수산업은 폐쇄 또는 몰수하고 주요 전범자들은 뉘렌베르크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해방국에 대한 논의는 이후 한반도 역사 형국을 좌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신탁통치가 거론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얄타회담을 통해 한국 신탁통치 방침을 연합군 수뇌부들에게 공식적으로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얄타회담의 합의 내용은 한반도 분단의 초석이 됐다. 미국과 소련은 종전 직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군사분계선에 대해 합의했고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에 각각 미소 군정이 실시됐다.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두 번의 유엔 총회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한국은 분단국가가 됐다.

70년 전 열강들의 한반도 계획 속에 정작 한국의 의견은 없었다.

2015년 2월 얄타회담 70주년을 맞이한다. 동시에 우리는 올해 분단 70주년을 맞이한다. 한국은 여전히 열강 사이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갖고 있다. 얄타회담 70주년 이 회동이 초래한 분단의 결과를 되새기면서 국방과 국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고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성은 기자 nomadworker@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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