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없는 복지’ 논란 역사에 답이 있다
‘세금 없는 복지’ 논란 역사에 답이 있다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2.0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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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연말정산 논란과 관련해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현 정부가 공약했던 ‘세금 없는 복지’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진보 진영에서는 이를 두고 ‘복지 없는 세금’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무상복지라는 말이 사실 세금복지였다는 것을 이제 국민들이 깨닫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렀다는 지적도 있다. 한번 맛들인 복지를 중단한다는 것은 정권을 내놓아도 안 되는 일임이 이미 그리스를 비롯해 남유럽 사태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우리는 세금을 국민의 의무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세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고대 국가의 왕조들은 예외 없이 정복국가였기에 세금은 왕을 비롯한 지배세력의 수탈적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근대 계몽주의 사조에서 말하는 ‘사회계약’은 다름 아닌 이 세금을 왕과 귀족이 함부로 걷지 못하게 하자는 데 근본 바탕을 둔 이데올로기였다. 근대 왕정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왕의 소유물이었다. 그리고 백성은 왕의 자본이었으며 세금은 그 자본으로부터 나오는 왕의 소득이었다.

그러한 세금의 본질은 ‘Tax’라는 세금의 라틴어 어원 ‘Taxis’에서도 확인된다. ‘Taxis’는 ‘나는 부과한다’ , ‘나는 평가한다’, ‘ 나는 책임지운다’라는 뜻이다. 한자 ‘세(稅)’의 갑골문은 ‘감춰진 벼를 뽑아낸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한 세금을 잘 운용한 국가들은 역사 속에서 번영을 누렸지만 잘못 다룬 나라들은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몰락하거나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야 했다.

영국 왕립학술원 연구원인 사빈(Sabine) 교수가 1980년에 출판한 <세금의 약사(略史)>(A short history of taxation)에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국가의 흥망에 세금이 어떻게 관련됐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내용은 전태영 경상대 교수가 <세금 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소개하기도 했다. 어느 국가든지 세금을 거둔 만큼 쓴 국가들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쓴 만큼 세금을 거두게 되면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는 내용이다.


과도한 세금이 불러오는 역효과

이 책의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로마의 전성기에는 속주들에 대한 세금이 매우 낮았다는 사실이다.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직접 속주들과 세금 계약을 하기 위해 제국을 순회했다. 당시 로마의 속주들은 강력한 로마 군사력이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낮은 세금을 내는 것에 만족해했다.

로마는 그렇게 해서 걷은 세금으로 속주에 로마식 도서관과 공중목욕탕, 그리고 도로 등의 공사를 해줬다. 하지만 로마 말기에 잦은 전쟁과 거대한 공공지출로 재정이 부족해지면서 황제들이 속주의 세금을 올리자 속주의 농민들은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지역을 이탈했다.

그러자 로마는 농민들의 이탈을 강제로 막았고 이는 속주의 농민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속주는 새로이 이주해 온 게르만 집단이 낮은 세금으로 보호를 약속하자 속속 이들에게 투항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거대한 제국을 바바리언들에게 넘겨줘야 했던 것이다.

▲ 자발적 세금 납부로 영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세금이 국가의 흥망에 끼친 가장 극적인 사례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치적에서 드러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세금을 국가가 정하지 않고 국민들이 주는 대로 받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실천했다.

그 결과 당시 영국의 세금은 유럽에서 가장 낮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영국의 세금제도는 놀라운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내게 된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위협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국민들에게 전비 모금을 호소했다.

당시 영국 왕실의 재정은 빈약했고 이로 인해 스페인에 맞설 전함 구축 비용이 부족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전비 모금을 국민에게 호소하자 상인들과 목축업자들이 먼저 적극 호응에 나서게 됐다.

그 결과 여왕이 제시한 금액보다 훨씬 많은 34만 파운드의 모금이 이뤄졌고 영국인들의 높은 애국심은 그해 아르마다 해전에서 해적 드레이크를 고용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이를 계기로 제해권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당시 스페인은 어땠던가.

16세기 스페인에는 ‘알카발라’(alcabala)라는 소비세가 있었다. 거래 단계마다 거래가액에 10%가 부과되는 세금이었는데 4번 정도 유통단계를 거치면 물건 값이 2배로 뛰어올랐다.

결국 스페인의 알카발라는 물가 상승과 생산 둔화의 주범이 되고 말았다. 시민들 사이에는 무거운 조세에 대한 저항으로 광범위한 조세 회피가 성행했다. 그 결과 90%의 세원이 사라져 버렸다.


백성을 우롱한 황당한 세금들

영국도 근대왕정에 이르면 황당한 세금들이 등장하게 된다. 17세기 말경 프랑스에서 처음 부과되기 시작한 화로세(furnace tax)는 가난한 계층에 부담을 주는 세금이었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미움을 산 적이 있었다.

▲ 과도한 세금으로 평민을 짓밟고 잇는 프랑스의 성직자와 귀족의 모습

영국에도 화로세가 있었다. 그런데 세리들이 화로를 조사하기 위해 방문하는 것이 영국에서는 가정에 대한 침입으로 간주됐다.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와 구석구석을 뒤지는데 반감이 커지면서 화로세는 당시에 존재하던 노예제도와 유사한 느낌을 줬던 것이다.

결국 영국에서는 화로세가 폐지되고 대신 ‘창문세’(window tax)가 생겼는데 이 세는 창문의 개수에 따라 부과해 징수원이 집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전의 반발이 완화됐다.

그러나 화로세를 피하기 위해 화로를 부쉈던 주택 소유주들은 이번에는 창문을 폐쇄했고 신축 건물들은 창문의 크기와 수를 최소화했다. 이는 영국에서 많은 질병의 원인이 돼 폐지되기에 이른다. 지금도 유럽의 오래된 주택의 창문 개수가 적은 것은 창문세를 피하기 위한 서민들의 고육지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세금도 가혹했다. 법으로 정해진 세금 외에도 지방 수령들과 향교의 도학자들, 사병을 거느린 양반들은 멋대로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해가곤 해서 이런 시조도 등장했다.

‘이 몸이 살자하니 물 것 많아 못살겠네. 피의 껍질 같은 작은 이, 보리알 같이 크고 살찐 이, 굶주린 이, 막 알에서 깨어난 이, 작은 벼룩, 굵은 벼룩, 강벼룩, 왜벼룩, 기는 놈, 뛰는 놈에 비파 같이 넓적한 빈대 새끼..(이하 생략)’<‘이신(一身)이 사자하니’ 중에서>

조선 후기 이런 가혹 세정의 문란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에게 ‘왜군에 합류한 백성이 수없이 많다’는 보고의 배경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금의 본질은 국가를 위한 국민들의 강제노동이다. 모든 국민은 세금을 내고 남은 것에서 부족한 분을 채우려면 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 세금을 우습게 아는 정권이 온전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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